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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경제학자 칼 마르크스(Karl Marx) 비평

일반서적

by noruboy 2020. 5. 28.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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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폴 존슨[1]
책 이름: 지식인의 두 얼굴[2]
출판사: 을유 문화사
역자: 윤철희[3]

 

자본론을 저술한 칼마르크스

 내용 요약

카를 마르크스(1818~1883)는 근대의 그 어떤 지식인보다도 실제 사건이나 인류의 정신과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그가 활용한 개념이나 방법론이 매력적이라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개념이나 방법론이 치밀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주기는 했지만, 그가 영향력 있는 지식인이 된 것은 그의 철학이 세계의 두 강대국인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그들의 많은 위성 국가에서 제도화된 덕분이었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닮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은 5세기부터 13세기까지 교회 지도자들 사이에서 가장 폭넓게 읽힌 책이었고, 그 결과로 중세 기독교의 형성에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영향력은 더욱 직접적이었다.

마르크스는 그가 살았던 19세기 중반의 시대상이 낳은 산물이었고,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적인 사상임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19세기 철학이었다. “과학적”이라는 용어는 어떤 사상을 승인한다는 사실을 가장 강력하게 표현한 단어로, 마르크스는 자신의 많은 적들과 자신을 구분할 때 이 단어를 습관적으로 사용했다. 그와 그의 저작은 “과학적”이었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다윈의 진화론과 유사한 인간 행위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역사 속에서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 주의는 과학인 데 반해 다른 철학들은 과학인 적이 없고 과학이 될 수도 없다는 관념은 그의 추종자들이 세운 국가들의 공식적 학설로 주입됐고, 그 결과 학교와 대학에서 다루는 모든 과목의 가르침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현상은 권력에 매료된 비공산권의 지식인들, 특히 강단의 지식인들에게도 퍼졌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연 과학의 막대한 학술적 권위와 동일시되어 경제학, 사회학, 지리학 같은 엄밀하지 못한 학문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학자들이 자신들의 분야에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을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르크스에 대해서 물어봐야 할 첫 질문은 “도대체 그는 어떤 의미의 과학자였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심한 증거 수집과 평가를 통해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 그는 어느 정도나 관여했는가?

본질적으로 그의 저작은 자신의 학문 분야에서 연구하는 다른 학자들에 대한 논평이며 비판이다. 훌륭한 인문학도가 된 마르크스는 나중에 철학, 그것도 당시 압도적으로 유행하던 헤겔 철학을 전공했다. 그는 베를린 대학보다 수준이 낮은 예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학교에서 강사 자리를 얻을 정도로 뛰어나진 않았던 것 같다.

1842년 『라인 신문』의 기자가 된 마르크스는 신문이 폐간된 1843년까지 5개월 동안 기사를 썼다.
이후 그는 파리에서 추방당한 1845년까지 『독일-프랑스 연보』와 다른 저널에 글을 썼고, 추방당한 후에는 브뤼셀에서 글을 썼다. 이후 그는 1883년 3월 14일에 사망할 때까지 런던에서 보낸 시간 – 즉, 34년 –의 대부분을 대영박물관에서 자본에 대한 광대한 연구에 쓸 자료들을 찾고, 그 자료들을 출판에 적합한 형태로 추려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썼다. 저작 1권의 출판은 그가 직접 목격했지만, 2권과 3권은 그가 사망한 후 그가 남긴 노트를 편집한 동료 엥겔스에 의해 출판됐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학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언젠가 이렇게 투덜댔다. “나는 책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야 할 팔자를 타고난 기계야” 그러나 깊은 의미에서 보면 그는 학자가 아니었고 과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진리를 찾아내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진리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시인과 저널리스트, 도덕주의자의 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요소는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의 엄청난 의지와 결합된 세 요소는 그를 막강한 위력의 작가이자 예언가로 만들어줬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과학적인 요소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사실, 그 모든 요소에 있어 그는 비과학적이었다.

1) 간단히 말해, 마르크스는 시종일관 종말론에 매진한 작가다. 요점은 종말에 대한 마르크스의 개념은 시적이든 경제학적이든, 예술적이지 과학적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비전은 마르크스의 마음속에 늘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경제학자로서 객관적으로 검증된 자료로부터 증거를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러한 예술적 비전으로부터 그것을 불가피하게 만들어 줄 증거들을 찾으려 했다.

