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노인과 바다』의 저자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삶 비판적 고찰

일반서적

by noruboy 2020. 7. 28. 20:18

본문

저자: 폴 존슨
서명: 지식인의 두 얼굴

위선과 허위의 바다

 


내용 요약
미국은 인구와 국력이 19세기 내내 커지면서 19세기 말에는 이미 세계에서 제일 크고 부유한 산업국가가 돼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고찰하고 있는 종류의 지식인을 미국 사회가 배출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훨씬 후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독립한 미국은 자연적인 정당성을 확보한 소유권만 겪어 봤지, 사회 규범에 따라 승계되는 소유권에 기반을 둔 특권체제인 구체제를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기존 질서가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유형의 세속적 지식인들은 이성과 윤리에 바탕을 둔 천년 왕국 모델로 기존 체제를 대체하려는 계획을 짤 수 없었다. 상황은 오히려 정반대였다. 미합중국 자체가 낡은 체제 등에 맞선 혁명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통치 계급과 지식층 사이의 괴리는 없었다. 두 계급은 동일한 하나의 계급이었다. 토크빌이 적었듯, 미국에는 제도화된 성직자 계급이 없었다. 그 결과, 유럽의 많은 지식인을 격분시킨, 성직자 계급이 행사하는 부당한 권력에 대한 반감 같은 것도 없었다. 종교는 미국에서도 널리 퍼져있었지만, 종교기관에 대한 통제권은 평신도가 행사했다. 미국의 종교는 교리가 아닌 신도의 행위에 관심을 가졌다.

자발적이고 다양한 분파를 허용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종교는 자유를 제한하기보다는 자유를 주창했다. 결국, 미국은 풍요와 기회의 땅이었다. 값싼 땅이 널리 퍼져있는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도 가난할 필요가 없었다. 유럽의 영리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이 급진적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자극했던 노골적인 불평등이 미국에는 하나도 없었다. 저승에서라도 앙갚음하고야 말겠다고 울부짖는 원죄 따위도 없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획득하고 소비하고 개척하고 통합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그들 사회의 근본 전제에 대한 의문을 품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워싱턴 어빙과 같은 초창기 미국 지식인들은 그들이 많은 시간을 보냈던 유럽에서 자신들의 논조와 태도, 스타일과 내용물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문화식민주의의 살아 있는 유물이었다. 미국에서 독립적인 토착 지식인이 출현한 것 자체가 어빙과 그의 일파의 유럽을 향한 굴종에 대한 반응이었다. 최초이자 가장 상징적인 대표적 지식인 - 19세기 미국 지식인의 원형 은 랠프 월도 에머슨(1803~1882)이다. 에머슨은 자신의 목표는 미국인의 육체와 두뇌에서 유럽의 촌층을 뽑아내는 것이고, “미국을 향한 열정으로 유럽을 향한 열정을 내쫓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미국적 정신에 대한 그의 주장은 미국 사회의 근간을 이룬 전제인 유럽적인 정신과 점점 가깝게 변해 갔다. 그리고 그의 시각은 유럽 인텔리겐치아의 시각과 정반대가 됐다. 그는 유럽을 여행하며 칸트를 발견하고 돌아와서는 매사추세츠 콩코드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 최초의 자생적 철학 운동을 발전시켰다. 초월론으로 알려진 그 철학은 1836년에 출판된 에머슨의 첫 저서 『자연론』에 요약돼 있다. 초월론은 신플라톤주의로, 다소 비합리주의적이고 약간은 신비주의적인 데다가 낭만주의적 분위기를 풍겼으며, 그 무엇보다도 모호한 철학이었다.

그는 무슨 뜻인지 모를 문장을 뱉었다. 뜻을 안다고 하더라도 틀에 박힌 뻔한 소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많은 미국인들은 헤겔 철학과 초기의 칼라일을 숭배하던 시대에 그들의 젊은 나라가 그들만의 지식인을 배출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했다. 애머슨의 매력은 사람들이 그를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런 인물은 독려받아 마땅하다는 사람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훗날의 평가다.

『자연론』 출판 1년 후, 그는 하버드에서 미국인 학자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다. 올리버 웬델 홈스는 이를 우리의 지적인 독립 선언서라고 불렀다. 막 피어나기 시작하던 미국의 언론은 에머슨의 주장을 다루었다. 당시 미국에서 제일 영향력이 있는 신문으로, 마르크스가 유럽에서 보낸 기사를 싣던 호레이스 그릴리의 『뉴욕 트리뷴』은 에머슨의 초월론을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미국의 공공 재산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정주의적인 태도를 다뤘다.

