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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삶 비평

일반서적

by noruboy 2020. 7. 1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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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폴 존슨
책 이름: 지식인의 두 얼굴
저자: 폴존슨 (Paul Johnson)
역자: 윤철희
출판사: 을유문화사



내용 요약
글을 쓰는 것은 힘든 일이다. 창조적인 글을 쓰는 것은 머리를 써서 하는 일중에서 가장 힘든 고역이다. 창조적인 혁신, 특히 근본적인 규모의 혁신은 예외적이라 할 정도로 큰 집중력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자신이 종사하는 예술 분야의 창조적 한계를 지속해서 넓히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는 것은 극 소수의 작가들만이 소유했던 상당한 수준의 자기 수양과 근면성을 갖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헨리크 입센 Henrik Ibsen (1828-1906) 이 작품으로 보여 줬던 일관된 패턴이었다. 활동 분야와 시대를 불문하고 입센처럼 성공적으로 문학에 전념했던 작가는 떠올리기 힘들 것이다. 그는 근대 연극을 창안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근대 연극 레퍼토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일련의 희곡들을 집필했다.

서구의 연국이 황량한 불모지라는 것을 깨달은 입센은 자기 고국에서뿐 아니라 세계 전역에 걸쳐 연극을 가장 풍요롭고 광대한 예술 형식으로 탈바꿈시켰다. 더군다나 그는 연극에 대변혁을 일으키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세대와 그 뒤를 이은 세대의 사회에 대한 생각을 바꿔 놓았다. 18세기 후반에 루소가 했던 일을 19세기 후반에 입센이 해냈다.

 

루소는 남녀노소에게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집단 혁명을 촉진시킨 반면, 입센은 모든 마을, 모든 가정을 지배하는 금제와 편견의 구체제 맞서는 개인의 저항을 설파했다. 그는 사람들, 특히 여성들에게 개인의 의식과 각자의 사적인 자유의 관념이 사회의 요구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인간의 태도와 행동에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생전에 이미 시작된 이 혁명은 이후 몇 차례의 도약과 격동을 거쳐 지속되고 있다. 그는 프로이트보다 훨씬 전에 관용적인 사회의 기초를 닦았다. 마르크스는 물론이고 루소조차도 정부에 맞선 사람들의 실제 행동 양식에 있어서 입센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입센과 그의 작품들은 근대성의 아치를 완성하고 지탱한 초석이었다.

입센의 출신 배경에 깔려 있는 이중의 난점을 고려하면, 그의 업적은 더욱 더 놀랍다. 그가 가진 어려움이 이중인 것은, 그가 가난했을 뿐 아니라 제대로 된 문화적 전통이라고는 거의 없는 약소국 출신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어는 19세기 전까지는 한 나라의 공식 언어라기보다는 세련되지 못한 시골 사투리에 가까웠다. 1813년에야 대학이 처음 문을 열었고, 베르겐에 최초의 노르웨이어 극장이 건립된 것은 1850년이었다. 노르웨이는 궁핍하고 별 볼일 없는 나라였다. 유럽의 기준으로 보면, 인구가 2만 명밖에 안 되는 노르웨이의 수도는 진창으로 뒤덮인 볼품없는 조그만 지방도시였다.

입센의 가족은 늘 빚에 시달렸고, 주로 감자만 먹고 살았다. 키 작고 못생긴 입센은 사생아라는 소문 때문에 그늘 하나를 더 덮어쓰고 자라야 했다. 입센은 자신이 그 지방 난봉꾼의 자식일 것이라는 이 소문을 믿었고, 술에 취하면 그 얘기를 스스로 불쑥 털어놓곤 했다. 하지만 소문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없다. 굴욕적인 유년기를 보낸 후, 그는 음침한 항구 그림스타드에 약제사의 조수로 보내졌는데, 그의 운은 이곳에서도 트이지 않았다. 오랫동안 실패만 거듭하던 약국 주인은 결국 파산했다.