2) 그는 추론이나 계산이 아니라 직관에 강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끝까지 시인으로 남은 셈이다.

3) 마르크스는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는데, 어떤 면에서는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 마르크스는 자신이 중요한 저서를 집필하는 것은 고사하고 기획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본론』 조차도 일련의 에세이를 한데 이어 붙인,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저서였다.

4) 그렇지만 그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담은 짤막하고 날카로운 글은 꽤 잘 썼다.사실 그의 뛰어난 재능 중에서는 논쟁적인 저널리스트로서의 재능이 으뜸이었다. 그는 경구와 격언을 멋들어지게 활용했다. 그런데 그중 상당수는 그가 고안해 낸 것이 아니었다.

6) 그는 남들이 한 말을 끄집어내 논쟁 중의 가장 적절한 단계에서 아주 효과적으로 조합해서 사용하는 보기 드문 재주가 있었다. 특히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세 문장을 능가하는 글은 그 어떤 정치적 작가도 써내지 못했다. “노동자는 쇠사슬밖에 잃을 것이 없다. 그들에게는 획득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7) 시는 비전을 제공했고, 저널리스트 특유의 격언은 마르크스의 저작을 돋보이게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마르크스의 저작의 밑바닥에 깔린 것은 학술적 전문용어들이었다. 그는 학자였다. 하지만 나쁘게 말해 실패한 학자였다. 그런데 그것은 그가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세운 작전이었다. 그 결과, 헤겔에 대한 마르크스의 태도는 철저히 양면적이다.

8) 마르크스는 헤겔의 방법이 안고 있는 치명적 약점을 찾아내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발견을 통해 헤겔 사상 체계 전체를 새로운 철학으로 대체할 수 있다면서 학문적 명성을 구하려 들었다. 그의 새로운 철학은 기존의 모든 철학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최고급의 철학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헤겔의 변증법을 “인간의 지성을 향한 열쇠”라면서 계속 받아들였다.
그는 헤겔을 활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헤겔의 포로로 남아 있었다. 변증법과 “모순”이 그가 10대 시절에 품었던 시적 비전인 세계적인 위기의 절정을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9) 그는 경기 순환은 “자본주의 사회에 고유한 모순”을 보여주며, “이들 순환 주기의 정점은 세계적인 위기”를 낳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신흥 독일제국의 졸부들”의 머릿속에도 “변증법을 심어 넣을” 것이다.

10) 이러한 것이 현실 세계의 정치-경제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마르크스 철학의 뿌리가 시적 비전에 있었던 것처럼, 그 구체적 전개는 난해한 학술적 용어를 갈고닦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지성이라는 기계를 작동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도덕적 추진력이었다.

11) 마르크스는 고리대금업자들에 대한 증오심에서 추진력을 찾았는데, 그 증오심은 마르크스 자신이 겪은 금전적 어려움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격정적인 감정이었다.

12) 헤겔의 추종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반유대주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다. 1843년 헤겔 좌파의 반유대주의 지도자 브루노 바우어는 유대인에게 유대교를 완전히 폐기할 것은 요구하는 에세이를 출판했다. 마르크스의 에세이는 그에 대한 응답이었다.

13) 물론 그는 바우어의 반유대주의는 반대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바우어와 생각을 같이하고, 바우어의 주장을 뒷받침했으며, 찬성한다는 의미로 인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바우어의 해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14) 바우어는 유대인들의 반사회적인 본성이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바우어는 그들을 유대교 신앙에서 갈라놓으면 그런 본성이 치유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보기에 유대인의 죄악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것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세속적인데 그들이 상업을 숭배한다고 보았다. 그들이 믿는 세속적인 신은 돈이라고 보았다.

15) 그는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타락시켰으며 “이웃보다 더욱 부자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운명이 없다”는 것, 그리고 “세계는 주식 중개인 조합”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정치권력은 금권 권력의 보증인이 됐다. 따라서 해결책은 경제적인 것이었다. “탐욕스러운 유대인”은 “현시대에 보편적으로 퍼진 반사회적 요소”가 됐고, “유대인을 무능하게 만들려면” 유대인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낸 금전적 활동의 바로 그 가능성인 전제 조건을 폐지할 필요가 있었다.

