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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는 어떻게 하이에크의 우상이 되었나? (1919~1927)

일반서적

by noruboy 2020. 11. 3.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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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케인스 하이에크 (Keynes Hayek, The Clash That Defined Modern Economics)
저자: 니컬러스 웝숏
옮긴이: 김홍식

 

경제학에 문외한인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쓰여진 책

20세기 경제사상의 두 거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두 사람은 오랜 세월 열을 올리며 논쟁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2차 세계 대전의 난리 통에 케임브리지 킹스 칼리지의 예배당 지붕에서 단둘이 밤을 지새우는 희한한 장면을 연출할 때도 있었다. 독일 폭격기들이 그림 같은 영국 소도시들을 불바다로 만들려고 날아들던 그 시절, 두 사람은 예배당 지붕에 올라가 적기의 출현을 경계하며 하늘을 주시했다.

두 경제학자가 뜻을 같이해 나치의 위협에 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독일에 국가사회주의자들의 폭압 시대가 도래하고 히틀러가 부상할 것이라고 각자의 방식으로 예견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연합국의 전비 조달을 위해 월스트리트에서 자금을 빌려 오라는 영국 재무부의 업무를 맡았을 당시 케인스는 킹스 칼리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약관의 강사였다. 1918년 전쟁이 끝나자 케인스는 패전한 독일에게서 배상금을 가장 효과적으로 받아 낼 방안을 조언해 주는 일에 다시 기용됐다.

전쟁 후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의 결과를 보고 케인스는 충격을 받았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 지도자들은 복수심에 불타올라 독일에 혹독한 금전적 배상 책임을 물어 고통을 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케인스는 상당히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봤다. 그는 독일을 강제로 궁핍하게 만들어 독일 국민을 치명적인 빈곤으로 내몰면 극단적인 정치나 반란, 심하면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조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케인스는 베르사유 조약이 1차 세계 대전을 합당하게 매듭짓지 못하게 하고 2차 세계 대전의 불씨를 심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영국에 돌아와 연합국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강경한 논조로 단죄하는 『평화의 경제적 귀결 The Economic
Consequences of the Peace (1919)』을 저술했다. 이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케인스는 대중적 호소력을 발휘하는 경제학자로 국제적인 이목을 끌었다.

케인스의 유려하면서도 신랄한 글은 하이에크의 시선을 비껴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군의 젊은 병사로 이탈리아 전선에 뛰어들었던 하이에크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와 보니 빈은 초토화되고 사람들의 자신감은 무너져 있었다. 곧이어 오스트리아 경제는 급격한 물가 상승에 시달렸고 하이에크와 그의 가족도 고초를 겪었다. 하이에크는 물가 상승으로 부모가 모아 둔 저축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이때의 경험으로 하이에크는 망가진 경제를 물가 상승으로 해결하자는 주장에 늘 단호하게 반대하게 되었다. 까다로운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해법은 없다는 것을 집요하게 주장했고, 실업을 해결하려고 정부가 거액을 지출하면 걷잡을 수 없는 물가 상승을 유발할 뿐 아니라 폭압적 정치를 초래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이에크는 케인스가 중부 유럽인들에게 영웅과도 같은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패전국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전쟁 배상금을 부과하는 영국과 프랑스, 미국의 지도자들을 케인스가 용감하게 단죄했기 때문이다. 파리 평화 회의의 잘못을 질타하는 그의 저서 『평화의 경제적 귀결』은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고 몇 달 만에 출간되어 순식간에 전 세계적인 광풍을 일으켰다. 이 책에서 케인스는 미국 우드로 월슨 대통령과 프랑스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 영국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를 깔아뭉개는 묘사를 비롯해 연합국 지도자들을 겨냥해 불경스러운 공격을 퍼부었다. 혹독한 전쟁 배상금이 정치적 불안과 극단적 정치를 불러올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또 한 차례의 세계 대전을 촉발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섬뜩할 정도로 정확했다. 케인스의 관심을 끌려고 첫 접촉을 시도할 당시 하이에크는 케임브리지의 젊은 강사 케인스가 이처럼 다분히 부르주아적인 도발에 나서게 된 배경은 잘 모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케인스는 로이드 조지 총리에 대해서도 험담했다. 총리를 가리켜 사람을 홀리는 사이렌이요, “염소 다리를 한 음흉한 시인에다 마귀 할멈이 나대는 고대 켈트족의 신들린 숲에서 우리 시대로 튀어나온 반인반수의 방문자라고 묘사한 부분도 있었다. 케인스의 어머니는 이 묘사를 보고 그처럼 현란한 문구는 빼는게 좋겠다고 했고, 그는 이 조언을 받아들여 책에 싣지는 않았다. 하지만 케인스는 로이드조지가 파리 평화 회의가 한창인 와중에 냉소적 태도로 총선을 결정한 것은 자신의 자유당 정부의 승리를 노린 것이며, 누가 더 빨리 독일을 알거지로 만들 것이냐를 놓고 보수당 정적들과 내가 낫네, 네가 낫네하는 식의 한심한 경쟁을 벌였다는 비판은 원고에 그대로 넣었다.

케인스는 베르사유 조약의 세부 조항에 더 심각한 독소가 있다고 봤다. 독일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병합한, 석탄이 풍부한 알자스로렌 지방과 석탄 사업 지역인 자르, 구르니실롱스크 지방을 반환해야 했다. 케인스는 석탄을 넘겨주면 독일 산업이 붕괴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독인은 라인 강을 비롯해 수로로 쓰일 수 있는 하천을 국제기구에 내놔야 했고, 상선과 기관차, 차량도 다수 내놔야 했다. 케인스는 유럽 산업의 앞날은 암담하며 혁명이 일어날 공산이 아주 크다고 보았다.

반면에, 국수주의적인 대중 언론은 케인스를 친독일적이라고 비난했다. 독일이 응분의 처벌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케인스가 잘 모른다는 지적이었다. 케인스에게 독일 최고 무공 훈장인 철십자 훈장을 수여하라고 비꼬는 신문도 있었다. 한편 이와 관련해서 출시한 케인스의 책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이제 케인스는 베르사유 조약이라든가 세계 무역 및 경제학에 관한 것임변 어떤 현안이든 세계 각지 언론이 논평을 부탁하는 유명한 인사가 됐다. 빈에서 케인스의 책이 큰 인기를 끄는 것을 지켜 본 하이에크는 『평화의 경제적 귀결』로 케인스는 영국보다 대륙에서 훨씬 더 유명해졌다.”라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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