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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지 않는 지성 '장 폴 사르트르' 비판적 고찰 (폴 존슨의 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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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8. 23.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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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지식인의 두 얼굴
출판사: 을유 문화사

 

장 폴 사르트르는 버트런드 러셀처럼 대중을 상대로 설교를 하고자 했던 전문 철학자였다. 그런데 두 사람의 접근 방식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러셀은 철학을 대중은 참여할 수 없는 성직자들의 과학으로 봤다. 러셀처럼 세속적인 철학자들의 대부분은 지혜의 극히 일부분만을 추출해서 신문 기사나 대중 서적, 방송 등을 통해 아주 희석된 형태로만 유포시킬 수 있을 따름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카페에서 철학을 토론하는 나라에서 연구한 사르트르는 희곡과 소설을 통해 대중을 자신의 사상 체계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사르트르의 시도는 최소한 한동안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20세기 그 어떤 철학자도 세계 전역의 너무나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정신과 태도에 그처럼 직접적인 영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실존주의는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인기를 얻은 철학이다. 사르트르의 희곡들은 히트를 쳤다. 그의 저서들은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그중 일부는 프랑스에서만 200만 부 이상 팔렸다. 그는 삶의 길을 제시했다. 그는 불명료한 형태이긴 했지만, 세속적인 교회의 지배자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결국 어떻게 됐는가?

대부분의 지도적인 지식인들처럼, 사르트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였다. 그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고 나면 놀랄 일은 아니다. 그는 버릇없는 외동아들의 전형적 사례였다. 그의 가족은 지방의 중상층 계급이었다. 아버지는 해군 장교였고, 어머니는 알자스 지방의 부유한 슈바이처 가문이었다. 사르트르의 아버지는 그의 아버지의 말에 꼼짝도 못 하는 변변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영리했던 그는 다재다능했으며, 작은 키를 보완하기 위해 텁수룩하게 수염을 길렀다. 여하튼 그는 사르트르가 15개월밖에 안 됐을 때 사망해서 우리 어머니 침실에 있는 사진으로만남았다. 1905621일에 태어난 사르트르는 아버지로부터 작은 키와 뛰어난 머리, 책들을 물려 받았다.

그는 당대에 가능한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라로셸의 명문 국립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당시 프랑스 제일의 고등학교였던 파리의 앙리 4세 고등학교에서 2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고, 프랑스의 지도적인 학자들이 학위를 받는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다녔다.

그는 권투와 레슬링을 했다. 피아노를 꽤 잘쳤고, 힘이 넘치는 목소리로 노래도 잘 불렀으며, 사범학교의 연극 평론지에 풍자적인 스케치들을 기고했다. 그는 시, 소설, 희곡, 노래 가사, 단편 소설, 철학 에세이를 썼다. 그는 다시 한번 어릿광대가 됐는데, 이번에는 훨씬 다양한 재주를 부렸다. 그는 해마다 300권의 책을 읽는 습관을 길러서 수십 년 동안 그 습관을 유지했다.

1930
년대는 사르트르에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월이었다. 그가 열정적으로 갈망하고 고대했던 문학적 명성은 그에게 오지 않았다. 그는 촌스러움의 축소판이라 할 시골 도시 르아브르에서 1930년대의 대부분을 교사로 보냈다. 아롱의 제안에 따라 베를린으로 여행을 간 사르트르는 그곳에서 당시 중부 유럽에서 제일 독창적인 철학이었던 후설, 하이데거와 현상학을 공부했다.

그런데 이들 철학은 고역스러웠다. 그는 부르지아지를 혐오했다. 그는 굉장히 계급 의식적인 사람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었다. 사실상 그는 축약본 정도는 읽었을 수도 있지만 마르크스를 읽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반항아, 특히 이유 없는 반항아였다. 그는 어떤 당에도 입당하지 않았다. 그는 히틀러의 득세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나중에 어떻게 주장했건, 남아 있는 기록들은 그가 전쟁 전에는 강경한 정치적 관점을 갖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르트르는 그 당시부터 평생 쭉 자신을 젊은이, 특히 젊은 학생들과 동일시했다. 그는 제자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다. 그의 메시지는 이랬다.

