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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크의 초기 학문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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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11. 4.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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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름: 케인스 하이에크 (Keynes Hayek, The Clash That Defined Modern Economics)
출판사: 부키
저자: 니컬러스 웝숏
옮긴이: 김홍식

 


케인스보다 열여섯 살 어렸던 하이에크는 케인스와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전쟁을 겪었다. 1914년 전쟁이 터졌을 때 하이에크는 열다섯 살의 학생 신분이었다. 그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는 원래 대학 강사가 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의사로 생활했다. 상근직 학자의 지위를 얻지 못한 패배감을 결국 극복하지 못한 아우구스트는 빈 대학에서 시간제로 식물학을 강의하는 일로 위안을 삼았다. 케인스의 집안처럼 하이에크의 집안도 학문과 관련된 사람들이 많았다. 아우구스트의 부친 구스타프 폰 하이에크는 고등학교 과학 교사였고, 아우구스트의 장인 프란츠 폴 유라셰크는 오스트리아의 유명 경제학자였다. 하이에크는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포부를 물려받았는지 전시 군 복무에 들어가면서부터 전쟁이 끝나는 대로 대학 강사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하이에크는 나중에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대학 교수가 되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딱히 어떤 주제를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고 정신의학자가 될 생각도 있었다.”라고 술회했다.

전선에서 접한 경제학
케인스와 달리, 하이에크는 학업 성적이 보잘 것 없었고 학교에서 쫓겨난 것도 두번이나 됐다. 하이에크는 쫓겨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선생님들과 문제가 있었다. 내 학습 능력은 겉으로 분명히 드러날 정도였지만 수업 태도가 게으르고 무관심했다. 이 점이 선생님들의 신경에 거슬렸다. 나는 시험에 통과할 만큼만 배우면 된다는 생각으로 줄곧 숙제를 하지 않았다.” 군에 입대해 사관 후보생으로 훈련 받을 때는 사전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거의 최고 성적을 거두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전선에서 보낸 대부분의 시간은 끝이 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고 무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루함이었다. 하이에크는 독서에서 위안을 찾았다. 이때 빌려 본 책 한 권을 통해 경제학이라는 학문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 경제학은 하이에크가 평생 열정을 쏟는 학문이 되었다. 하이에크는 평화기의 경제가 전시에 어떻게 변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국가의 필요가 자유시장에 우선하게 되는가 등의 문제에 흥미를 느꼈다. 하이에크는 경제를 어떻게 재조직해야 하는가에 대해 라테나우가 제시한 생각들을 읽으며 처음으로 경제학에 흥미를 느꼈던 것 같다. 그의 생각들은 분명히 온건한 사회주의였다.” 라고 말했다.

하이에크는 나는 공식적으로 사회 민주주의자였던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영국에서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라고 불리던 쪽일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 말에 따르면 그는 평생 자유당원이었던 케인스보다 왼쪽에 위치했던 셈이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새내기
1차 세계 대전이 종식되면서 당시 19세였던 하이에크의 진로도 바뀌었다. 원래 전쟁이 끝나면 경제학을 공부할 셈으로 군 복무 중에 빈 대학에 등록해 두었지만, 전쟁이 무한정계속될 경우에 대비해 다른 계획도 세웠다. 위험한 전선에서 벗어나되 명예롭게 전방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것이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외교관이었다. 하이에크는 우선 공군으로 전군을 신청했다. 공군에 가면 훈련 기간이 길어 그 사이에 외교관 학교 입학시험 공부를 할 시간이 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비겁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겁쟁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공군 입대를 자원하기로 결정했다. 전투 비행사로 6개월만 버틸 수 있다면 군을 떠날 자격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종전을 인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헝가리가 무너졌고, 외교관 학교도 사라졌다. 전투에서 명예롭게 빠지려던 동기도 사라졌다.”

하이에크는 먼저 세웠던 계획을 쫓아 빈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그때는 법학부에서 경제학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공부하며 오스트리아학파를 알아 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학파가 그다지 분명한 학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오스트리아학파가 자유방임 경제관을 설파하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 대전 때였는데, 전쟁 후 부상하던 마르크스학파와 대립하면서부터 학설이 분명해졌다. 오스트리아학파는 가격을 각별히 중시했고, 특히 상품의 기회비용을 주목했다. 기회비용은 소비자가 여러 상품 중 하나를 고를 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대안들의 가치다.

