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계몽주의 혁명가 '장 자크 루소' 비평 (지식인의 두 얼굴)

일반서적

by noruboy 2020. 5. 23. 02:12

본문

저자: 폴 존슨[1]
책 이름: 지식인의 두 얼굴[2]
출판사: 을유 문화사
역자: 윤철희[3]

 

https://brunch.co.kr/@inmunart/198

요약
지난 200년간 지식인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증대해 왔다. 종교에 몸담지 않은 세속적 지식인의 발흥은 현대 세계의 형성을 도운 핵심 요소였다. 오랜 역사적 관점에 비춰 볼 때, 지식인의 발흥은 여러 면에서 새로운 현상이다. 이전부터 인류 사회를 이끌고자 한 지식인들은 초창기에는 성직자나 율법학자, 예언자의 모습을 취했다. 그러나 원시적이든 세련되었든, 외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종교 규범과 대대로 계승돼 내려오는 종교적 전통은 그들이 주도하는 윤리적·이념적 개혁에 제한을 가했다. 그들은 자유로운 영혼도, 정신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도 아니었고,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없었다.

18
세기에 성직자의 권력이 쇠퇴함에 따라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들이 출현하여 이 진공상태를 메꾸고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그들은 고위 성직자나 교회의 장로처럼 인류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설파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들은 특히 인류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고 가르침을 통해 인류를 진보시켜야 할 복음주의적 의무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앞선 시대의 성직자들보다 더 급진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부여한 과업에 접근했다. 그들은 종교적인 규범에는 조금도 구속감을 느끼지 않았고, 역사를 통해 얻은 포괄적인 지혜, 전통이 남긴 유산, 조상들의 경험을 통해 얻은 기존의 규범 등을 선별하여 수용하거나 총체적으로 거부했다.

세속적인 신흥 지식인들은 공통적으로 종교와 종교 지도자에게 비판적이고 정교한 잣대를 들이댔다. 종교와 종교 지도자들은 인류와 위대한 신앙 체계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가? 또는 해를 끼쳤는가? 교황과 사제들은 청렴함과 정직함, 자애와 박애의 계율을 어느 정도까지 지키며 살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교회와 성직자 모두에게 내려진 판결은 가혹했다. 종교의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감퇴하고, 세속적 지식인들이 인류의 사고방식과 제도의 형성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꾸준히 증대해 온 지 200년이 지났다. 이제는 지식인들의 행동을 공적·사적인 모든 면에서 검토해 볼 때다. 특히, 필자는 윤리적·도덕적 측면에 맞춰 지식인들이 인류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칠 자격이 있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이러한 탐구는 근대적 의미의 첫 지식인이자 지식인의 전형이었고 여러 가지 점에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장 자크 루소(1712-1778)로부터 시작된다. 루소는 기존 질서를 통째로 거부할 권리를 주장했고, 자신의 원칙과 조화를 이루도록 이를 철저히 뜯어고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으며, 정치적 과정을 통해 그런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특히 그는 본능과 직감, 충동이 인간의 행동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는 자신이 비길 데 없는 인류애의 소유자이며, 인류의 행복을 증대시킬 유례없는 재능과 통찰력을 겸비한 인물이라고 믿었다. 놀랍게도 그가 살았던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은 루소가 스스로 내린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루소의 영향력은 장기적으로나 단기적으로나 엄청났다. 그가 사망한 이후 세대에게 그는 신화적 존재였다. 그는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 보다 10년쯤 앞서 사망했지만, 혁명 당시 사람들의 상당수는 그를 프랑스혁명과 이에 따른 유럽의 구체제 붕괴를 초래한 인물로 간주했다. 루이16세와 나폴레옹도 이런 관점을 공유했다. 에드먼드 버크는 혁명 엘리트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혁명 지도자 사이에서 누가 제일 루소와 닮았는지를 놓고 일대 논란이 벌어졌다············. 루소는 완전무결한 모법적 인간이었다.”

로베스피에르도 이렇게 썼다. “루소는 고상한 영혼과 숭고한 품성을 통해 자신이 인류의 스승 역할을 맡을 만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한 위대한 인간이었다.”

