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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의 저작 화폐론은 왜 일관성이 없는 책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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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11. 8.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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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케인스 하이에크(The CLash That Defined Modern Economic)

일관성을 갖지 못했다고 평가받는 케인스의 화폐론


케인스의 고군분투

미국의 경제 현실을 잠시 둘로보고 온 하이에크가 보기에 아무 구속 없는 자본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은 경제학의 미래가 논의되는 곳은 분명히 아니었다. 그래서 영국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한 하이에크는 1927년 케인스에게 편지를 써 놓고 직접 만나 자신을 소개할 방도를 찾기 시작했다. 1928년 런던-케임스브리지 경제 서비스라는 모임이 열릴 때 하이에크도 이 자리에 초대를 받았다. 이 모임은 1923LSE (런던 정경대학)와 케임브리지 대학의 합작 투자로 케인스가 설립한 곳이었다. 하이에크에게 케인스를 만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당시 하이에크는 영어로 말하는 게 서툴렀고, 오스트리아 식의 딱딱한 강세가 심했다.

서로 안면부지였던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그렇게 첫 대면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격식 따위는 제쳐 두고 곧바로 열띤 토론에 빠졌다. 하이에크에게는 이 만남이 획기적이고 중요한 자리였고 오래도록 품어온 야심을 펼칠 기회였다. 반면, 케인스에게는 그 만남이 일상적인 실랑이였고 길을 잘못 접어든 자유시장의 후예와 치르는 또 한 차례의 마찰일 뿐이었다. 하지만 반론을 제기하면 케인스는 자기 생각과 아주 다르더라도 매우 친절한 관심을 보이곤 했다. 이는 다가올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할지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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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스, 하이에크를 점찍다
하이에크는 런던에서 로빈스와 친구가 됐다. 로빈스는 당시 영국 경제학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독일어를 읽었고 미제스, 스웨덴의 크누트 빅셀, 오스트리아의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를 비롯한 대륙 경제학자의 저작도 공부했다. 로빈스는 정력적이고 포부도 컸을 뿐 아니라, 1929LSE 학장 윌리엄 베버리지에 의해 31세의 나이로 정치경제학부 교수로 발탁되며 영국 최연소 교수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로빈스는 교수에 부임하면서 LSE가 유럽의 사상을 전부 포괄하는 영국 경제 이론의 산실로서 마셜과 케인스의 본고장인 케임브리지에 맞서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이에크도 그에 못지않은 커다란 꿈을 품고 있었다. 그는 정상을 향해 가는 원대한 계획의 일환으로 여러 해 동안 런던에서 활동해 보자고 생각했다.

전에 사회주의 성향의 노동조직에서 일했던 로빈스는 하이에크가 쓴 <저축의 역설>을 읽고 그를 눈여겨보게 됐다. 하이에크는 이 논문에서 저축과 수요, 즉 개인이 저축하는 돈과 개인이 상품 구매에 쓰고자 하는 돈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고자 했다. 저축과 수요 사이에 직접적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미국 경제학자 워딜 캐칭스와 윌리엄 트루펀트 포스터가 전제로 삼는 이론이었다. 캐칭스와 포스터는 케인스와 마찬가지로 불황기에 경제 내 수요를 촉진하는 방법으로 공곤사업을 제안했다.

캐칭스와 포스터는 1926년 절약의 딜레마라는 논문에서 불황은 상품 수요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하며, 상품 수요의 부족은 저축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개인이 돈을 쓰는 대신 저축을 선택하고, 또 이 저축이 자본재에 투자돼 생산된 추가적 상품이 판매되지 않기 때문에 불황이 출현한다고 봤다. 즉 경기 순환의 고점에서 저축이 너무 많아지고, 그 때문에 팔리지 않는 상품이 넘쳐나는 저점이 찾아온다는 주장이었다.

캐칭스와 포스터는 수요를 촉진하기 위해 연방 예산 위원회같은 새로운 정부 당국이 필요하며, 돈을 차입해서라도 공공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소비자에게 돈이 흘러가 불황기에 생산된 과잉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고용 창출을 위해 연방 관청이 납세자들의 돈을 지출하도록 촉구했는데, 하이에크는 미국 워런 하딩 대통령의 보수적 장관 허버트 후버가 두 사람의 견해를 수용한 것을 개탄했다.

하이에크는 캐칭스와 포스터의 오류를 바로잡고자 쓴 저축의 역설에서 두 사람의 주장이 잘못된 개념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즉 자본이 생산 과정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현실 경제에서 저축이 새로운 생산의 투자에 항상 활용되는 것은 아니며, 상품이 팔릴 거라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을 때나 활용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소비자들의 저축이 상품 구매에 쓰이지 않고 팔리지 않을 상품의 생산에 투자된다고 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는 생산은 단 하나의 최종재와 가격으로 이루어지는 단일한 과정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떤 생산이든 새로운 투자는 규모의 경제를 촉박하기 쉽고 그러면 상품 가격이 떨어져 구매의 부담이 줄어드니, 신규 투자로 생산이 늘어나더라도 상품이 남아도는 사태가 생기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고 했다. 또 자본재를 생산하는 단계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각각의 생산 기간도 다르다는 뵘바베르크의 설명도 환기시켰다.