에므슨은 검토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미국의 지식인들이 국민적 합의와 결별하면서 겪은 어려움들을 그의 경력이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여러 면에서 에머슨은 고향인 뉴잉글랜드가 낳은 산물로 남아 있다. 섹스에 대한 고지식하고 금욕적이며 생기 없는 접근 방식에서는 특히 그렇다. 에머슨의 이념은 그들을 사람들을 번화가와 술집을 멀리하도록 하고 상업적 성공과 도덕적 행복을 장려하자는 것이었다.

에머슨의 관점은 이 개념과 교묘하게 맞아떨어졌다.그는 문화적-지적 엘리트라는 개념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 문화가 진정으로 미국적이면서 보편적이고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립은 필수적이었다. 그는 농가에서 호메로스를 읽은 최초의 미국인이 미국을 위해 위대한 봉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서부 저편의 기차에서 양서를 읽고 있는 미국인을 발견한다면 그 사람을 껴안고 싶다고도 말했다. 그의 개인적인 경제-정치 철학은 명백한 숙명을 실현하기 위해 미 대륙을 가로지르라고 미국인들의 등을 떠밀었던 대중적인 철학과 일치했다.

마르크스와 거의 같은 시기에 그와는 정반대인 사상이 발전하고 보급되었다는 사실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의 강연은 기업가 정신을 강화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에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는 도덕적 품성에 더해진 지식은 사업상의 성공을 촉진시킨다고 주장했다. 저명한 철학가로부터 놀랄 만한 지혜를 얻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찾아온 많은 사람들은 그가 상식에 지나지 않는 것을 설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러시아에서 톨스토이가 그랬듯이 그는 국민적 영웅이었다. 그는 미국인의 귀감으로 우뚝 섰다.

우리는 한 나라의 경제적 발전과 문화적-지적인 삶이 폭넓은 조화를 이룬 이런 배경 속에 어니스트 헤밍위에(1899-1961)를 세워 놓아야만 한다. 헤밍웨이는 얼핏 보면 그리 지식인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비범할 정도로, 특히 미국적인 형태로 결합해서 소유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헤밍웨이는 심오할 정도로 독창적인 작가였다. 그는 그의 동포인 미국인들, 그리고 영어권 세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법을 바꿔 놓았다. 그는 새롭고 개인적이며 세속적이고 극도로 현대화된 윤리적 스타일을 창안했다.

뿌리에서부터 굉장히 미국적인 이 스타일은 다양한 문화권으로 쉽게 전파됐다. 그는 다양한 미국적 생활 태도를 한데 뒤섞었고, 스스로 그런 통합적 태도의 원형적 화신이 됐다. 그렇게 해서 헤밍웨이는 볼테르가 1750년대의 프랑스를 구현하고, 바이런이 1820년대의 영국을 구현한 것처럼 미국의 특정 시대를 구현한 인물이 됐다.


1)
헤밍웨이는 부모의 종교, 그리고 부모들이 바라 마지않는 아들 상이 되는 것을 완전히 거부했다.


2)
낭만적이고 문학적이며 어느 정도는 윤리적인 이 개념에는 종교적인 내용은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

3) 그는 모든 일에 자신의 천재성과 성향을 추구해 나갈 것이며, 그에 대한 보답으로 명예와 행복한 삶을 누리는 인간이 되겠다는 비전을 10대 때 스스로 만들어냈다.

4) 헤밍웨이는 종교적인 습관들을 가능한 한 일찍이 버렸다.

5)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뿐 아니라 체계화된 종교를 인류의 행복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6) 성인이 된 후의 헤밍웨이는 평생토록 스스로 창안해 낸 사상들만 숭배하는 무종교인이었다.

7) 종교를 거부한 헤밍웨이의 행위는 젊은 지식인의 특징이었다. 종교 거부가 부모의 도덕적 문화를 거부하는 행위의 일환이었다는 것은 더욱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8) 그렇지만 헤밍웨이의 반항은 어머니 그레이스에게만 집중됐다. 내가 보기에는, 헤밍웨이가 어머니를 자신의 독선적인 의지와 문학적 재능의 주요한 원천으로 간주했기 때문인 듯하다. 아들이 만만찮은 남자가 돼 감에 따라 어머니도 만만찮은 여자가 됐다. 모자가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9)
헤밍웨이의 소설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독선과 뒤섞인 강한 도덕적 분노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보여 준다.
10)
그의 분노는 오랫동안 서서히 달아올랐고, 이후로 그는 어머니를 적으로 간주했다. 때로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맥락에서도 어머니를 향한 증오가 튀어나왔다.
11)
그런데 이로 인해 그는 죄책감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를 끈질기게 괴롭힌 죄책감은 그의 증오를 늘 신선한 상태로 존재하게 만들었다.
12)
그의 두드러진 특징이 된 문학적 완벽주의를 향해 헤밍웨이를 내몬 것은 지나치게 세련된 문학적 유산 덕에 생기 없는 문체를 사용하는 어머니처럼 글을 쓰지는 않겠다는 압도적인 충동이었다.

