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영국 시인 ‘퍼시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1822)’ 비평

일반서적

by noruboy 2020. 5. 26. 21:47

본문

저자: 폴 존슨[1]
책 이름: 지식인의 두 얼굴[2]
출판사: 을유 문화사
역자: 윤철희[3]


내용 요약
1811
624, 영국 귀족 가문의 19세 되는 후계자가 서식스의 젊은 여교사에게 편지를 썼다. “저는 귀족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지배 계층도 아닙니다. 착한 일을 한 인간이 그 결과로 감히 자연과 이성과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될 날을 열렬하게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루소의 주장 그대로이지만, 이 글을 쓴 시인 퍼시 비시 셸리는 지식인과 문인이 인류를 인도하는 문제에 관한 주장에서 루소보다 몇 발짝 더 나아갔다. 셸리는 루소처럼 사회가 완전히 타락했으며 반드시 변혁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개화된 사람은 앞서의 원칙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지성을 통해 사회를 재건할 도덕적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는 지식인, 특히 그가 보기에 지식인 공동체의 지도자인 시인은 이 과정에서 특권적 지위를 점한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시인은 세상의 승인을 받지 않은 법률 제정자다.”셸리는 1821년에 쓴 1만 자 정도의 에세이 『시의 옹호』에서 동료 지식인들을 대신하여 이런 공격적인 주장을 제기했다. 『시의 옹호』는 사회적 목적으로 쓰인 문학 작품 중에서 유사 이래 가장 영향력이 큰 성명서가 됐다.

셸리는 시는 글재주의 산물이지만 단순한 오락물 이상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는 모든 종류의 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시는 예언이고 법이며 지식이다. 사회의 진보는 도덕적 감성이 사회를 인도했을 때만 성취 가능한 것이다. 도덕적 감성을 제공했어야만 하는 교회는 명백한 과업 달성이 실패했다.

과학은 그런 감성을 제공할 수 없다. 합리주의만으로는 도덕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과학과 합리주의가 윤리학의 가면을 썼을 때, 그들은 프랑스혁명의 공포나 나폴레옹 독재와 같은 윤리적 재앙을 낳는다. 오직 시만이 윤리의 진공 상태를 메울 수 있고, 사회의 진보에 진정한 창조적 에너지를 보탤 수 있다.

시는 천 가지의 이해하기 힘든 사고가 조합된 결과물들을 저장할 용기가 되게 함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각성시키고 확장시킨다.” “시는 세계의 감춰진 아름다움 위에 드리워진 베일을 걷어 올린다.” “도덕의 가장 큰 비밀은 사랑이다. 또는 우리 본연의 천성에서 벗어나는 것,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생각과 행동, 그리고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과 우리 자신을 일체화하는 것이다.” “시는 이기주의와 물질적 타산에 맞서 싸우며, 공동체 정신을 장려한다.”

시의 공로는 문명의 도덕적 진보를 추진해나가는 것이다. 사실상, 시와 인간의 손으로 구현한 상상력과 자연적 환경 아래에서의 자유는 모든 문명과 윤리를 떠받치는 삼각대를 형성한다.” “사회를 철저히 재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 넘치는 시가 필요하다.”

이처럼 셸리는 시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한 데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역사상 처음으로, 19세기 사회의 중요한 특징이 돼 버린 물질 만능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데 까지 나아갔다. 그래서 그는 돈이라는 가시적인 실체로 구체화되는 자아의 행동 규범과 시는 세계의 신이며 재물욕의 신이다.”라고 말했다.