입센이 이런 나락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 사연은 외로운 독학으로 점철된 장대한 서사시와도 같다. 그는 시, 무운시 희곡, 연극 비평, 정치 논평을 썼다. 초창기 희곡인 풍자적인 <노르마>는 공연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무대에 올리는 운문으로 쓰인 비극 <카탈리네>는 실패작이었다. 무대에 올린 두 번째 작품 <성요한의 밤>도 운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지속적으로 광범위한 무대 경험을 쌓았다. 입센은 극장에서 뼈 빠지게 일했다. 그는 세트 작업, 의상, 매표소 등의 일을 했고, 심지어는 연출까지 했다. (그런데도 연기는 결코 하지 않았다. 배우들의 연기를 연출하는 데 자신감이 부족했던 것은 그의 약점이었다).

그가 평생 쓴 작품의 핵심 주제라 할 사회의 지배에 맞선 개인의 의지를 따를 것을 탄원하는 내용이었다. <브랑>은 처음 출판됐을 때(1866)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입센은 처음으로 노르웨이뿐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전역에서 정통 신앙에 대한 반항을 이끄는 지도자로 간주됐다. 그는 협소한 노르웨이 문화권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 물결은 1870년대에 밀려왔다. 그는 <브랑>으로 혁명적 관념을 내포한 연극에 헌신하게 됐다. 그런데 그는 그런 연극들은 학계에서 읽히는 것보다는 무대에서 공연될 경우에 무한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체계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 결과, 그는 시를 포기하고 산문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산문으로 연극적 리얼리즘의 새 물결을 일으켰다.

 

그가 적었듯, “운문은 비전을 위한 것이고, 산문은 관념을 위한 것이다.” 입센의 모든 발전이 그랬듯, 운문에서 산문으로 성공적으로 전향하는 데에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 입센은 활동을 멈추고, 일을 하기보다는 생각에 잠겨 지냈다. 소설가에 비교해 볼 때, 극작가는 실제 집필에는 그다지 많은 시간을 쓰지 않는다. 희곡은 그다지 논리적이지도 않고 특정한 주제에 일관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 몸이 일으키는 경련과 비슷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처럼 입센도 자신이 앞서 했던 것을 되풀이 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는 근본적인 정치적-사회적 이슈들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소박하고 일상적인 언어와 배경 설정으로, 말 그대로 무대의 한복판에 올려놨다. 그가 불러일으킨 엄청난 열정과 분노, 혐오감, 사회적 관심의 파장은 스칸디나비아 전역으로 폭넓게 확산됐다. <기둥>은 중부유럽의 관객들에게 다가갈 수 있게 해 준 작품이었고, <인형의 집>은 그를 앵글로-색슨의 세계로 데려갔다. 최초의 근대 연극에 해당하는 이 작품들은 입센을 세계적 인물로 등극시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입센은 국제적으로 아무리 많은 추종자가 있다 해도, 사회적 의식을 가진 극작가라는 역할에만 안주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몇 년에 걸친 느릿한 잉태 기간이 지난 후 다시 한번 급속한 속도를 내면서 펼쳐진 그의 세 번째 도약기 동안, 그는 정치적 이슈에서 발길을 돌려 개인의 해방의 문제를 향해 나아갔다.

인간의 영혼과 자유를 향한 추구, 무의식, 그리고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한 통제권을 어떻게 얻게 되는지와 같은 소를 끼치는 제주들을 탐구한 이 작품들은 당시의 시각에서는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희곡이었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작품들이 됐다. 입센의 장점은 늘 신선하고 독창적인 것을 작품 속에 끌어들이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절반 정도만 형성된 개념, 심지어는 탐구되지도 않는 개념에 민감했다는 것이 입센의 장점이었다. 그와 한때 친구였던 덴마크의 평론가 예오르그브란데스가 적었듯, 입센은 막 싹이 트기 시작한 시대정신과 감정을 들끓게 만드는 사상들과 불가사의할 정도로 일치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의 귀는 땅 밑을 파고드는 사상들이 내뱉는 나지막한 소리들을 듣는다.