13)
그는 지독하게 책을 읽어댔다. 그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버릇 중 하나는 늘 책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휴식 시간이면 언제 어디서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평생 책을 사 모았다. 그 때문에 헤밍웨이가 사는 곳은 어디건 벽들을 따라 서고가 늘어서 있었다. 그는 쿠바의 저택에 그가 관심을 가졌던 모든 분야에 대한 전문적 연구서와 광범위한 문학 텍스트를 특징으로 하는 장서 7,400권을 소장한 도서관을 지었는데, 그는 이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14)
영문학의 고전을 거의 다 읽은 상태로 파리에 도착한 그는 독서의 폭을 넓히기로 결심했다. 그는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대학을 다니지 못해 생겼을지도 모르는 틈새를 메우려 열심히 노력했다.

15)
광범위한 그의 독서는 글을 써야겠다는 충동을 한층 부추겼다.

16)
그는 열다섯 살 때부터 키플링을 숭배했는데, 키플링에 대한 연구는 평생 이어졌다. 진정으로 훌륭한 작가들 모두가 그렇듯, 헤밍웨이는 메리엇, 휴 월폴, 조지 무어 같은 2류 작가들을 탐독하고 분석하면서 배울 것은 배웠다.

17)
헤밍웨이는 문학적 명성과 권력을 향한 욕망이 강했다. 파운드라는 사람은 포드에게 헤밍웨이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의 시는 굉장히 뛰어납니다. 그리고 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산문 스타일리스트입니다.” 1922년에 쓰인 이 평가는 대단한 통찰력을 보여 준다. 이때까지만 해도 헤밍웨이는 성숙한 문체를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8)
끝없이 남아 있는 초창기의 노트가 입증하듯이, 열심히 문체를 갈고닦았다.하고자 하는 작업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개성적인 집필 습성을 형성하기 위해 그토록 힘들고 오랜 투쟁을 거친 소설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19)
이 기간 동안 헤밍웨이가 했던 공부는 작가가 어떻게 전문적 수완을 터득하는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모델이다. 고상한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점에서 헤밍웨이의 공부는 극작가가 되려는 입센의 고된 노력과 비교할 만하다. 또한 헤밍웨이는 집필 기법에 혁명적인 충격을 가했다.

20)
그는 자신이 부모의 종교와 윤리적 문화로 대표되는 그릇된 세상을 물려받았으며, 그 세상을 진실한 세상으로 대체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가 말한 진실은 무엇일까? 그가 노골적으로 물려받은 부모의 기독교적인 진실은 분명 아니었다.

21)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의 정신을 반영한 진실도 아니었다. 그가 말한 진실은 그 스스로 보고 느끼고 듣고 맡고 맛본 것이었다. 그는 콘래드의 문학과 철학의 방법 – “나 자신이 느낀 진실에 철저히 충실할 것을 자신의 목표를 집약한 것이라며 동경했다.

22) 그런데 헤밍웨이는 캔자스시티 스타에서 빼어난 훈련을 받는 혜택을 누렸다. 이 신문의 편집자들은 기자들이 명료하고 간결하고 직접적이며 클리셰가 없는 영어를 사용하도록 110가지 규칙을 담은 독자적 스타일의 책을 편집해 놓고는, 그 규칙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훗날 헤밍웨이는 그 규칙들을 내가 글쓰기 분야에서 터득한 최고의 규칙이라 칭했다.

23)
그는 진정으로 독창적이었던 위대한 작가들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는 자신만의 시장을 스스로 창출해서, 독자들에게 그의 취향을 전염시켰다.

24)
헤밍웨이의 수법은 패러디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성공적으로 모방하기는 어렵다. 작품의 주제, 특히 작품의 도덕적 태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25) 헤밍위이가
그토록 원형적인 지식인이 된 것은 그가 품고 있는 윤리관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윤리관의 본질은 미국인의 정신을 반영했다. 헤밍웨이는 미국인을 원기 넘치고 활동적이며 힘찬, 때로는 폭력적인 사람들로 봤다. 행동은 그가 천착한 주제였다.

26)
그의 윤리관은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기가 불가능했고, 그런 개념 위에서 체계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면 그의 윤리관은 훼손되고 위축됐을 것이다. 그렇지만 헤밍웨이는 예증은 끝없이 들 수 있었고, 그 예증이 그의 작품 전체의 배후에 있던 추진력이었다.

