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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큰 형 '레프 톨스토이' 비판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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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7. 17.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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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지식인의 두 얼굴
저자: 폴 존슨
옮긴이: 윤철희

레프 톨스토이는(1828~1910) 우리가 검토하는 지식인 중에서 가장 야심만만한 인물이다. 그의 뻔뻔함 앞에서는 경외심이 생겨나고, 이따금은 두려움까지 생겨난다. 그는 자신의 지성을 원천 삼아, 내면에서 분출하는 영적인 힘으로 사회를 도덕적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적었듯, 그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왕국을 지상에서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모세 이사야, 공자, 초기의 그리스 현인그리고 기존의 가르침을 무턱대고 수용하지 않고 인생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설파했지만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이름도 얻지 못한 이들을 포함한 구세주의 사도라 할 수 있는 지식인 계보의 일부분으로 간주했다. 그렇지만 톨스토이는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이름도 얻지 못한 이로 남아 있을 의향은 전혀 없었다.

스물다섯 살 때 쓴 일기는 그가 특별한 권능과 뛰어난 도덕적 숙명을 늘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 천재에 대한 문학적 성경 묘사를 다룬 작품을 읽었다. 읽고 났더니 나 자신이 일을 하는 역량이나 일하려는 열망 모두에서 비범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마음속에서 다시 깨어났다.” “나만큼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을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이루 가늠하지 못할 만큼 위대하다”라고 느꼈다.

톨스토이는 남들에게 공감하고 그들과 일체감을 느끼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늘 거리감을 느꼈다. 기이하게도 그는 자신이 도덕적 재판권을 행사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판결을 내리는 자리에 앉아 있다고 느꼈다. 소설가가 됐을 때,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가 됐을 때, 그는 이런 신과 같은 권능을 아주 수월하게 행사했다. 그는 막심 고리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글을 쓸 때, 어떤 캐릭터에게 갑자기 동정심이 들기도 한다네, 그러면 그 캐럭터에게 훌륭한 성품을 안겨 주지.”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그의 경향은 사회개혁가가 되면서 점점 강해졌다. 그의 실제 행동 강령은 그가 규정한 신성과 같은 수준에 놓여 있었다. “보편적 행동을 향한 갈망은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자신을 신성의 소유자라고 느낀 톨스토이의 일기에는 그 사실을 기록했다. “도와주소서, 아버지시여. 오셔서 제 안에 거하소서. 당신께서는 이미 제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 당신께서는 이미 입니다.”

그런데 고리키가 기록했듯, 톨스토이와 하나님이 같은 영혼 안에서 거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그가 조물주를 극도로 의심했다는 데 있었다. 톨스토이는 어떻게 해서 스스로를 이런 식으로 느끼게 됐을까? 그의 고귀함에 기여한 가장 큰 단일 요인은 그의 출신 배경일 것이다. 그는 입센과 같은 해인 1828년에 태어났다. 그는 대대로 광활한 농촌 지대를 통치하는 계급의 일원이었는데, 그의 고향은 이후 30년 동안 농노제라는 노예제도를 유지했다.

젊은 시절, 부동산에 대한 책임감을 조금도 느끼지 못한 톨스토이는 노름빚을 갚기 위해 토지의 일부를 팔아 치웠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귀족 신분과 혈통, 그리고 그로 인해 얻은 상류 사회 사교 모임 출입 자격에 대해서는 헛된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겉만 번지르르한 속물근성으로 문학계 동료들을 질리게 만들었다.

톨스토이는 나이를 먹으면서 사회적 지위에 대한 저속한 태도를 포기했지만, 그 대신 토지에 대한 갈망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는 글을 써서 얻은 수입을 토지를 구입하는 데 썼고, 스스로의 힘으로 왕국을 건국한 사람이 갖는 포악한 욕망을 모조리 발휘하면서 영토를 꾸준히 넓혀갔다. 이런 타고난 지배욕에 남들로부터 지배받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성향이 덧붙여졌다. 톨스토이는 불굴의 의지의 소유자였는데, 그가 처한 상황은 그가 의지를 굳히는 것을 도왔다.

초년기에 대해 그가 집필한 『소년 시대』와 일기는 루소의 『고백록』이 그랬듯이, 겉으로 보기에는 솔직해 보이지만 드러낸 것보다 감춘 것이 더 많다는 점에서 독자들을 오도한다. 몇 가지 중요한 점에서, 톨스토이는 루소가 사후에 얻은 제자였다.

그는 루소를 자신과 막상막하인 인물로, 지고의 선을 깨닫고는 그것을 세상에 가르치려고 열망했던 또 다른 거대한 존재로 간주했다. 루소처럼 그는 본질적으로 독학을 했고, 독학을 한 사람들이 품는 자부심과 불안정함, 지적인 예민함을 모두 갖고 있었다. 루소처럼 그는 작가로 자리 잡기 전에 외교, 법률, 교육, 농업, 개혁, , 음악 등 많은 직업을 시도했다.

