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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주식시장 붕괴는 케인스를 토끼로, 하이에크를 거북이로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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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11. 5.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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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름: 케인스 하이에크(Keynes Hayek, The Clash That Defined Modern Economics)
저자: 니컬러스 웝숏
옮긴이: 김홍식

 

하이에크의 스승 미제스


케인스와 하이에크의 입장차이

하이에크가 사회주의의 장점에 의구심을 갖게 된 것도 미제스 때문이었다. 하이에크는 미제스의 글 『사회주의 공화국의 경제적 계산 (1920)』과 그의 획기적인 저작 『사회주의(1922)』를 읽으며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기존의 신념이 흔들렸고, 집산주의가 잘못된 이상임을 수긍하게 됐다. 하이에크의 말을 들어 보자면 이렇다. “우리가 바라는 좀 더 합리적이고 공정한 세계를 사회주의가 실현해 줄 것 같았다. 하지만 미제스의 『시회주의』를 접하고 그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좀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찾고자 했지만 그 방향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미제스는 어떤 경제든 효율적으로 작동하려면 가격 메커니즘이 꼭 필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이 가격 메커니즘을 무시한다는 점을 주된 이유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사회에 반대했다. 미제스는
『사회주의 공화국의 경제적 계산』에서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정부가 주된 산업을 소유하고 따라서 상품의 가격도 정하기 때문에 희소한 자원을 배분하는 가격의 핵심적 목적이 있으나 마나 한 것으로 전락한다고 주장했다. 미제스는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나 화폐의 사용에서 이탈하는 길로 나가는 것은 곧 합리적 경제 논리에서도 이탈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같은 미제스의 주장은 사회주의는 시장가격을 무시함으로써 개인이 저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는[1] 행위를 박탈한다는 하이에크의 최종적 입장 중 하나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하이에크는 미국에서 배운 것을 글로 적어 나갔다. 가령 미국에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자본을 빌릴 수 있어 자본재 산업이 호황을 구가하고 있는데, 하이에크는 이런 과정이 계속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봤다. 하이에크는 이를 토대로 경기 순환의 성격을 진단하는 자신만의 생각을 전개했다. (하이에크는 경기 순환을 산업 변동이라고 칭했다.) 이 산업 변동 이론은 앞으로 그가 공헌할 경제 이론은 물론, 케인스와의 논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하이에크는 경기 순환이 연구할 가치가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미국에서는 노동자가 작업하는 시간과 움직임을 연구한다든가 공장과 기계가 생산하는 산출물을 기록하는 것을 포함해 경험적 연구를 뒷받침하는 수단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유럽 경제학자들은 아직 그런 방법을 수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에 머물며 이런 경험적 도구들을 익힌 하이에크는 그런 작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연구소를 하나 설립해 그곳에서 경기 순환을 상세하게 연구하고 싶었다. 하이에크가 이런 생각을 내비쳤을 때 미제스는 회의적이었다. 경제학을 자연과학처럼 취급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경기 순환의 요소들을 기록해 봤자 잘못된 추론으로 이어지거나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라 봤다.

낭비하더라도 쓰는 게 낫다
영국에 있는 케인스의 생각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22<맨체스터 가디언>의 호외 연재물을 내자 마자 케인스는 이때 기고한 소론들을 보강해 『화폐 개혁론』으로 펴내는 작업에 들어갔다. 게다가 책이 출간되기 몇 달 전붙너 화폐가 사회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관한 새 책 『화폐론』도 저술하기 시작했다. 딱 부러지는 논조로 경제적 논쟁을 풀어내는 그의 글은 <타임스> 같은 기성 언론에서부터 대중 추수적인 <데일리 메일>에까지 인기를 끌었다.

1920
년대 들어 영국이 오래도록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자 케인스는 실업 문제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도 있었지만 엄청난 규모의 실업이 필요한 것처럼 간주되는 경제 현실에 분개했기 때문이다. 19237월 영국의 실업자는 110만명, 실업률은 노동 인구의 11.4퍼센트나 됐다. 실업 문제를 파고들다 보니 케인스는 경제가 장기적으로는 완전 고용이 달성되는 균형 단계에 도달한다고 가르친 마셜의 핵심 가정을 의문시하게 됐다. 실업률이 계속 높아지자 케인스는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정부가 국채를 발행해 금리를 낮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도로 건설을 비롯한 공공 토목 공사를 통해 정부가 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됐다.