개인은 스스로를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개인에게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비판할 권리가 있다. 그는 니장과 아롱 같은 친구들이 책을 출판하고 명성을 얻는 것을 지켜보면서 원통해했다. 결국 그는 1936년에 독일에 대한 연구서 『철학 연구』를 내놨지만, 책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원하던 것들은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르트르의 연구의 핵심은 픽션과 드라마를 통해 철학적 행동주의를 현실 세계에 투사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후반 즈음에는 그의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확고해졌다. 그는 기존의 소설가들 모두는 직접적ㆍ간접적으로 데카르트와 흄으로부터 도출해 낸 과거의 사상들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 폴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이데거의 시간을 주제로 소설을 쓰는 것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이라며 굉장한 흥미를 보였다. 사르트르의 난점은 그가 1930년대부터 소설과 철학을 별도로 작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두 가지를 한데 묶어 보여 줬을 때 사람들은 흥분하기 시작했고, 무대를 통해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사르트르를 출세시킨 것은 전쟁이었다. 프랑스에게 전쟁은 재앙이었다. 니장 같은 친구들에게는 전쟁이 죽음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쟁은 고난과 치욕을 안겨 줬다. 그렇지만 사르트르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전쟁이었다. 그는 육군 포병 부대 사령부의 기상 관측 분대로 징집됐다. 그는 거기서 풍향을 실험하기 위해 공중으로 뜨거운 공기가 담긴 풍선들을 날렸다.

동료들은 그를 비웃었다. 수학 교수였던 상병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가 군대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사기는 바닥을 기었다. 사르트르는 절대로 목욕을 하지 않는 것으로, 구역질 날 정도로 더러운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대신에 그가 한 일은 글쓰기였다. 그는 날마다 나중에 『자유의 길』로 완성될 소설 5페이지씩을, 『참전 일지』 4페이지씩을, 수신인이 모두 여자인 수없이 많은 편지들을 썼다.

독일군의 침공으로 전선이 무너지면서 포로가 됐을 때(1940621)에도 그는 여전히 글을 쓰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트리어 인근의 포로 수용소에서 프랑스군 포로들, 특히 더러운 포로들을 경멸한 독일군 경계병들 덕에 정치적인 인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사르트르는 19413월에 부분 실명자로 분류되어 석방되기 전까지, 그는 소설과 희곡을 계속해서 썼다. 사르트르는 곧장 파리로 갔다. 그는 유명한 콩도르세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일자리를 얻었다. 이 학교의; 교직원 대부분은 망명을 했거나 지하로 숨어들었거나 아니면 수용소에 있었다.

사르트르는 운이 좋았다. 그는 1936년 인민 전선에서도 아무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나치의 기록이나 그 어떤 명단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나치가 관심을 가지는 범위 내에서는 깨끗했다.” 오히려 나치의 전문가들은 그를 우호적인 눈길로 바라봤다. 그들이 보기에, 중부 유럽의 철학을 바탕으로 나치의 학구적 지식은으로부터 인정받은 하이데거를 특히 강조하는 사르트르의 소설과 희곡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사르트르는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는 않았다. 그는 작품을 출판하고 희곡을 공연하는 데 조금의 어려움도 겪지 않았다. 앙드레 말로가 적었듯, “사르트르가 파리에서 독일군 검열관의 승인 아래 자기 희곡을 공연하고 있는 동안, 나는 게슈타포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사르트르는 다소 모호한 방식으로 레지스탕스를 무척이나 돕고 싶어 했다.다행스럽게도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여기에는 기묘한 아이러니가 있다. 지식인들에 대한 글을 쓰다 보면 익숙해지는 그런 종류의 아이러니다. 얼마 안 있어 실존주의라 불리게 된 사르트르의 개인적 철학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서 형성돼 가고 있는 중이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한 인간의 풍성과 중요성은 그 인간의 가치관이 아니라 행동에 의해, 말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행위의 철학이었다. 나치의 점령은 사르트르의 반권위주의적 본능을 한껏 자극했다. 그는 맞서 싸우고 싶었다. 그의 철학적 좌우명을 따른다면, 그는 군용 열차를 폭파하거나 SS대원들에게 총질을 해 댔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 그가 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말을 하고 글을 썼다.

그의 비판점
1.
즉 그는 이론상으로는, 그리고 정신과 영혼상으로는 레지스탕스였지만, 현실에서는 절대 그러지 않았다.