그는 그 특유의 오만한 부주의의 결과로 곰에게 심하게 할퀴어서 거의 죽을 뻔했다. 그는 군대에서도 포화 속에서 용맹을 떨쳤고, 그 결과 대위로 진급했다. 그렇지만 훈장을 받으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훈장으로 가는 길목은 어느 단계에서 막혀 버리곤 했다. 군인들은 훈장을 받으려는 동료의 열망을 쉽게 감지했고, 그런 열망을 품은 사람은 미움의 대상이 됐다.

그렇지만 그의 군 생활은 딱 한 가지 점에서는 진정으로 웅대했다. 그는 군에 있는 동안 경이적인 능력을 가진 작가로 스스로 변신했다. 돌이켜보면 톨스토이가 타고난 작가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가 훗날 기록한 것처럼, 그가 아주 어린 나이였을 때부터 어느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세밀하고 정확하게 자연과 인간을 관찰했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작가로 타고났다고 해서 반드시 타고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의 두 가지 빼어난 재능이 한꺼번에 피어난 시점은 입대를 하러 가던 그가 카프카스 산맥을 처음 본 때였다. 눈앞에 펼쳐진 초자연적인 장관은 그의 강렬한 시각적 욕구를 자극하면서 그 장관을 글로 적어야겠다는 그때까지는 잠복하고 있던 충동을 각성시켰다. 그뿐 아니라 그의 세 번째 빼어난 특징인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관념과 그 관념을 어떤 식으로든 자기 자신과 뒤섞고 싶어 하는 욕망을 일깨웠다.

그는 강렬한 표현이나 밋밋한 표현, 시적인 기법이나 암시 등은 사용하지 않았다. 에드워드 크랜쇼가 지적했듯, 톨스토이는 음영과 명암 대조법을 멸시하면서 철두철미하게 명쾌하고 확연한 묘사만을 활용한 화가와 비슷했다. 다른 비평가는 톨스토이를 라파엘 이전의 화가에 비교했다. 형체, 감촉, 톤과 색채, 음향, 냄새 등의 모든 감각이 수정처럼 투명하고 직접적으로 전달됐다.

톨스토이의 문장력이 자연을 숭배하는 그의 성향에서 직접 솟구친 것이고, 그가 그런 문장력과 자연에 대한 흥분을 간헐적일지라도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불행히도 그는 글쓰기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권력을 잡아야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감정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풍경을 선택한 결과로 우리가 그 풍경에 대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에, 그는 우리의 감정을 통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위대한 소설가의 손아귀에 붙들려 있었다. 그런데 그는 스스로를 위해서도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올림포스의 신들처럼 저 멀리에 초연하게 남아있다.

바이런은 자신의 계급에 걸맞게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소명을 받았다고 느꼈다. 톨스토이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는 이끄는 것 이상의 소명인 예언자의 소명, 때로는 구세주의 소명을 받았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톨스토이는 글을 쓰면서 보낼 시간에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그는 시인 페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소설을 쓰는 것은 멍청하고 부끄러운 일이오. 예술은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아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는 이 주장은 그의 생애에 틈틈이 등장했다.”.

이제 여기에 자기기만의 비참한 사례가 있다. 톨스토이는 살면서 스스로에 대해 상세히 털어놨던 그 어떤 사람보다 자신에 대해 숙고했고, 어떤 식으로든 그 자신을 중심으로 해서 많은 소설을 썼지만, 정작 스스로를 잘 알지 못했다. 작가로서의 톨스토이는 최상급이다. 그리고 글을 쓸 때의 그는 주변 사람들과 사회 일반에 덜 위험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는 작가가 되기를 소망하지는 않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의지만 대단했지 재능은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는 예언을 하고 종교를 창시하고 세계를 탈바꿈시키고 싶어 했는데,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이들 과업에는 자격 미달이었다. 그렇게 해서 위대한 소설들은 창작되지 않은 상태로 남았고, 톨스토이는 자신과 가족들을 혼란스러운 황무지로 이끌고 갔다. 아니, 질질 끌고 갔다.

그는 이후 10년 동안 간간이 노름에 손을 댔다. 수년 후 톨스토이의 아내는 그가 그토록 심하게 노름을 한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노름에서 손을 끊기는 했지만, 그가 당시에 돈을 빌렸던 사람들, 심지어 아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빚을 갚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일망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다. 케케묵은 빚을 갚는 것은 드라마틱한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는 일이었다.

톨스토이는 성욕과 성욕의 충족에 대해서도 강한 죄책감을 느꼈다. 여기서도 그의 자기비판은 이상할 정도로 선택적이고 스스로에게 관대하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젊었을 때 여자 앞에서 무척이나 숫기가 없던 그는 성욕을 풀기 위해 유곽에 의지했는데, 그의 메스꺼움의 대상이었던 유곽은 으레 생기는 결과를 그에게 안겨줬다.