셸리는 자신의 시에서는 그가 설교한 바를 확실히 실천했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는 다양한 수준에서 이해하고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셸리 본인이 의도했던 가장 심오한 수준에서, 그의 시는 본질적으로 도덕적이고 정치적이었다. 그는 영국 시인 중에서 가장 철저하게 정치에 젖어든 인물이다. 그의 중요한 시 모두와 상당한 편수의 단시는 대중에게 다양한 사회적 행위를 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셸리는 세상을 에워싼 학정의 고리를 언급하면서, 그의 진정한 유토피아에서 그와 함께하자며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런데 셸리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자기 작품이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는 사실에 평생토록 실망을 금치 못했고, 그래서 그는 결국 자신의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주장들을 사회에 침투시키는데 목숨을 걸었다.

요약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셸리는 몹시 이타적인 인물이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 만족을 위한 작품을 적게 쓴 시인도 드물다. 그렇다면 인간 셸리는 어땠을까?

그는 열두 살이던 1804년에 이튼에 진학했고, 이후 6년간 그곳에 다녔다. 그는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됐고, 평생토록 간직한 고대 문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이튼에서 습득했다. 심오한 책과 소설을 항상 열정적이고 빠르게 읽어 치운 그는 당대 시인 중에서는 콜리지 다음으로 독서량이 많았다.

1)
셸리의 이미지는 유별나게 순수하고, 순진하고, 천상의 영혼을 소유한 사람처럼 간주되었다. 그는 교활함이나 악함을 몰랐고, 정치인과는 거리가 멀면서도 풍부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진실은 다양한 자료로부터 드러났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는 셸리가 직접 쓴 편지들이었다.

2)
편지들은 셸리가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놀랄 만큼 성실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에게는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그는 외아들에 상당한 재산과 작위의 상속자인 데다가, 그보다 두 살에서 아홉 살까지 어린 여동생 넷을 둔 맏아들이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훨씬 타락하기 쉬운 신분을 점하고 있었다.

4)
그는 일루미나티를 비롯한 현실 세계의 다른 혁명적 비밀 조직의 활동에까지 미쳤다.

5) 10
대 시절부터 비밀 조직에 대한 애호와, 여러 음모 이론에 모두 물들었다. 그 때문에 그는 영국의 정치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리버풀이나 케슬레이 같은 정치인들의 행동 동기도 이해할 수 없었다.

6)
그래서 셸리의 지인들 상당수는 셸리의 정치관을 문학적인 농담이며, 고딕 로맨스를 현실 세계에 투영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봤다.

7)
그는 학교에 다닐 때부터 명성 또는 악명이 자자했다. 그래서 이튼의 무신론자로 알려졌다. 훗날 그가 자기 가족들을 냉혹하게 비난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시를 포함한 셸리의 어렸을 적 집필 활동을 억누르지 않았고, 오히려 독려하면서 출판 비용을 대줬다.

8)
셸리는 관념은 감각으로부터 비롯되고, “은 감각-인상으로 추론해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며, 믿음이 없는 것은 죄가 될 수 없다고 썼다. 그는 이토록 밋밋한 궤변에 『무신론의 필연성』이라는 선동적인 제목을 붙여 인쇄한 후, 옥스퍼드의 서점에 갖다 놓고는 사본을 모든 주교와 대학 학장에게 발송했다. 간단히 말해, 그는 일부러 도발을 감행해서는 그가 예상했던 반응을 대학 당국으로부터 정확히 얻어냈다. 그래서 그는 퇴학당했다.

9)
그는 그의 가족과의 관계를 무너뜨렸다. 그는 자신의 가족 전체를 먹고 마시고 잠자는 것 외에는 지구 상에서 다른 목표라고는 없는 것처럼 보이는 냉정하고 이기적이며 타산적인 짐승들이라고 비난했다.

10)
그는 여러 가족에게 각기 보낸 편지들에서 괴상한 모습을 보였다. 돈을 뜯어내고자 할 때는 교활하게 허풍을 떨고, 다른 때에는 잔혹하고 격렬하며 위협적이었다.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는 위선적인 애원에서 시작해서 참기 힘든 겸손이 뒤섞인 욕설로 넘어간다. 고백하건대 정신적으로 최고 수준이 아닌 사람들이 자신들의 오만 때문에 저지른 실수조차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1)
그는 시인 바이런처럼 근친상간에 매료됐다.