하이에크는 정부가 수요 촉진을 위해 경제 시스템에 돈을 주입하는 계획에 대해 물론 극도의 신중함과 초인적인 능력으로 관리되기만 한다면 그러한 조치로 위기를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하지만 장기적으론 경제 시스템 전체에 심각한 장애와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로빈스는 뵘바베르크를 독일어로 읽었을 뿐 아니라 저축의 역설에서 자기 논거를 펼치는 하이에크의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고용 함수는 케인스의 논리를 떠받치는 개념인데 하이에크가 이 개념을 설득력 있게 무너뜨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로빈스는 19312월 하이에크를 LSE로 초청해 네 차례의 강연을 하도록 주선했다. 하이에크의 회고에 따르면 그때 로빈스는 지금 케이스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것이라며 자신의 주제를 지목했다고 한다. 그만큼 하이에크는 로빈스가 자신을 초청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로빈스는 케인스에게 맞설 상대로 미제스를 초청하지 않았을까? 미제스는 하이에크보다 돋보이는 사람이었고 이미 케인스의 갖가지 주장에 제동을 거는 놀랄 만한 연구 성과를 이룩했는데 말이다. 짐작건대 두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로빈스가 생각하기에 케인스에게 제기하는 반론이 효과를 거두려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미제스의 영어는 어법에 맞지 않았고, 오스트리아 강세가 너무 강해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의 전기를 쓴 외르크 기도 휠스만도 미제스는 프랑스어나 영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지 못했다. 외국어로 대화할 때 의도한 위트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와 달리 하이에크는 뉴욕에 잠시 체류하는 사이 어법에 어긋나는 때는 있어도 기본적인 영어 회화를 습득했다.

하이에크가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는 것도 로빈스에게 중요했다. 비슷한 나이의 사람과 일하는 게 더 편했을 것이다. 미제스는 나이도 많았고 생각과 행동이 굳을 대로 굳은 상태였다. 말수도 적고 성격이 고약하기로 유명했다. 그의 아내 머르기트는 옛일을 회상하며 미제스와 지내면서 그의 성미에 겁이 날 만큼 놀랐다. 가끔씩 끔찍할 정도로 발끈하며 폭발했다. 이런 공격적 분출은 우울증 증세와 다름 없었다.”라고 언급했다. 미제스는 일상생활에서도 애로를 겪었던 것 같다. 머르기트에 따르면 미제스는 달걀을 어떻게 삶는지도 몰랐다.” 그러니 성격도 원만하고 합리적인 사람인 하이에크가 로빈스에게는 합당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하이에크의 저축의 역설에는 케임브리지에서 퍼져 나가는 케인스의 생각에 곧바로 대적할 만한 여러 논거가 이미 마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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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없이 보낸 7년의 산물, ‘미완성작화폐론
192910월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주식 시장이 붕괴되는 전대미문의 경제적 재앙이 일어났고, 뒤따라 미국 경제 전체가 붕괴되며 거대한 공포가 휩쓸었다. 경제 학자들은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덕분에 케인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근본적인 견해를 개진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고용 진작을 위해 어떤 정책을 도입할 것인지가 케인스의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런 논의를 언론과 정치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주창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공사업으로 고용을 창출하자는 주장에 케인스의 이론들이 타당성을 부여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은 주식 시장이 붕괴되면서 경기가 침체되었고, 미국과 유럽 양쪽에서 실업이 늘어나는 사태로 치달았다. 이 때문에 하이에크의 주장은 갈수록 대중적 정서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케인스는 1923년 화폐 개혁론을 출간하자마자 화폐론 저술작업에 들어갔다. 오랜 시간이 걸린 방대한 작업이었다. 평화의 경제적 귀결은 보름 만에 다 썼는데, 화폐론은 7년이나 걸렸다. 1929년에서 자유당 편에 서서 활동하는 등 영국의 정치적 논쟁에 신경을 쓴 때문이기도 했고, 킹스 칼리지의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재무처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대학 대소사에 관여한 때문이기도 했다.

케인스는 저술 외에 많은 일에 관여하는 와중에도 새롭게 떠오른 생각들을 체계화하려고 했다. 하지만 화폐론은 근 7년에 나누어 저술하다 보니 최종적인 저작의 일관성에 흠이 생겼다. 케인스는 계속 변해가는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기 위해 초고를 되풀이해 수정했다. 새로운 영감이 떠올라 책의 각 장을 전부 버리고 다시 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출간계획으로 잡힌 1930년 가을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19298, 출판업자 대니얼 맥밀런에게 보낸 케인스의 편지를 보면 이런 언급이 나온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돼 부끄럽습니다. 440쪽이 넘는 원고를 페이지 교정본 단계까지 손봤습니다만, 몇몇 장은 완전히 새로 써야겠고 책 전체의 구성에서 다시 바꿔야 할 부분도 아주 많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책은 서로 전혀 다른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혀 완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한 채 통합된 모양새가 됐다. 케인스와 절친했던 그의 전기 작가 해러드는 이 책은 케인스의 생각이 어떠한 전체상을 이루는지 담아내지 못했고, 명확하지 않은 채로 전체상의 횡단면만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라고 평가했다. 출간 한 달 전 최종 원고를 마치며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케인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작품으로서 이 책은 실패작입니다. 저술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너무 많이 바꾸는 바람에 책이 적절한 통일성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책의 서문에서 케인스는 이 책은 완결된 저작이 아니라 각 내용을 모아 놓은 상태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러한 유보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화폐론>193010얼 두툼한 두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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