이처럼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매우 광대하지만, 크게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1) 교육에 대한 근대적 사고는 모두 어느 정도는 루소의 이론, 특히 그가 저서 『에밀』에서 주장한 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2) 자연에 대한 재평가와 관련해서, 루소는 물질주의 문명에 대한 점진적인 발전을 믿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인간의 이성이 사회를 치유하기에는 상당한 제약이 따른다고 주장했다.

3) 『고백록』에서 루소는 르네상스의 제일 중요한 업적인 개인을 발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업적을 훌쩍
뛰어넘어 내면적 자아를 깊이 탐구했으며, 이를 일반 대중의 연구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 덕분에 독자들은 처음으로 인간 심리의 내면을 보게 됐다. 그러나 성찰의 결과는 거짓이었고, 겉으로는 솔직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교활하기 그지없는 그릇된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것 역시 근대 지식인들의 특징이다).

4) 루소가 대중화시킨 넷째 개념은 어떤 면에서는 가장 널리 퍼진 것이다. 그는 사회가 원시적인 자연 상태에서 복잡한 되 상태로 진화할 때 인간은 타락한다고 주장했다.

5) 루소는 경쟁이라는 악이 인간의 타고난 공동체 감각을 파괴하고, 타인을 착취하려는 욕망을 포함한 인간의 가장 사악한 특징을 부추긴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사회적 범죄의 원천인 사유 재산을 불신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다섯째 혁신적 사상은 산업 혁명을 눈앞에 두고 있던 자본주의의 비판적 요소를 밝혀낸 것이다. 그는 희곡 <나르시스>의 머리말과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사유 재산과, 그것을 획득하려는 경쟁을 소외의 제일 중요한 원인으로 간주했다.


비판점
그러나 사실 이들 모두가 루소의 독창적인 사상은 아니었다. 그는 독서의 폭이 넓었다. 그 예로 루소를 인류가 부여받은 가장 탁월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라고 믿었던 제르맹 드 스탈은 그가 창안해 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만 이렇게 덧붙였다.그는 불꽃으로 그 모든 것을 우려냈다”. 자신의 관념을 선명하고 신선해 보이게 만든 루소의 집필 방식은 간결하고 직접적이며 힘 있고 열정적이어서, 그의 글을 접한 독자들은 그의 계시에 충격을 받았다.

1)
루소는 1728년부터 1742년까지 14년 동안의 전성기에 부인의 돈으로 부인과 함께 살았다.

2)
어머니를 쏙 빼닮은 루소는 홀아비가 된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에게 호의적이었던 루소조차도 훗날 『에밀』에서 아버지의 양육법을 비난했다. 그렇지만 아버지의 만행의 주요 희생자가 된 것은 루소의 형이었다. 루소는 사실상 외아들로 자라왔다.

3)
루소는 어느 정도 버릇없이 자라기는 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강한 상실감과 자기 연민을 보여줬다.

4)
루소의 삶은 온갖 실패와 더부살이, 특히 여성에게 얹혀사는 더부살이로 이어졌다.

5)
그는 조판공, 하인, 신학생, 음악가, 공무원, 농부, 가정 교사, 출납원, 악보 베끼는 사람, 작가와 개인 비서 등 최소한 13개의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1743년 몽테귀 백작의 비서라는 편하고 수지맞는 일자리를 얻었다. 11개월간 계속된 이 일은 해고와 베네치아 의회의 체포를 피한 도주로 끝이 났다. 몽테귀는 자신의 비서가 미천한 성향입에 담기도 싫은 건방짐”, “미치광이 같은 성격”, “지나치게 우쭐대는 성향으로 인해 쪽박을 찰 신세였다고 밝혔다.

6)
그는 분명 말주변이 좋았고 글 솜씨가 뛰어났다. 그런데 그는 실제 사실을 별로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고도 어떤 사건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기술하는 데 특히 뛰어났다.