12)
그는 모든 종류의 변화와 변동, 위험과 짜릿함을 살아가는 보람으로 여겼다. 불안정과 근심은 그의 작품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13)
그는 빚쟁이들의 독촉에 쫓겨 하숙방이나 저택에서 도망 나오는 것으로 인생을 허비했다.

14)
그의 부인 해리엇은 예쁘고 단정하며 전통을 존중하는 중산층 여자로, 성공한 상인의 딸이었다. 그런데 셸리를 만나고 나서 인생의 불행을 향해 냉혹하게 치달았다.

15)
물론 부인인 해리서 역시 남편과 활동을 처음에는 같이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녀는 셸리가 만든 불법 정치 전단을 배포하는 것을 도왔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남편을 영원토록 사로잡을 만한 능력이 없었다. 다른 여자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셸리의 사랑은 깊고 진실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진짜 영원했다. 단지 사랑의 대상이 늘 바뀌었을 뿐이다.

16)
설교하기를 굉장히 좋아하는 으뜸가는 이기주의자 셸리는 다른 사람에게는 그의 결정에 맞춰 행동할 뿐 아니라 그의 결정에 박수갈채를 보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가정했다. 사람들이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는 재빨리 분노를 표출했다.

17)
셸리는 그의 부인 해리엇에게 당신이 내 마음을 열정으로 가득 채워 넣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내가 질책받을 일이 전혀 아니오라고 썼다.

18)
셸리는 자신의 부인 해리엇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부분적으로는 빚쟁이들과 적들에게 자신의 행방을 알리지 말라는 압력을 가하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그녀가 변호사와 상담하는 것을 막기 위해 편지를 쓰곤 했다.

19)
너무나 신랄한 독설과 호의를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뒤섞는 능력은 그의 많은 유치한 특징 중 하나였다. 예를 들어, 그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람을 피웠다고 어머니를 비판하면서도 갈바니 기계와 태양 현미경을 보내 달라는 요청을 덧붙였다.

20)
그는 그의 아내가 임신 중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건강이 어떠한지 묻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무뚝뚝하게 편지를 썼다.

21)
물론 그가 루소와 달리 친자식을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아이들을 맡기 위해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법적인 싸움은 아무래도 그에게 불리했고,결국 아이들은 그의 보호 대신 법원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후 그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잃었다.

22)
셸리의 히스테리성 거짓말은 그가 그에게 책임이 있는 또 다른 자살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었다는 사실로 부분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그는 시에서 자신 때문에 자살하게 되었던 어떤 여자의 무덤을 방문했다고 썼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상상일 뿐이었다. 그는 비석도 세워지지 않은 파니의 무덤을 한 번도 찾지 않았다.

23)
물론 셸리를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들은 젊었을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린애였지만, 기존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그들 나름의 대안적 체계를 제시했다는 점에서는 1960년대의 학생들처럼 어른이기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책임을 짊어지기에는 너무 젊다거나, 젊다는 이유로 자신들에게 관대히 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은 오히려 정 반대였다.

24)
그는 법원이 허가한 아이들을 방문할 수 있는 권리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이들에게 편지 한 통도 쓰지 않았다.

25)
셸리가 바랐던 것은 그의 삶에 안정과 안락을 안겨 주는 한편, 바람을 피워도 된다는 허가증을 발부해 줄 여성인 듯 보인다. 하지만 그의 여자들은 반대급부적인 자유 따위는 원하지 않았다.

26)
셸리는 이론적으로는 사유재산을 믿지 않았다. 그는 『개혁에 대한 철학적 관점』에서 사회주의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한편으로, 셸리 같은 특권층과 개화된 사람들이 사회의 대의를 발전시키기 위해 물려받은 재산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었다. 이것은 부유한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보편화된 대단히 친숙한 자기 정당화로, 셸리는 가족들로부터 가급적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 이런 주장을 채택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스승 고드윈에게 처음으로 보낸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에서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저는 서식스의 부잣집 자식입니다. 저는 1년에 6,000파운드의 수입을 올리는 부동산을 물려받을 상속인입니다.”

