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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꼭두각시' 베르톨트 브레히트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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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7. 30.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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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을유 문화사
저자: 폴존슨


인류의 정신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예로부터 연극을 가장 강력한 매체로 이용했다. 에식스 백작과 부하들이 런던에서 반란을 꾀하기 전날인 160127, 그들은 당시만 해도 군주제를 타도하려는 희곡으로 간주되던 셰익스피어의 <리처드 3>를 수정되지 않은 완전판으로 특별히 상연해 달라며 셰익스피어가 소속된 극단에 돈을 지불했다. 예수회 수도사들이 주동이 된 반종교 개혁 세력은 바티칸의 프로파간다 피데 한복판에 극적인 선교 홍보물을 배치했다. 초창기의 세속적 지식인들 모두 무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볼테르와 루소는 모두 희곡을 썼다. 루소는 대중의 윤리를 타락시킬 수 있는 연극의 위험한 능력을 경고했다. 빅토르 위고는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을 무너뜨리기 위해 연극을 활용했다. 바이런은 운문 희곡을 쓰는 데 상당량량의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마르크스조차도 희곡을 썼다. 그렇지만 인간의 사회적 태도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무대를 의도적이고 체계적으로 활용해서 눈부신 성공을 거둔 첫 인물은 입센이었다.

브레히트는 입센과는 전혀 다른 성향의 극작가지만, 적어도 이 점에서는 입센의 자연스러운 후계자였다. 브레히트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선전 연극을 창시했고, 20세기의 새로운 문화 기관 중 하나인 정부 보조금을 받는 대형 극단을 훌륭히 활용했다. 그의 사후 20년 간인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브레히트는 생전에도 신비로운 인물이었고, 어느 정도까지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남아 있다. 이것은 그 자신과 그의 말년 30년 동안 그를 위해 충실하게 봉사한 공산당 조직 모두의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삶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자신의 작품으로 돌리고자 했다. 공산당 당국도 그의 출신과 배경, 실제 라이프스타일이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1919
년 이후, 브레히트는 문학계에서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우선 그는 거칠고 흉포하며 잔인한 면모 때문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평론가가 됐다. 그리고는 기타 솜씨와 작사 실력 (시적 재능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가진 가장 훌륭하고 순수한 재능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매혹적인 고음의 목소리로 노래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극단에 들어갔다. 당시의 브레히트는 1960년대의 폴 매카트니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20년대 초엽의 독일 연극계 분위기는 강경 좌파였고, 브레히트는 그런 분위기를 따랐다.

브레히트의 첫 성공작은 <스파르타쿠스>였다. <밤의 북소리>로 개명된 이 희곡으로 인해 브레히트는 클라이스트 상의 최우수 젊은 극작가 부문을 수상했다. 우익들은 이에 대해 거세게 항의했는데, 이 단계의 브레히트는 이념가라기보다는 기회주의자였다. 그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싶어 했고, 그 시도는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그의 목표는 부르주아지를 놀라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본주의와 중간 계급의 제도 모두를 비난했다. 그는 군대를 비난했다. 그는 비겁을 찬양하면서 그것을 실천했다.

브레히트의 친구 발터 벤야민은 훗날 브레히트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비겁함과 완전한 파괴주의를 꼽았다. 브레히트는 작품으로 논쟁과 스캔들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객석의 절반으로부터는 야유와 경멸을 받고, 나머지 절반으로부터는 열광적인 갈채를 받는 작품을 이상적인 작품으로 간주했다. 세심한 미학적 분석에 기초한 전통적인 연극 비평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는 전통적인 지식인들을 혐오했다. 학술적 지식인과 낭만적 지식인은 특히 경멸했다.

그는 사실상 새로운 종류의 지식인을 고안해 냈다. 그가 살던 시대의 루소나 바이런인 셈이었다. 자기 자신을 원형으로 만들어 낸 브레히트의 신형 지식인은 무자비하고 격하고 무정하고 냉소적인, 갱스터와 운동선수가 뒤섞인 인간이었다. 그는 경기장의 소란하고 땀내 나는 격렬한 분위기를 무대에 끌어들이기를 원했다. 바이런처럼 그는 프로 권투 선수들과 어울렸다.

1926
년에 시 공모전의 심사위원이 돼달라는 부탁을 받은 브레히트는 공모작 400편을 무시하고 자전거 잡지에서 찾아낸 조잡한 시에 상을 줬다. 리온 포이히트방거의 소설 『성공』의 등장인물인 엔지니어 카스파르 프뢰클에 대해 다른 등장인물이 하는 말은 사실상 브레히트를 묘사한 것이다. “자네에게는 가장 중요한 인간적 기관인 기뻐할 줄 아는 감각과 다정한 마음이 결여돼 있군.”