7) 1750
년에 벌어진 이 일은 루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다른 참가자들은 자연스럽게 과학과 예술을 위주로 논의를 펼칠 터였다. 그런데 루소는 자연이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확실한 것은 루소가 그때 그 자리에서 자신의 신념을 밝히는 논문을 쓰리고 결심했고, 그 역설적인 접근 방식으로 상을 받으면서 하룻밤 사이에 유명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주목과 명성을 갈망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오던 서른아홉의 사내가 마침내 한몫 제대로 잡은 사건이었다. 논리가 빈약한 이 논문은 오늘날에는 거의 읽어볼 가치가 없다. 유명한 비평가 쥘 르메트로는 루소의 이런 벼락출세를 인간이 우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라고 불렀다.

8)
예술과 과학을 다룬 『학문과 예술론』은 출판된 후 꽤 폭넓게 읽혔고, 루소를 반박하는 문건이 300건 가까이 출판됐다. 그러나 루소는 이 책으로 큰돈을 벌지는 못했다. 실제로 팔린 책은 소량에 불과했고, 그런 작품을 팔아서 돈을 번 사람들은 책 장수들이었다. 한편, 루소는 이 책을 계기로 일류 지식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있던 많은 귀족의 저택과 별장을 돌며 강연을 했다.

9)
그는 늘 귀족의 환대를 생계 수단으로 삼았다. 그는 종종 환대를 베풀었던 사람들과 격렬하게 다투었다.


10) 생존해 있을 때나 그 후에나 그의 저서들이 발휘한 영향력은 편차가 심하다. 1752년에 집필에 착수해서 10년 후에 출판된 『사회 계약론』은, 일반적으로 그의 정치 철학을 농축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의 생전에는 거의 잃기지 않았고, 1791년까지 딱 한 번 재판을 찍었을 뿐이다. 그 시대의 도서관 500곳을 조사한 결과, 그 책을 소장한 곳은 단 한 곳이었다.

11)
그는 프랑스 교회로부터 이중 배교자라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카톨릭으로 개종한 그는 나중에 제네바 시민권을 얻기 위해 다시 칼뱅파로 돌아섰다.

12)
루소는 생전에도 상당한 성공을 누렸다. 요즘 시각으로 공정하게 보더라도 그가 불평할 만한 일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루소는 문학사상 제일가는 불평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비참하고 박해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너무나 끔찍한 용어로 자주 불평을 털어놨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13)
루소는 자신의 건강이 매우 나쁘다고 서술했지만, 다른 많은 증거들은 그의 그런 주장을 반박한다. 특히 그의 불면증은 부분적으로는 판타지다. 영국으로 가는 뱃길에 동행한 데이비드 흄은 그를 내가 아는 가장 건강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14)
건강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걱정은 평생 동안 그를 둘러싸고 벌어진 모든 사건의 발단이 된 자기 연민의 독창적인 에너지원이었다. 그는 사람들, 특히 가문 좋은 여성들의 동정심을 끌어내기 위해 꽤 어렸을 적부터 그가 사연이라고 부른 이야기를 하는 버릇을 들였다. 그는 스스로를 가장 불행한 생명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런 자기 연민의 배후에는 엄청난 이기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15)
루소가 자만심 낳고 이기주의적이며 걸핏하면 싸우려 드는 사람이었는데 왜 그와 친구가 되려고 했던 사람은 그렇게 많았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루소의 성격의 핵심과 역사적 중요성에 도달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는 우연으로, 부분적으로는 본능으로, 부분적으로는 신중한 계략으로, 그는 특권층의 죄의식을 체계적으로 이용한 최초의 지식인이었다.

16)
그는 선천적으로는 반사회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상류 사회에서 빛나는 존재가 되고 싶어 했다. 특히 그는 상류 사회 여성들의 미소를 원했다. 1740년대에 상류 사회의 취향에 맞게 행동하면서 사교계에 진입하려던 그의 첫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상류 사회 유부녀의 호의를 노린 그의 첫 연극은 치욕적인 재앙을 낳았다. 하지만, “타고난 본성이라는 카드를 사용하여 논문 공모에 성공한 이후 그는 전술을 180도 바꾸었다. 그는 촌티를 숨기는 대신, 노골적으로 촌티를 풍겼다. 그는 촌티를 미덕으로 삼았다. 전략은 먹혔다.

