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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인류에게 조언을 한 '버트런드 러셀' 비판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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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8. 8.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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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름: 지식인의 두 얼굴
저자: 폴 존슨
번역가: 윤철희


역사상 그 어떤 지식인도 3대 러셀 백작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만큼 오랜 기간 동안 인류에게 조언을 하지는 못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선된 해에 태어난 그는 워터게이트 직전에 사망했다. 그는 마르셀 프루스트와 스티븐 크레인보다 생일이 몇 달 늦고, 캘빈 쿨리지와 맥스 비어봄보다 생일이 몇 주 빠르다.

그런데도 그는 1968년의 운동권 학생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스토파드와 핀터의 작품을 즐길 정도로 장수했다. 이 오랜 기간 동안 그는 놀랄 정도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조언과 훈계, 고발과 경고를 꾸준히 제기했다. (불완전한 것이 확실한) 어느 저서 목록은 그의 저작 68권의 목록을 실었다.

러셀이 자신에게 그토록 많은 충고를 할 자격이 있다고 느낀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게 즉각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가 그토록 많은 글을 쓴 가장 큰 이유는 글 쓰는 것이 수월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짭짤한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 마일드 맬러슨은 1920년대에 러셀에 대해 이렇게 썼다. “버티는 매일 아침 혼자서 한 시간 동안 산책을 하면서 그날 할 일을 구상하고 고민했다. 산책에서 돌아와서는 나머지 아침 시간 동안 부드럽고 수월하게, 그리고 단 한번의 수정도 하지 않고 글을 썼다.” 그는 이런 유쾌한 활동에 따르는 금전적 성과를 작은 공책에 기록했다. 그는 그 공책에 평생 동안 출판하거나 방송했던 모든 것에 대한 수입을 기록했다.

그의 할머니는 청교도적 세계관을 가진 대단히 고결하고 지독할 정도로 종교적인 여성인 할머니였다. 성경과 정부 보고서의 분위기 속에서 여자 가정 교사들이 연달아 러셀을 가르쳤다. 그런데 러셀은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어찌됐듯 자기 가고픈 길을 갔다. 열다섯 살 무렵에 그는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감시의 눈에서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 위해 그리스 문자를 사용했다. 이즈음에 신앙을 버린 그는 여생을 그렇게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닫거나 필요로 하는 궁극적 존재에 대한 필요성은 그에게 조금도 매력이 없었다.

그는 우주의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인간의 지성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런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러셀은 인간의 지성을 추상적이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긴 했지만, 동시에 지성의 힘을 확신했다. 추상적 지성에 대한 애정과 구체적인 운동에 대한 의혹은 러셀을 수학자로 만든 할머니의 청교도적 가르침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

러셀은 대중이 지식의 최전방에 침투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공인 수학 부문은 고도로 전문적인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 비전문가들의 접근은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철학적 사색은 특별한 언어로 행해져야만 하며, 성직자들만의 이런 암호를 보유하고 강화시켜 나가기 위해 투쟁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부인들이 비결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지식인 세계의 고위 성직자였다.

그는 G. E. 무어처럼 일상적이고 평범한 언어로 문제들을 논의하고 싶어 하는 철학계 동료들과 심하게 다투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지식인 세계의 고위 성직자는 엘레우시스의 비밀 의식을 특권층 내부에서만 거행되도록 지켜 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는 한편, 그들이 관리하는 지식의 창고를 바탕으로 대중에게 소화하기 쉬운 지혜의 과실을 대접해야 하는 의무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전문적 철학과 대중적 윤리학 사이에 선을 긋고 양쪽을 모두 행했다.

그는 1895~1917, 1919~1921, 1944~1949년 사이에 트리니티의 교수로서 여러 해 동안 강의하고 가르쳤다. 그렇지만 러셀은 그의 인생의 상당 기간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데 썼고, 이런 지적인 복음주의는 그의 오랜 삶의 후반부를 완전히 지배했다.

러셀은 타고난 해설자였다. 그의 초기 저작은 그가 늘 존경했던 라이프니츠의 연구를 설명했다. 『서양 철학사 (1946)』는 그 분야 최고의 개론서로, 당연히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동료 학자자들은 러셀을 비판하거나 개탄하는 척했지만, 그들이 러셀의 대중적 저작을 시샘했다는 것에는 의심에 여지가 없다.