27)
셸리는 헌트와 고드윈이라는 희대의 사기꾼을 만나서 고생한다. 헌트는 셸리의 돈을 빌렸지만 갚지 않았다. 헌트는 빚진 돈을 갚는 것은 자신 같은 진보된 사상의 소유자에게 도덕적으로 필연적인 일이 아니며,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를 설득했다.

28)
그 결과 진리와 덕행의 인간인 셸리는 평생토록 도망자와 사기꾼 신세가 되었다. 그는 돈을 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빌렸고, 대부분 갚지 않았다. 그가 보통 급하게 이사를 가고 나면, 그가 살던 곳에는 그에게 화가 난 무리만 남았다.

29)
셸리는 그에게 부여된 놀라운 시적 재능을 활용해서 그의 인생을 정치적 진보에 헌신했지만, 자신의 상상력이 자격 미달이라는 사실은 결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돕고자 하는 인류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인지를 알아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예로 그가 『아일랜드 국민들을 향한 연설』을 썼을 때는 그 나라에 발도 디디기 전이었다. 아일랜드에 도착한 후에도 그는 아일랜드 국민들의 실태를 조사하거나, 국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알아내기 위해 체계적인 노력을 전개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가 실제로 비밀리에 계획한 것은 아일랜드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종교를 박살 내려는 계획이었다. 마찬가지로, 셸리는 영국 정치와 여론, 워털루 전투 이후 영국 정부가 직면했던 문제들의 심각성, 그것을 해결하려는 진지한 노력 등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무지했다.


그는 상상력을 필수적인 것이라고 떠들어 댔지만, 바로 그 상상력을 활용해서 캐슬레이나 로버트 필 경처럼 착하기만 하고 요령은 없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들을 파악하려 들거나 정당하게 평가하려는 노력은 조금도 기울이지 않았다.

셸리는 조직화된 종교의 파괴를 포함한 사회 체계의 총체적인 정치적 변혁을 원했지만,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에 대해선 혼란스러워했다. 이따금 그는 비폭력을 설교했다. 그를 최초의 진정한 비폭력 저항의 전도자이며, 간디의 선조로 보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가끔 비밀조직을 결성하려고 노력했으며, 그의 시 중 일부는 직접적인 행동을 선동하는 맥락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



 


[1] 영국의 석학이자 역사학의 거장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비판적 저널리스트. 1928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나 스토니허스트 컬리지와 옥스퍼드대학교 모들린칼리지를 졸업. 저술가로서 역사, 인문, 예술, 문화를 넘나들며 50여권의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뉴욕 타임스』올해의 선정된 『모던 타임스』 같은 박심함과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는 저술로 독자를 매료시켰다. 주요 저서로 『미국인의 탄생』, 『유대인의 역사』 등이 있다.

[2] 책은 지식인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측면을 낱낱이 파헤친 책으로 그들의 위대한 업적과 함께 윤리성과 도덕성을 전면 재검토하며, 그들의 사상이인류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칭송 받아 마땅하다 일각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한다.

[3]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영화 전문지에 기사 번역과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위대한 영화 1~4, 『메이플소프』, 『이안: 경계를 넘는 스토리텔러』, 『타란티노: 시네마 아트북』, 『한나 아렌트의 말』, 『캐스린 비글로』, 『스탠리 큐브릭』, 『히치콕』, 『제임스 딘』,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저 에버트』, 『에퀴아노의 흥미로운 이야기』 등이 있다.

[4] 퍼시 비시 셸리는 영국의 시인이다. 바이런, 키츠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의 3 시인으로 꼽힌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