전직 약제사의 조수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었다. 러시아의 톨스토이와 더불어 그는 세상에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작가이자 예언자로 간주됐다. 르 갈리엔이 넌지시 비쳤듯이, 생전에 이미 대중의 존경과 칭송으로 잊히지 않는 존재가 된 이 위대한 휴머니스트 작가에게는 그런 명성이 딱 들어맞지만은 않은 무엇인가가 있었다. 여기 위대한 해방자가 있다. 인류의 마음을 연구하고 파고 들었던 그 사내는 인류를 위해 울먹거렸다. 그의 작품들은 인류가 인습이라는 족쇄와 독선적인 편견에서 어떻게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지를 가르쳤다.

그런데 인류를 향해 그토록 강렬한 감정을 품은 사람이 어째서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준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어째서 그는 사람들이 그에게 접근하는 것을 거절하고 신문에 실린 기사를 통해서만 그들을 만나려 했을까? 그는 왜 늘 외톨이였을까? 그가 스스로 부여한 과도한 고독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위대한 인물을 가까이서 관찰할수록, 그 인물의 모습은 더욱 괴상해진다. 전통을 짓밟고 보헤미안적 삶의 자유를 역설한 입센은 이제 스스로 지독하게 보수적인 인물이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풍자 만화의 대상이 될 정도로 보수적인 인물 말이다.

그를 향한 작가의 비판점
1)
그는 겁 많은 작은 생쥐처럼 보였다. 주변 사람들을 경멸하는 법을 아직 배우지 못했던 시절이라서 그런지 자신감도 부족했다.

2)
고상해지려는 입센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갑판장이나 선장처럼 보였다.

3)
이 국제적 유명 인사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준 것은 그 많은 우둔함과 허영심이 아니라, 악의에 찬 권력과 억누를 줄 모르는 분노 덕분이었다.

4)
입센은 자신의 내부에서 분노를 제거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메아리를 전갈에게서 본 것일까?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 넘치는 그의 희곡들은 거시적인 치료 행위의 일환이었을까? 그의 많은 지인들은 그의 초창기 삶과 투쟁이 그에게 가라앉힐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분노를 남겨줬다는 것을 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루소와 비슷하다. 그의 자존심에 든 멍은 평생 풀리지 않았고, 그 결과로 그는 이기적인 괴물이 됐다.

5)
입센은 동생의 취직을 위해 형식적인 추천장을 써 보낸 적은 한 번 있지만, 동생에게 땡전 한 푼 건네지 않았고,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

6)
입센에게서 유산을 한 푼도 물려받지 못한 부자지간 한스 야코브는 19161020일에 역시 가난뱅이로 숨을 거뒀다.

7)
합법적으로 불법적으로 건 가족들이 자신에게 돈을 요구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의심의 여지없이 입센이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려 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는 초년에 겪었던 가난으로 인해 안정적인 생활을 끝없이 열망하게 됐고, 그런 열망은 끊임없는 돈벌이와 저축을 통해서만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의 삶을 끌고간 가장 큰 추진력 중 하나도 그것이었다.

8)
그는 비열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다른 모든 측면이 그랬던 것처럼 비열함의 정도도 웅대했다. 그는 돈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거짓말을 할 준비가 돼 있었다.

 

9) 그의 결혼 생활은 따스했다기보다는 필요한 기능만 이뤄지는 쌀쌀맞은 생활이었다. 입센의 결혼 생활은 한 가지 점에서 그의 업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희곡이 계속 퇴짜 맞거나 실패했던 너무나 의기소침한 시기에, 입센은 또 다른 재주인 그림을 그려 볼까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녀는 남편이 그림 그리는 것을 막으면서 매일 같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시구르가 훗날 썼듯, “형편없는 화가 한 명을 줄이는 대신 위대한 작가 한 명을 배출시켰다는 점에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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