2.
그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과격하게 해석했다. 하이데거를 프랑스식으로 윤기 나게 해석한 결과물을 시대적 상황과 연결시켜서 적극적 행동주의 메시지를 제시했다. 독일인의 사상을 받아들여 적절한 시기에 유행 상품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프랑스인이 항상 두드러진 재능을 보여주었던 일이다. 하지만 단지 글 뿐이었다.

3.
사르트르는 이제 그보다 앞선 수많은 지도적 지식인처럼 자기 홍보 분야의 전문가였다. 그가 직접 하지 않으려 한 일들은 추종자들이 대신했다.『삼디 수아』는 악의적인 논평을 내놨다. “우리는 바넘의 시대 이후로는 홍보 활동이 올린 이런 개가를 본 적이 없었다.[1]” 그러나 사르트르 현상이 도덕적으로 공격을 받으면 받을수록, 사르트르의 인기는 더욱 높아져갔다.

『현대』 11월 호는 프랑스가 전쟁에 패배하면서 혼란에 빠진 나라라고 지적했다. 프랑스에 남은 것이라고는 문학과 패션 산업뿐이었다.실존주의는 프랑스인에게 위엄을 주고, 퇴폐의 시대를 살아가는 프랑스인의 개성을 유지시키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사르트르를 추종하는 것은 애국적인 행위가 됐다.

4.
그는 자신의 아내 드 보부아르를 처음 유혹했을 때,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성 철학을 개략적으로 설명했다. 그는 많은 여자들과 자고 싶다는 욕망을 솔직히 털어놨다. 그는 자신의 신조가 여행, 일부다처, 투명성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가 그녀를 훌륭하게 조련된 동물로 보고 있다고 느꼈다. 사르트르는 각자가 상대방에게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모두들 짐작하겠지만, 투명성 방침은 종국에는 진실 은폐라는 부가적이고 더욱 지저분한 단계에 도달했다.

5.
사르트르는 지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수준에 있는 사람과는 그 누구와도 우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6.
그는 마흔이 되기 전까지는 중요한 정치적 견해를 사실상 전혀 갖지 않았다. 1946-1947년에 자신이 젊은이에게 신망이 높다는 것을 의식한 사르트르는 어떤 당을 지지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그는 지식인에게는 노동자를 지지해야 하는 일종의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노동자를 아무도 알지 못했고, 노동자를 만나려는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7. 1952
년에 공산당과 관련된 딜레마를 해결한 사르트르는 공산당을 지지하기로 결심했다. 이것은 공산당이 두 가지 선전 선동 캠페인에 관여하면서 도달하게 된, 이성적인 판단이 아닌 감성적 판단이었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1952년에 공산당에 동조한 것이 전혀 논리적이진 않았다. 당시는 스탈린의 무시무시한 범죄가 서방 세계에 상세하게 보도되고 진실로 받아들여지던 때였기 때문이다.

8.
이제 사르트르는 그동안의 주장들이 뒤집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스탈린의 수용소에 대해 어색한 침묵을 지켜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버트런드 러셀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가 남긴 불쾌한 격언이 진실임을 상기시켜 주는 사례다. “아무리 어리석고 믿을 수 없는 주장이라 해도 철학자 한두 명은 그것을 두둔하게 마련이다”.


9.
카뮈라는 사람은 굉장히 쓰라린 조롱을 그에게 남겼다. “사르트르는 안락의자에 앉아 역사를 창조하려고 기를 쓴다”.

10.
기존의 체제를 폭력과 동일시하고, 따라서 기존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한 살인을 정당화하는 말장난의 발명자는 사르트르였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이후로 사회를 짓누르기 시작한 많은 테러리스트 운동의 학술적 대부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예견하지 못한 것이 있다. 그가 철학적으로 장려했던 폭력의 대부분이 흑인에 의해 백인에게 가해진 것이 아니라 흑인에 의해 다른 흑인에게 가해졌다는 것이다.

11.
많은 폭력주의자들이 사르트르의 철학적 행동주의와 필수적인 폭력에 대한 주장에 열광했다. 그런데 이;들 대량 학살자들은 사르트르의 이념적 자식들이었다.

12.
사르트르는 너무나도 애처로운 인물이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실명 상태였으며, 종종은 술에 취해서 돈 문제를 걱정했고, 자신의 관점에 확신이 없었다. 결국 다시 한번 러셀처럼 그가 대변한 것은 좌파와 젊은이의 진영에 속하려는 모호한 욕망에 불과했다.



 


[1] 19세기에 뛰어난 홍보로 유명해진 미국의 흥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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