16) 돈에 대한 유대인의 태도를 없애면 유대인과 유대교, 그들이 세계에 강요했던 기독교의 타락은 사라질 것이다. “상업과 돈에서 스스로 해방되고, 그에 따라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유대교에서 스스로 해방되면, 우리의 시대도 스스로 해방될 것이다.”

17) 그러므로 세계에서 무엇 인가에 대한 마르크스의 설명은 학생들이 모인 카페에서 논의되는 반유대주의와 루소의 조합물이다.

18) 이후 그는 1844년부터 1846년까지 3년 동안 자신의 이론을 성숙한 철학으로 확장시켰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사회의 사악한 요소, 그가 반감을 가졌던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는 금권의 대리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부르주아지 계급 전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확장을 위해서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세련되게 활용했다.

19) 학술적으로는 최악이라 할 독일 철학의 전문용어들을 모조리 활용한 마르크스는 엄격한 헤겔적 관점에서 주장을 펼치지만, 기저에 깔린 추진력은 분명히 도덕적인 것이며 궁극적인 비전은 여전히 시적이다.

20) 이렇게 사회를 해체시키는 것은 특정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다. 그는 계급과 계급들의 용해제인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구원 세력이 되어 역사적 법칙에 구속받지 않으면서 종국에는 역사를 끝맺는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 아주 기이할 정도로 유대적인 개념인 프롤레타리아는 메시아나 구원자가 된다.

21) 그런데 그가 시적 비전으로 처음 목격했던 격변을 정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그 정의는 독일의 학술 용어들로 행해졌다. 대학 강의실을 넘어선 현실 세계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정의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22) 마르크스는 사건을 정치적으로 다룰 때조차도 여전히 철학적 전문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진정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이 친필 편지에서 그랬던 것만큼이나 자주 단어들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의 강조 행위는 그가 뜻하는 바를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그가 뜻하는 바는 독일 강단 철학의 모호하기 그지없는 개념들 속에 침몰해 버린 상태로 남아있다.

23) 도덕적 철학자의 예언적 발언과 폭로를 과학으로 탈바꿈시킬, 현실 세계에서 얻은 사실과 증거, 그것이 그에겐 없었다.

24) 세상 어느 것도 그를 도서관과 공부에서 끌어낼 수 없었다. 빈곤과 착취에 대한 그의 관심은 1842년 가을로 거슬러 올라간다.

25) 스물네 살인 그는 지방 소작농들의 벌목 권한을 다룬 법률에 대한 일련의 논문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소작농과 지주와 실제로 얘기를 나눴다는 증거, 그리고 해당 지역의 실태를 관찰했다는 증거는 없다.

26) 마르크스는 평생 동안 재정과 산업에 대해 글을 썼지만, 그가 아는 사람 중에 이와 관련된 일을 한 사람은 오직 두 사람뿐이었다.

27) 그는 동료 노동자들을 적개심으로 바라보곤 했다. 1845년에 런던을 잠깐 방문했을 때 그런 사람들을 처음 만난 그는 독일인 노동자 교육 모임에 참석했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 대부분은 숙련 노동자, 시계 제조공, 인쇄기술자, 제화공이었고, 모임의 지도자는 임업 노동자였다. 독학을 한 그들은 자제심과 위엄이 있었고, 예의가 발랐으며, 자유분방한 삶을 반대했고, 사회 변혁에 있어 온건한 모델을 유지했다. 그래서 그들은 마르크스의 묵시론적 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마르크스의 학술적 전문 용어들을 사용할 줄 몰랐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그들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28) 라살의 경우는 마르크스의 가장 잔혹한 반유대주의와 인종적 멸시의 희생자가 되었다.