하이에크가 미국에 머물던 1924년은 케인스가 자유시장의 작동을 반박하는 주장을 빠른 속도로 구축했던 결정적인 시기였다. 그해 1월에는 보수당이 하원 신임 투표에서 실패하고 소수당에 머물던 노동당이 자유당의 지원하에 보수당을 제압함으로써 소수당 정부를 구성하는 변화도 일어났다. 한편 다음 달 케인스는 다음과 같은 제목의 소론을 써서 로이드조지가 제기한 논쟁에 참여했다. “실업을 해결하려면 파격적인 대책이 필요한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누가 보더라도 그렇다일 것이라고 케인스는 답했다.

이 소론에서 케인스는 번영은 일회적인 게 아니라 누적적으로 이뤄진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을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깊은 웅덩이에 빠진 상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극이고 충격이고 가속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실업을 해결할 궁극적 대책으로 공공 주택건설과 도로 개선, 전력망 확충에 1억 파운드를 지출할 것을 제시했고, 경기 부양 정책이 기업 신뢰를 회복시킬 거라고 내다봤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한 방향으로 대담한 실험을 하자. 물론 그중 일부는 실패할 수도 있다. 실패할 공산도 크다.”

이처럼 납세자의 돈을 속 편하게 생각하는 케인스의 태도는 충격적이었다. 재무부 장관 필립 스노든에게는 특히 그랬다. 노동당 소속인 스노든은 경제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대다수 보수당 사람들보다 더욱 보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스노든은 같이 협의해야 할 동료 의원들에게도 공적 자금을 쓰자는 것은 재무부 장관이 내놓을 제안이 아니다. 재무부 장관은 돈을 쓰자고 닦달하는 의원들의 요구에 저항해야 할 사람이고, 그 요구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상황일 때도 지출을 최대한 줄이도록 제항해야 하는 자리라고 말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케인스는 돈을 쓰는 것 자체가 중요하며 돈을 낭비하더라도 안 쓰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부실한 자문을 듣고 집을 지었다거나 쓸데없이 비싸게 지었더라도 일단 집을 지으면 나라의 자산은 향상된 셈이다. 설계와 건설 비용 면에서 아무리 엉망이고 낭비투성이더라도 새로 남는 자산이다.”

케인스는 <네이션>에 기고한 두 번째 글에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근본적 주제를 다시 거론했다. “국내 투자를 촉진하는 방법을 고심하다 보면 내 생각이 아무리 이단적일지라도 결국엔 그 생각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라를 택하고 자유방임을 버리겠다. 기다렸다는 듯이 버리는 것도 아니며, 훌륭했던 예전의 자유방임 원리를 경멸해서도 아니다. 좋든 싫든 자유방임이 성공할 수 있는 조건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유방임 원리는 이중의 원리였다. 공공복리를 사적 기업에 맡기되, 사적 기업이 마음껏 성장하는 것을 제한하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않는다는 원리다. 그런데 지금은 사적 기업이 마음껏 성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여러 방식으로 제한과 위협을 받고 있다. 따라서 사적 기업이 제한과 위협을 받고 있다면 그들을 도와주지 않고 내버려 둘수도 없는 것이다.”

자유방임의 종언을 선언하다
케인스는 이 주제에 더욱 열중하면서 자신의 생각의 혁명을 조심스럽게 다듬어 가며 한 단계씩 나아가고자 했다. 그 생각의 혁명이란 자유방임은 겉으로만 그럴싸할 뿐 비논리적이며, 급변하는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졌다는 것이었다. 케인스는 옥스퍼드 대학의 시드니 볼 추모 강연에서 자유방임의 종언이라는 제목으로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제시했다. 2년 뒤에는 같은 내용을 베를린 대학에서도 제시했는데, 독일 사람들과 하이에크처럼 독일어르를 쓰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낱말 하나하나를 또박또박 읽어 나갔다. 이 강연에서 케인스는 완연한 블룸즈버리 그룹의 풍으로 발언했다. 영민하고 유창하면서도 비꼬는 어투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면서 구질서의 잘못을 꼬집었다. 그 시절에는 일반인들이 경제 이론을 지금만큼 알지 못했지만, 케인스는 자유방임을 겨냥한 지적 공격을 전개하면서 경제 이론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리고 개인이 최대한의 행복을 누릴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케인스는 자유방임 원리대로 개인의 사리 추구가 공익을 보장해 준다면 기업가가 자기 잇속을 추구하는 것만으로 정치철학자가 추구할 최고선이 달성될 테니 정치철학자는 기업가에게 자기 일을 맡기고 속 편하게 은퇴하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달리 말해 자기 잇속에만 기대는 것은 그가 보기에 정치의 종말이었다.