17)
의식적이건 아니건, 그는 뛰어난 자기 홍보 전문가였다. 그의 괴벽, 사회적 잔인성, 개인적 극단주의, 심지어는 다툼조차도 세간의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그런 점들이 그의 귀족 후원자와 독자와 숭배자들에게 먹혀드는 매력의 일부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
루소는 자기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도우려는 사람은 누구든 사실상 그로부터 은혜를 받는 셈이라는 뻔뻔한 주장으로 이런 원칙을 뒷받침했다.그 예로 그는 그에게 상을 준 디종 아카데미에 보낸 답장에서 그런 패턴을 수립했다. 그는 자신의 논문이 진리라는 비대중적인 노선을 취했으며, “저의 용기에 영광을 베푼 여러분의 관대함 덕분에, 여러분은 그보다 더한 영광을 여러분 스스로에게 베풀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사 여러분, 여러분이 저의 영광을 위해 한 일은 여러분 자신에게 월계관을 씌운 것과 같습니다.”

19)
루소의 적들은 항상 예전의 친구이거나 후원자였다.

20)
그는 자기 아이들을 고아원에 내다 버렸다. 그런데 루소는 자신이 한 짓을 철저한 비밀로 감춰둘 수가 없었다. 그는 반드시 자신을 옹호해야 했다. 그가 아이 다섯 명을 내다 버렸다며 공격한 책자 『시민의 감정』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21)
루소는 스스로를 버려진 아이로 여겼다. 넓게 보면 그는 결코 어린이 되지 못했다. 평생토록 그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어린아이였다.

루소는 스스로를 어린애로 느꼈기 때문에, 그가 자식들을 키울 수 없다는 것은 당연히 논리적인 귀결이었다. 그래서 다른 무엇인가가 그의 역할을 넘겨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무엇은 고아원의 형태를 띤 국가였다. 그는 자신의 악행을 포장하고 변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오래 고민했고, 그의 이런 심사숙고는 『사회 계약론』 구상에도 도움을 주었다. 특정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자기정당화 과정이 반복되고, 이것이 자기존중의 강화로 인해 진심에서 우러난 확신으로 굳어졌다가, 점차 교육이야말로 사회와 윤리 도덕의 발전의 열쇠이며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관심사가 돼야 한다는 명제로 발전해 갔다.

국가는 (고아원에서 루소의 자식들에게 했던 것처럼) 아이들뿐 아니라 성인 시민들의 정신도 형성해 내야만 한다. 이처럼 악랄하고 기이한 도덕적 논리 체계에 의해, 루소가 어버이로서 저지른 죄악은 그의 이념적 창조물인 미래의 전체주의 국가로 이어졌다. 루소가 여러 가지 점에서 일관성 없고 모순적인 작가였기 때문에, 그의 정치사상을 둘러싼 갈등은 늘 있어왔다. 루소 연구자의 수가 그토록 많은 이유 중 하나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고발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광범위한 증거의 제시도, 루소에게 지적-정서적으로 매료된 사람들이 그와 그의 저작을 숭배하는 태도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루소에 대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런 평가는 지식인도 일반인과 마찬가지로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며 어리석고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 영국의 석학이자 역사학의 거장으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비판적 저널리스트. 1928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나 스토니허스트 컬리지와 옥스퍼드대학교 모들린칼리지를 졸업. 저술가로서 역사, 인문, 예술, 문화를 넘나들며 50여권의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뉴욕 타임스』올해의 선정된 『모던 타임스』 같은 박심함과 예리한 통찰이 돋보이는 저술로 독자를 매료시켰다. 주요 저서로 『미국인의 탄생』, 『유대인의 역사』 등이 있다.

[2] 책은 지식인의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측면을 낱낱이 파헤친 책으로 그들의 위대한 업적과 함께 윤리성과 도덕성을 전면 재검토하며, 그들의 사상이인류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칭송 받아 마땅하다 일각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한다.

[3]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영화 전문지에 기사 번역과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위대한 영화 1~4, 『메이플소프』, 『이안: 경계를 넘는 스토리텔러』, 『타란티노: 시네마 아트북』, 『한나 아렌트의 말』, 『캐스린 비글로』, 『스탠리 큐브릭』, 『히치콕』, 『제임스 딘』,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저 에버트』, 『에퀴아노의 흥미로운 이야기』 등이 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