누군가 맥주를 산다면, 그 행위는 와인을 사지 않는 결정이다. 또 누군가 화폐를 자산으로 보유한다면, 이는 이자를 포기하는 결정이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보유하던 투자 수단을 매도한다면, 이 행위 역시 나중에 그 투자 수단을 통해 벌 수 있는 수익을 포기하는 결정이다. 기회비용 개념은 오스트리아학파 자본 이론의 밑바탕을 이룬다. 그들이 보기에 자본이란 사람들이 곧바로 소비할 수 있는 소비재의 생산에 들어가는 중간 생산 과정의 모든 투입물을 말한다. 즉 지금 당장 소비할 어떤 재화의 생산을 포기하는 대신, 나중에 더 값나가는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형성되는 여러 층의 생산 단계를 분석하는 것이 그들의 자본 이론이다.

하이에크는 카를 멩거의 저작 경제학 원리와 사회과학 방법론 탐구부터 공부하기 시작했다. 멩거는 재화의 양이 많아질수록 재화에서 얻는 가치가 줄어든다는 한계 효용개념을 처음으로 공식화한 오스트리아 학파 초창기 인물이다. 하이에크에게 경제학 공부를 지도해 준 학자는 피르드리히 폰 비저였다. 비저는 시장의 작동 원리를 위한 핵심은 가격이며 기업가들은 새 시장을 개발함으로써 진보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전쟁이 끝난 후의 빈은 하이에크가 경제학을 탐구하기에 완벽한 장소였다. 걷잡을 수 없는 물가 상승이 코 앞에서 일어나, 하이에크도 그 파괴력에 그대로 노출됐다. 의사인 부친은 진료비를 올려 받는 방법으로 아들의 대학 등록금까지는 마련했지만, 다른 지역으로 유학을 보낼 형편은 되지 못했다.

가난한 미국 나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답답해하고 있던 하이에크는 얼마 뒤 미국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아무 구속 없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하이에크는 다행히 정부에서 물가 상승을 보전해 주는 봉급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오르는 물가를 따라잡을 수 있는 소득을 벌었고 소소하나마 저축도 할 수 있었다. 그즈음인 1922년 봄 미국 뉴욕 대학 제러마이아 휘플 젱크스 교수가 빈을 방문했다.

이떄 미제스의 소개로 하이에크를 알게 된 젱크스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중유럽 국가들의 경제에 대해 책을 저술할 계획이었다. 얼마 후 젱크스는 이 저술에 필요한 연구에 하이에크가 참여하도록 주선하고, 곧바로 하이에크를 뉴욕으로 초청했다.

하이에크는 주머니 사정이 너무 빠듯해 편도 운임만 챙겨 대서양을 건너는 배에 올랐다. 게다가 전보 보낼 돈을 절약하려고 젱크스에게 도착 일자를 알려 주지도 않고 출발했다. 19233월 하이에크는 단돈 25달러만 손위 쥔 채 뉴욕 맨허튼 서안의 여객선 부두에 내려 젱크스의 뉴욕 대학 연구실로 찾아갔다. 하필이면 그때 젱크스가 자리에 없어 만나지 못했다. 돈도, 아는 사람도 없이 낯선 땅에 홀로 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하이에크는 젱크스가 돌아올 때까지 돈을 벌어야겠다고 마음 먹고 맨허튼 6번가의 한 식당에서 접시 닦이 일거리를 하나 구했다. 그가 개수대에 손을 담가야 할 순간을 한 시간 앞두고 젱크스가 돌아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하이에크가 육체노동을 하게 될 뻔했던 거의 유일한 기회가 그렇게 사라졌다. 하이에크는 92년을 사는 동안 한 번도 민간 부문에서 일해 본 적이 없었다.

하이에크는 미국에서의 새로운 삶을 열정적으로 시작했다. 우선 뉴욕 대학 경제학 교수 J. D 머기의 지도하에 박사 과정 학업에 들어갔다. 경기 순환에 관한 한 학계와 정부 기관의 최고 전문가로 꼽히는 웨슬리 클레어 미첼을 불쑥 찾아가 강의도 들었다. (경시 순환이란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는 호황기 다음에 경제 활동이 수축되는 불황기가 뒤따르는 현상을 말한다). 그리고 독일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컬럼비아 대학 경제학자 존 베이츠 클라크가 지도하는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케인스는 금을 비축하고 화폐를 관리하는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준 이사회의 방식에 대해 길게 언급한 바 있는데, 하이에크도 외부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연준 이사회의 작동을 흥미로워했다.

1924
5월 하이에크는 유럽으로 돌아오는 배에 올랐다. 돈도 떨어지고 다른 기회도 얻지 못해 더 이상 미국 생활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빈의 집에 와 보니 록펠러 펠로십을 그에게 수여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와 있었다. 수여 사실을 더 일찍 알았더라면 미국에서 한 해 더 머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하이에크는 그 뒤로 25년 동안 미국 땅을 다시 밟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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