개인이 무릇 이래야 한다는 식의 자연적 자유를 가지고 경제 활동을 영위한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무언가를 소유하는 사람이든 새로 획득하는 사람이든 그들에게 영구적 권리를 부여하는 계약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천상에 무슨 통치자가 있어 사리와 공익이 항상 일치하게끔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아니며, 지상의 현실에서도 사리와 공익이 일치하도록 세상이 관리되는 것도 아니다. 계몽된 자기 잇속이 항상 공익에 이롭게 작동한다는 것은 경제학 원리에 바탕을 둔 올바른 추론이 아니다. 더욱이 일반적으로 자기 잇속을 밝히는 이기심이 계몽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개인들은 너무 무지하거나 약한 탓에 그 목적조차 성취하지 못할 때가 많다. 지난 경험에서도 개인이 사회적 단위를 이루면 멍청해지고 항상 개별적으로 행동해야 더 똑똑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케인스는 본색을 숨긴 사회주의자라고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공격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자 했다. 그래서 보호무역주의와 마르크스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데도 신경을 썼다. 그래서 보호무역주의와 마르크스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데도 신경을 썼다. 그는 두 입장 모두 논리적 오류와 사유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임의의 과정을 분석해 결론까지 끌고 가는 능력을 결여했다고 봤다. 두 입장 모두 자유시장 해법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정치적 전통임에도, 이러한 과학적 결함으로 인해 자유방임 시스템의 권위를 오히려 키워 주는 결과를 낳았다고 꼬집었다. 케인스는 보호무역주의가 사람들에게 그럴싸하게 들리는 이유야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분명하다고 했다.

케인스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나 일부 사회주의자처럼 사적 기업을 국가로 대체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그는 정부는 개인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을 할게 아니라 개인이 지금 전혀 손대지 못하고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라고 썼다.

케인스와 케인스주의자들을 일컬어 본색을 숨긴 사회주의자라고 집요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면을 따지자면, 오히려 하이에크가 한동안 사회민주주의자였던 적은 있었지만, 케인스는 어떤 부류의 사회주의에도 가담한 적이 없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가 시작되다
세계가 새로운 시대의 획을 긋는 1929년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되는 각자의 견해를 연마했다. 그 무렵까지 케인스는 상상력의 큰 도약을 이뤘지만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조리 있게 비판하는 사람도 없었다. 케인스의 처방을 배격하던 사람들은 그의 생각에 도전하며 지적인 승부를 거는 게 아니라 관성대로 움직이는 제도 뒤에 숨어 전통적인 시각이 옳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하이에크는 주로 기존의 개념을 가지고 연구했는데, 오스트리아학파의 자본 이론에 그가 기여한 내용은 빈의 작은 그룹 밖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 비유하자면,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케인스는 전력 질주로 달렸고 하이에크는 이제 막 출발선에 선 상태였다.

1929
10월 미국 주식 시장 붕괴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세계가 급속하게 금융 대란으로 빠져들자 통치자, 피통치자 할 것 없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설명을 듣고 싶어 했고, 탈출구를 찾아 혼란에서 빨리 벗어나려 했다. 흥청거리던 광란의 1920년대는 순식간에 침체의 늪을 향해 달려갔다. 세계는 10년이나 끌게 될 기나긴 불황으로 빠져들었다. 대량 실업과 빈곤의 이중고는 언제 끝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고통의 심연이었다. 어찌 손쓸 방법도 희망도 없는 험악한 새로운 환경에서도 낙관주의자 케인스는 혼란에서 벗어날 참신하고 명확한 출구를 순발력있게 제시했다. 반면 비관주의자 하이에크는 경제 시스템을 교정하려는 모든 시도가 왜 아무 소용이 없는지 그 원리를 제시하는 길로 나아갔다.

암울한 상황에서 케인스가 제시한 생각은 한 가닥 희망이었고 세상에서 두루 환영을 받았다. 하이에크가 제시하는 침울한 진단은 옳든 그르든 별로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하이에크가 던지는 메시지는 심각한 것이었지만 행동하지 말고 가만있자는 전혀 매력없는 태도를 두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이 등극하는 시대의 불확실성과 공포 속에서 케인스 혁명은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게 됐다. 하이에크의 비관적 태도는 논리적이었지만, 정치인들더러 경제적 혼란의 탈출구를 찾아내라는 대중의 아우성을 잠재울 수 없었다.

 


[1] 즉 가격을 지불할 의사를 통해 물건이나 서비스의 값어치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제각기 표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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