29) 마르크스는 산업현장의 노동 환경을 직접 조사하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런 경험을 가진 노동자 지식인으로부터 그에 대해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본질적으로 그는 헤겔 변증법을 활용하여 1840년대 후반에 이미 그가 내린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30) 원래 마르크스는 1857년에 각각 자본, 토지, 임금과 노동, 국가, 교역과 세계 시장 및 위기를 다룬 여섯 권의 책을 구상했다. 그런데 그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으로 판명된 그런 계획을 수행하려면 규칙적인 자기 절제가 필요했다. 그가 실제로 완성한 유일한 책에는 사실상 논리적인 형식이 없다. 『자본론』은 임의의 순서대로 배열된 일련의 개별적 설명들이다.

31) 마르크스가 책을 완성하지 못한 것은, 에너지의 부족과 체계적인 지식의 결여 때문이었다.

32) 자본론 8장은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주의의 도덕적 주장의 핵심이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노동자에 대한 점증하는 착취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더 많은 자본이 사용될수록, 노동자들은 더 많이 착취당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종적인 위기를 낳을 커다란 도덕적 죄악이다.

33) 자신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서 마르크스는 1) 전자본주의 작업장의 환경도 열악했지만 산업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환경이 더욱 열약해졌다. 2) 자본의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본질을 가정한다면, 노동자에 대한 착취는 최고도로 자본화된 산업에서 점점 강도가 세어진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1을 입증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34) 요약하자면, 1860년대 중반의 자본주의 노동환경에 대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검증의 첫 부분은 20년 전에 출판된 엥겔스의 『영국 노동 계급의 상태』, 단 한 권에만 기초하고 있다.

35) 엥겔스가 1차적 자료로 채택한 출판물들은 5년, 10년, 20년, 25년, 심지어는 40년이나 된 것들이었다. 그런데 엥겔스는 그 자료들을 당대의 자료인양 제시한다. 그는 에든버러의 공중위생 시설에 대한 논문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에게 그 논문이 1818년에 쓰인 것임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는 시대에 뒤떨어진 자신의 증거들을 뒤집을 만한 새로운 사실과 사건을 언급하지 않는다.

36) 마르크스도 엥겔스의 책이 출판된 이후 공장법과 다른 개혁적 법률의 시행으로 인해 많은 개선이 이뤄졌고, 개선으로 인해 그가 강조하고자 했던 작업 환경의 유형이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밝히지 않고 건너뛴다. 그는 엥겔스의 그릇된 설명을 더욱 악화시켰다.

37) 그는 작업 환경이 특히 열악한 산업들을 자본주의의 전형적 산업으로 선택했다. 그의 논점은 자본주의의 작업 환경이 계속 나빠지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장황하게 인용한 증거들은 전적으로 요업, 여성복 제조업, 대장간, 제빵업, 성냥 제조업, 벽지 제조업처럼 대부분 전 자본주의적 단계에 있는 소규모의 비능률적이고 자본화가 덜된 구식 공장들로부터 얻은 것이었다. 그는 근대화되고 고도로 자본화된 산업을 다룰 때면 증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38) 마르크스는 폭력에 대한 애호, 권력욕, 금전 문제에 대한 무능함, 그리고 다른 그 어떤 성격보다도 강한, 주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경향이 있었다.

39) 마르크스는 교제한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투었다.


 


[1] 영국의 석학이자 역사학의 거장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비판적 저널리스트. 1928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나 스토니허스트 컬리지와 옥스퍼드대학교 모들린칼리지를 졸업. 저술가로서 역사, 인문, 예술, 문화를 넘나들며50여 권의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에 선정된 『모던 타임스』 같은 박심함과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는 저술로 독자를 매료시켰다. 주요 저서로 『미국인의 탄생』, 『유대인의 역사』 등이 있다.

[2] 이 책은 지식인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측면을 낱낱이 파헤친 책으로 그들의 위대한 업적과 함께 윤리성과 도덕성을 전면 재검토하며, 그들의 사상이 ‘인류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칭송받아 마땅하다’는 일각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한다.

[3]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영화 전문지에 기사 번역과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위대한 영화 1~4』, 『메이플소프』, 『이안: 경계를 넘는 스토리텔러』, 『타란티노: 시네마 아트북』, 『한나 아렌트의 말』, 『캐스린 비글로』, 『스탠리 큐브릭』, 『히치콕』, 『제임스 딘』,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저 에버트』, 『에퀴아노의 흥미로운 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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