그는 훗날 아이가 유산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던 것 같다. 톨스토이는 혼외정사로 얻은 자식들의 권리는 매정하게 부인했다. 톨스토이는 매춘부를 찾아 다니고 소작농 여성들을 유혹하는 것이 못된 짓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죄악에 대해 스스로를 책망했지만 여자들을 더욱 강하게 비난하곤 했다. 그가 보기에 모든 여자는 아담을 꼬여 선악과를 먹게 한 요부 이브와 같은 존재였다. 톨스토이는 몇 가지 점에서는 여성들의 섹슈얼리티가 드러나는 것을 불쾌해했다. 그에게 있어 여자는 그런 원죄의 근본 원인이었다.

톨스토이와 관련한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사실은 그가 이런 유치한 여성관, 여러 가지 점에서 동양적인 여성관을 죽기 직전까지 마음에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나 카레리나를 그려내려는 노력과는 대조적으로, 현실 세계의 여성의 마음을 진지하게 파고들어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여성이 중요하고 성숙하며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의 문제점은 그가 가정은 믿은 반면 결혼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소한 그는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성인들끼리 하는 기독교식 결혼은 믿지 않았다. 아마도 톨스토이보다 기독교식 결혼 제도에 부적절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가 성적인 괴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면서 받은 충격으로부터 결코 회복되지 못한 듯하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친구에게 건강한 남편이 병약한 아내를 얻는 것보다 더 나쁜 상황은 없네라고 썼다.

그는 자신의 모든 비밀과 해로운 사실들을 일기에 기록했는데 그것을 아내에게 읽게 했다. 서로 일기를 공유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공개정책의 일부였다. 그의 아내는 자신이 배가 불룩해서는 입덧을 하는 쓸모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내는 그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녀는 쓰디쓴 경험을 통해 톨스토이가 소설 집필을 중단하면 그녀가 유지하려고 기를 쓰는 가정생활에 상처를 줄 게 확실한 엄청나게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사태를 사뭇 다르게 보았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 그의 소설은 돈을 벌어다 준다. 그는 소설 집필을 돈을 벌 필요성과 관련된 일로 보게 됐고, 그 결과 두 활동 모두를 싫어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소설은 결혼과 연관돼 있었는데, 소냐가 소설을 쓰라고 늘 그를 몰아세우는 것은 그런 연관관계를 확인해줬다. 이제 그는 깨달았다. 결혼 생활과 소설 모두가 그가 예언 활동이라는 진정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을………………….. 그는 대중의 완성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자아완성을 위한 노력으로 이미 대체해 버렸는데, 그런 자신의 노력이 가족을 위한 최상의 생활 조건을 확보하려는 노력으로 대체되었음에 슬퍼했다.

따라서 결혼은 톨스토이에게 엄청난 불행의 출처일 뿐 아니라 도덕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그는 그 자신의 특별한 재앙으로부터 일반화시켜 얻은 결론을 통해 결혼 제도와 부부간의 사랑에 대해 비판했다.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듯, 톨스토이가 결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톨스토이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종교적 관념들은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 개념들이 그의 정치적 충동과 결합하면, 고도로 인화성이 높은 물질을 형성하면서 별다른 경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불꽃을 피워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 개혁과 사회 개혁,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고자 하는 욕망은 톨스토이의 마음속에서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그는 일찍이 1855년부터 바탕은 기독교인이지만 교조와 신비주의가 완전히 제거된, 미래의 천국이 아니라 지상 천국을 약속하는신앙 체계를 만들어내고 싶어 했다. 이것은 무수히 많은 영양가 없는 종교 개혁가들이 수세기 동안 떠들어댄 흔하고 뻔한 아이디어였다.

톨스토이의 행동을 몇 년 동안 지켜본 소냐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인류를 관념적으로 사랑하는 대신 개별적인 인간, 특히 가족을 진실로 사랑한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끊임없이 역할을 바꾸는 연기자였다. 아니면 인류에 봉사한다는 거창한 핵심 주제 위에서 역할을 다양화한 연기자였다. 남들을 가르치려는 그의 충동은 그 어떤 것보다 강했다. 그는 어떤 주제에 끌리는 순간, 그 주제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 하거나 그 주제에 대한 혁명적인 혁신과정에 참여하고 싶어 했는데, 해당 주제를 스스로 터득하거나 해당 주제의 전문가의 조언을 듣거나 하는 수고는 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톨스토이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었고, 중대한 사건들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개념도 없었다. 투르게네프가 한탄했듯이,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에 집어넣은 난처한 역사 강의는 톨스토이가 역사를 혼자서 공부했음을 증명하는 증명서나 다름없었다.그의 역사 강의는 터무니없는 순전한 협잡이었다.


톨스토이가 보기에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사려 깊은 결정이 역사적 사건을 일으킨다는 관념은 엄청난 환상이었다. 변화의 복판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변화를 일으키기는커녕,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도 모른다. 무의식적인 행위만이 중요하다. 역사는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도 모르는 익명의 사람들이 내린 수백만 개의 의사 결정의 산물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보나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정의가 다양한 시기에 걸쳐 여러 가지로 달라졌기 때문에,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었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톨스토이의 사례는 지식인이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추상적인 관념을 쫓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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