게다가 러셀은, 맞건 틀리건 자신의 신념에 대한 용기가 있고 그 신념을 위해 고초를 겪을 준비가 돼 있었다. 아이슈타인이 나치의 학정을 피해 망명을 간 것처럼, 다양한 정권과 계속 불화를 일으킨 러셀은 그에게 가해진 형벌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여러 에피소드들은 철학을 상아탑에서 끌어내 저잣거리로 가져가겠다는 성실성과 의욕을 입증했다. 사람들은 모호하고 부정확하게나마 러셀을 독을 들이키는 현대의 소크라테스, 또는 통 속에서 나온 디오게네스로 여겼다. 사실 러셀이 철학을 세상으로 끌고나왔다는 생각은 굉장히 그릇된 것이다. 대신, 그는 세상을 철학 속으로 압착해 넣는 성공적이지 못한 작업을 통해 그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슈타인의 경우는 사뭇 달랐다. 아이슈타인은 우주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관찰했고, 이런 움직임에 대한 묘사에 경험적 증거라는 가장 정확한 잣대를 적용하기로 결심한 물리학자였기 때문이다. 아이슈타인은 뉴턴 물리학을 바로잡으면서 우주를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고, 그의 연구는 이후로 계속해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응용됐다. 아이슈타인의 원자론은 인간이 만든 핵에너지로 향해 길에 놓인 최초의 위대한 이정표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러셀은 누구보다도 물질적 실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가장 간단한 기계 장치도 작동시킬 수 없었고, 응석받이로 자란 사람조차 별다른 고민 없이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을 해낼 수 없었다. 그는 차 애호가였지만, 차를 끓이지는 못했다. 그는 보청기를 착용했지만, 도움을 받지 않고는 전혀 작동시키지 못했다. 인간들도 물질적인 세상만큼이나 꾸준히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도래로 인해 인간 본성에 대한 내 관점을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썼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나는 그런 것이 드문 예외에 해당한 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파괴행위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식인의 대부분은 진실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기보다 진실을 좋아하는 지식인이 전체의 10%도 안 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이 분노의 문장은 보통 사람의 감정이 전시에, 아니 평상시에도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너무나 모르는 말이었으므로 별다른 논평을 할 여지가 없다. 그의 자서전에는 평범한 독자라면 그처럼 영리한 사람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그토록 무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지는 견해가 많이 등장한다.

재미있는 일은 러셀이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지식과 현실적 무지의 위험한 조합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곧잘 간파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1920년에 그는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러시아를 방문했고, 519일에 레닌을 면담했다. 그는 레닌이 이론의 화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러셀은 나는 그가 대중을 경멸하는 지식인 귀족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썼다.

그러나 러셀은 레닌에 대한 묘사가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없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러셀 자신도 대중을 경멸하고, 때로는 불쌍히 여기는 지식인 귀족이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러셀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 지를 모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러셀은 레닌에게 투영된 자신의 특징들을 볼 수 없었다.

그는 세상의 질환 대부분은 온건한 논리와 이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남녀노소가 감정이 아니라 이성을 따른다면, 직관적인 논쟁 대신 논리적인 논쟁을 벌인다면, 그리고 극단적인 방식에 빠져드는 대신 온건한 해결책을 실행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인간관계는 조화로워질 것이며 인류의 생활 여건은 꾸준히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수학자 러셀의 관점이었다. 논리학의 관점에서 정의할 수 없는 개념은 하나도 없고, 추론을 통한 응용으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하나도 없는 순수 수학적인 관점이다.

그는 인류가 겪는 문제들을 수학 방정식과 비슷하게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간과 인내, 온화한 방법, 이성만 주어진다면 인류가 공적-사적으로 겪는 대부분의 난점에 대한 해법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철학적 초연함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무엇보다 러셀은 제대로 된 이성과 논리의 틀만 주어지면, 인류의 대다수는 점잖게 행동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러셀의 삶 자체가 이런 주장일 불안정한 토대에 의존하고 있음을 거듭해서 보여 줬다. 중요한 국면에서 러셀의 관점과 행동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의해 결정되는 경향이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면 논리는 허공 속에 내동댕이쳐졌다. 러셀은 자신의 이익이 위협받는 곳에서도 점잖게 행동할 것이라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줄 수 없었다.

위대한 편집자 킹즐리 마틴은 러셀을 잘 알았다. 그는 자신이 만난 사람 중 걸핏하면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반전론자였다고 말하면서, 러셀을 예로 들었다.

러셀은 예방적 전쟁을 옹호했다. 그는 러시아가 서유럽을 침공한다면, 나중에 러시아를 물리치더라도 그로 인한 파괴는 회복할 수 없는 수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세계 대전은 끔찍하긴 하지만 나에게는 세계적인 공산주의 왕국보다는 그쪽이 더 낫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때쯤 러셀의 관점이 급작스럽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1953
10월에 그는 『네이션』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이 러시아에 맞선 예방적 전쟁을 지지해 왔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는 순전히 통계학적인 근거에서 볼 때, 맥밀런과 케네디는 히틀러보다 50배쯤 부도덕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문장은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미래에 대한 예상과 비교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잘못된 것이다.

러셀은 이론적으로는 20세기 여성 해방 운동의 흐름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현실적으로는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뿌리를 내린 채로 남아 있었고, 여자를 남자의 부속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독선적인 진보주의와 특권층의 양쪽 세계에서 최선의 것을 뽑아내는 능력은 많은 지도적 지식인들의 삶을 관통하는 주제다. 러셀도 여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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