1920
년대 브레히트의 태도와 활동의 상당 부분은 그의 천재적인 자기 홍보 능력을 반영한다. 브레히트는 거의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헤밍웨이와 이 재능을 공유했다. 그리고 헤밍웨이처럼 브레히트도 자기 홍보의 일환으로 독특한 의상 스타일을 개발했다. 헤밍웨이의 스타일은 미국적 정신과 스포츠를 두드러지게 반영한다. 브레히트는 암암리에 헤밍웨이를 동경했지만, 누군가 파파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 아니냐고 넌지시 물어보면 매우 화를 냈다.

히틀러의 출현은 브레히트가 정치적 태도를 더욱 강하게 드러내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1926년에 브레히트는 『자본론』을 읽었다. 아니면, 최소한 일부분이라도 읽었다. 그 후로 그는 공산당을 지지했다. 브레히트의 작곡가 친구 한스 아이슬러의 누이이자 독일 공산당 지도자인 루스 피셔의 증언에 의하면 브레히트는 1930년까지는 실제로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다.

걸출한 홍보 능력과 연예계를 다루는 빼어난 책략은 브레히트가 명성을 얻는 데 한몫을 했다. 1930, <서푼짜리 오페라>의 영화화 권리를 갖고 있던 G. W. 팝스트는 브레히트가 집필한 시나리오로 영화를 촬영하는 것을 반대했다. 브레히트의 시나리오는 원작의 플롯이 바뀌었고, 더 날카로운 공산주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브레히트는 시나리오를 원래 상태로 수정하는 것을 거부했고, 논쟁은 10월에 법정으로 향했다.

브레히트는 카메라 앞에서 신중하게 연출된 짜증을 몇 차례 연기했고, 그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는데도 소송을 포기하는 대가로 상당한 합의금을 이끌어냈다. 게다가 예술적 완결성을 지키기 위해 잔인한 자본주의 체제의 손에 희생당한 순교자 행세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엄격한 마르크스주의 윤리관을 강조하는 머리말 에세이가 첨가된 시나리오를 출판했다. 자신이 대중에 헌신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자신의 지갑을 부풀리는 브레히트의 수완은 놀라웠다.

브레히트의 유명세가 커진 두 번째 이유는, 공산당이 1930년에 그들이 내세울 스타로 브레히트를 받아들였고, 그가 공산당의 강력한 조직적 후원을 한껏 활용했다는 점이다. 브레히트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대중 앞에 계속 꺼내놓은 다른 장치들도 있었다. 그는 노동자 무리 한복판에서 시를 쓰는 사진을 찍었다. 낭만적인 정치적 개인주의의 시대는 죽었고, 시는 이제 프롤레타리아의 집단 행위가 됐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자아비판 원칙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공산당이 괸리하는 카를 마르크스 훈련소로 그의 교육 오페라 <예스맨>을 가져가서는 학생들에게 비평을 해 달라고 청한 후 학생들의 관점에서 희곡을 다시 썼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협동 작업의 요소가 있음을 거듭 강조했다. 그렇지만 연극이 실패하면, 그는 재빨리 자신이 기여한 바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확실히 했다.

1933
년에 히틀러가 권좌에 오르면서 브레히트의 성공적인 경력은 갑작스럽게 끝나 버렸고, 그는 제국 의회에 화재가 난 다음날 아침에 독일을 떠났다. 1930년대는 그에게 힘든 시기였다. 그에게는 순교자가 되겠다는 소망 따 따위 애당초 없었다. 그는 빈으로 갔지만 범독일화를 외치는 정치적 분위기가 커져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국으로 갔지만 그는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 모두를 시장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곳에 적응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지도 않았다. 그는 연극계의 거물이나 그와 대등한 위치의 사람과도 어울릴 수 없었다. 그에게는 남의 눈에 띄어야만 한다는 절대적인 의무가 있었다. 개인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상적인 조건을 벗어나서는 자신의 연극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브레히트는 파우스트 같은 거래를 스스로 준비했다.

나중에 스위스에 근거지를 마련한 브레히트는 앞으로의 경력을 어떻게 계획할까를 결정하기에 앞서 유럽의 정세를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는 새로운 유니폼을 고안했다. 천으로 만든 회색 모자와 잘 만들어진 회색 노동자 복장이었다. 그는 공산당의 연줄을 이용해 풍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자신이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재빨리 파악했다. 동독에 새로 세워진 소련의 허수아비 정권은 정치적 인정을 받고 문화적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동독 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줄 중요한 문학계 인사들을 초빙하려고 했다. 브레히트는 문학적-이념적으로 동독의 목적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그는 나중에 정보 보조금을 대대 적으로 지원받아 제작된 사치스러운 <억척어멈>이 동베를린에서 막을 올렸다. 공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공연을 보기 위해 비평가들이 서유럽 전역에서 몰려왔다. 이로 인해 브레히트는 동독을 자신의 연극 활동의 본거지로 삼아야겠다고 확신했다.