27)
무척 예민한 감수성과 폭력에 몰두하는 성향이 매우 기묘하게 결합된 그와 같은 사람은 일찍이 지구 상에 없었다. 그는 특히 아버지가 했던 야외오락 모두와 스키, 심해 고기잡이, 맹수 사냥, 그리고 전쟁과 같은 부가적인 활동들을 즐겼다. 겁이라는 감정을 헤밍웨이보다 더 생생하게 묘사한 작가는 없었다. 그는 독자들에게 그의 소설처럼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을 느끼게 해주었다.

28) 그가 집착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실제 나이보다 몇 년 더 늙어 보이는 것이었다.

29)
그는 자신의 행동 경험을 계좌에 꾸준히 예금하고는 소설을 위해 꺼내 쓰곤 했다. 1917-1918년의 이탈리아 전쟁은 그가 예금한 최초의 거금이었다. 1920년대에 예금의 대부분을 소진한 그는 스포츠와 투우에 광분한 경험을 통해 고갈돼 가는 계좌의 잔고를 맞췄다.

30) 1930
년대에는 맹수 사냥으로 쏠쏠한 예금을 했고, 스페인 내전으로 거액을 횡재했다.

31)
그는 거짓말하는 것은 작가가 되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라고 생각했고, 때로는 그런 생각을 자랑스레 떠벌렸다.

32)
그가 했던 말들은 루소의 고백록처럼 전혀 믿을 만하지 못하며, 솔직한 말처럼 보일 때 가장 위험한 것이 되었다. 가장 복잡하고 반복된 헤밍웨이의 거짓말 중 상당수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33)
그는 반공 노선을 취한 사람은 누가 됐건 바보 아니면 악당이라고 말했다.

34)
헤밍웨이는 문학적인 삶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다른 사람의 재능과 성공에 대해 유별나게 질투심이 많았다. 1937년 무렵의 헤밍웨이는 알고 지내던 모든 작가들과 싸움을 벌인 상태였다.

35)
헤밍웨이는 196172, 우울증과 편집증을 치료하려는 노력에 여러 차례 실패한 후, 그는 아끼던 영국제 이중총신 엽총에 산탄 2발을 넣고는 두개골 전체를 날려 버렸다.

결론
헤밍웨이는 왜 죽음을 갈망한 것일까? 그것은 작가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로 삶의 법칙들을 개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교회의 전통적인 규율에 순종하면서 5년 후 자연사했다. 헤밍웨이는 명예, 진실, 충실함에 바탕을 둔 나름의 규범을 창안했다. 그는 세 가지 모두에 실패했고, 그 실패는 그를 망가뜨렸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예술을 망치고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그는 극악한 잘못들을 저질렀지만, 단 한 가지 점에서는 부족함이 없었다. 바로 예술적 완벽함이었다. 이 점만큼은 그의 생애 내내 봉화처럼 빛을 발했다. 그는 영어, 그리고 소설을 쓰는 새로운 방식을 창출해내는 작업을 스스로에게 부여했고, 임무 완수에 성공했다. 그것은 영어의 역사에서 두드러진 일대 사건이었고, 현대인들은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창조적 재능과 에너지, 참을성이라는 어마어마한 자원을 갖고 이 임무에 헌신했다. 그 자체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어려운 것은, 그가 발견했듯이 스스로 설정했던 높은 창조적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에 분명해진 이런 상황은 그의 습관적 우울증에 짐을 보탰다.

이후로 그가 발표한 몇 안 되는 성공작들은 기다란 내리막길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에 불과했다. 헤밍웨이의 예술가적 기질이 조금 덜했다면, 그것은 인간 헤밍웨이 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많은 작가들이 그랬듯이, 그도 열등한 소설들을 쓰고 발표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의 수준을 밑도는 작품을 집필할 때, 그는 그렇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각은 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술의 힘을 빌리려 했다. 그의 한 손에는 연필이, 다른 손에는 술이 있었다.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은 비참했다. 스스로 설정한 최소기준에 미달된다고 느끼는 작품들을 다량 써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작품은 출판이 됐다.

B
급이라는 평가를, 심지어는 초기작의 패러디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 두 가지 예외는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노인과 바다였다. 아무튼 일반적인 수준은 저하됐고, 곤두박질쳤다. 재능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그 재능을 다시 포착할 수 없다는 깨달음은 우울증과 술로 이뤄진 악순환을 가속시켰다. 그는 그 자신의 예술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이다.

그의 삶에는 모든 지식인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교훈이 담겨 있다. 예술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교훈이.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