브레히트는 상당한 이중 협상과 노골적인 거짓말에 탁월한 사람으로 1949년 여름 오스트리아 여권, 동독 정부의 후원, 서독의 출판업자, 그리고 스위스 은행 계좌 등 원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가지게 됐다.

브레히트는 심술궃을 정도로 난이도를 높이는 것이 학자들의 학문적 탐구 의욕을 감퇴시키고 신참 연구자들을 내쫓기는커녕,그에게 봉사하려는 학자들의 욕망을 자극한다는 것을 파악했다. 예술적 완결성의 이름 아래, 그는 다루기 힘들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인물로 체계적으로 변신했다. 루소 역시 정확히 같은 발견을 하고는 상황에 맞게 이용했지만, 브레히트가 사용한 수법의 경우에는 독일적인 효율성과 철저함까지 가미됐다.

브레히트가 세심하게 계획한 전략에는 세 번째 요소도 있었다. 그가 동독과 맺은 협정은 동독 정부를 예술적으로 정당화하는 대가로, 동독 정부가 그에게 극단과 극장을 제공하고 상당한 자원을 후원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세계적인 레퍼토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정확히 그런 내용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주 치밀하게 계산했다. 그렇게 되면 그의 저작권의 가치는 극도로 높아지는데, 그는 동독이 자신의 저작권으로 인해 혜택을 누리는 것을 인정하거나 동독 출판사의 통제권 안에 스스로 복종하고 들어갈 용의는 전혀 없었다.

1922~1933
년 사이 그는 독일 공산당의 출판 정책에 협조하기를 거부하면서, 정당한 로열티를 지불하는 건전한 자본주의 회사를 선호했다. 이번에도 그는 서독 출판업자 페터 슈르캄프에게 저작권을 맡겼고, 동독 측에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슈르캄프 출판사의 허가를 받음이라는 글귀를 집어넣으라고 강요했다. 동독이 브레히트가 쓴 작품의 독자적 판본을 출판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세계적인 출판에 따른 수익과 국제적 공연에 따른 로열티는 모두 화폐가치가 높은 서독 화폐로 지불됐다. 물론 그 돈은 그가 스위스에서 개설한 계좌로 이체됐다.

브레히트의 공연 스타일은 고도로 독창적이고 창조적이었지만, 그다 다루는 소재는 다른 작가들로부터 취해 오는 경우가 잦았다. 그는 다른 사람의 플롯과 아이디어를 다루는 재능 있는 각색가, 패러디 작가, 수선공, 첨단화 작업자였다. 역사를 통해 볼 때, 진실로 자신만의 것이 그토록 적으면서도 브레히트처럼 엄청난 명성을 얻는 작가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브레히트는 냉소적으로 물을 것이다. 안 될 것이 무엇인가? 프롤레타리아에게 봉사하는 한 문제 될 것이 무엇인가/

암메르스가
비용을 번역한 작품을 도용한 것이 적발됐을 때, 브레히트는 스스로 이름 붙인 문학적 재산권에 대한 근본적인 부주의를 시인했다. 훗날 자신의 지적 재산권을 집요하게 지켜 내려던 사내가 오래전에 한 자백이었다.

브레히트의 근본적인 부주의는 그가 추종자와 공산당 당원으로 연계된 작가를 제외한 다른 작가로부터 일반적으로 인기가 없었던 이유 중 하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학술적 작가들은 브레히트를 천박한 마르크스주의자라며 경멸했다. 아도르노는 브레히트가 노동자처럼 보이기 위해 손톱 밑에 때를 끼게 만드는 데 매일 몇 시간씩 허비한다고 말했다.

아도르노와 친구들이 브레히트를 그토록 싫어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스스로를 노동자와 동일시하는 것이 불쾌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런 것이 속임수라는 것을 제대로 간파했다. 물론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원하고 느끼고 믿는 것을 이해한다는 그들의 주장 역시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모두는 전적으로 중산층의 삶을 살았고,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노동자를 결코 만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최소한 일류 재단사가 정성 들여 디자인한 옷감으로 만든 프롤레타리아 복장을 입지는 않았다.

브로넨에
따르면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굶주리는 것이 선생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요? 성공해서 유명해지고 자신이 쓴 희곡을 공연할 극장을 가지는 것이 더욱 중요해요!” 브로넨은 그 뒤에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그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브레히트는 모순적이고 모호하며 신비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자신의 몸에 노동자의 복장을 걸친 것처럼, 자신의 속내를 교활하게 감췄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 경우는 딱 한 번 진심을 말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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