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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경제학자 하이에크의 영어 실력, 사회주의자 케인스의 독일어 실력에 관한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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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12. 6.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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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파 경제학 집중 포화를 맞다(1932-1936)
하이에크 역시 1930년대 초 독일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지켜보며 점점 더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지 않아 나치가 부상하면서 결국 오스트리아는 1938년 나치 독일에 합병되는 길을 걸었다. 히틀러는 나치 정부가 휘두르는 위협을 등에 업고 도로를 건설하고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공공사업을 추진했는데, 이러한 히틀러의 행보는 케인스가 제안하는 정책을 흉측하게 풍자하는 소재가 됐다. 하이에크는 히틀러가 독일 경제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지 지켜보며 자유시장이야말로 경제학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자유 사회를 지키는 길에서 매우 중유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치솟는 물가를 경험한 것이 하이에크가 오스트리아학 파의 자본 이론을 신뢰하는 밑거름이 됐듯이, 가까운 가족을 비롯해 나치의 폭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은 그가 자유시장의 부정이 어떻게 전체주의를 부를 수 있는지를 경제학을 넘어 철학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1930년대의 실상이 천천히 드러남에 따라 하이에크는 여전히 섬나라 영국 사람들에게 대륙 경제사상의 장점을 설득하는 데 마음이 가 있었다.

케인스가 나아가는 새로운 방향은 케임브리지 공개 강의에서나 <타임스> 기고문에서나 누가 보기에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하이에크에겐 기존의 자기 저술을 영국학계에 알리는 일이 더 중요했다. 케인스와 맞붙을 때도 드러났듯이 영어로 출간될 것 말고는 자신의 이론에 대해 아는 사람이 로빈스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화폐론』의 한구석에서 독일어가 능숙하지 못해서 독일어를 읽어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이미 아는 내용뿐이고 새로 접하는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라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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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개입이 아니라 규제 완화가 필요하다
하이에크는 화폐 이론과 경기 순환을 다룬 자신의 학위 논문을 1933년에 영어로 출판했는데, 이것이 1929년 주식 시장 붕괴와 대공황에 대한 그의 설명을 제시하는 기회가 됐다. 하이에크는 그 책으로 화폐적 접근의 타당성을 밝혔을 뿐 d니라 화폐에 관한 설명 중 널리 인정받고는 있어도 지나치게 단순화된 몇몇 설명을 반박하는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했다. 케인스는 현실의 딜레마에 맞서려는 욕구에서 힘을 얻었던 반면, 하이에크의 저술은 대개 순수 이론이었다. 하지만 『화폐 이론과 경기 순환』의 영어판 서문(1932)에서 하이에크는 최근의 재앙적 사태에 대해 거론했다.

하이에크는 정부가 개입해 봐야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라고 강조했다. “강제적인 신용 팽창으로 불황을 해결하려는 것은 악을 유발한 바로 그 수단으로 악을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결론에서 그는 경제를 다시 건강한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한 손쉬운 방법은 없을 것이라고 우려하면서, 정부 개입은 위기를 장기화시킬 뿐이라는 점을 확신했다. 그리고 하이에크는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안정화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안정화론자들만큼 단순하고 선명한 규칙을 제안할 수 없기 때문에 계속 불리한 입장에 처하기 마련이다. 권위적인 대처로 모든 해악을 해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어떠한 규칙을 시행해도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우리가 어떠한 미래를 꿈꾸도 있든 고통스럽더라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하나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개입하고 관리하려는 대상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극히 미약하다는 것이다. 사실 그 지식이 너무 미약한지라 지금보다 조금 더 알게 된다고 하더라고 개입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는 결론을 내서는 안 되며 숙제로 남겨 둬야 한다.”

- ‘영국인하이에크
옥스퍼드 대학 경제학자로 나중에 LSE에서 강의했던 존 힉스도 하이에크가 진행한 세미나에 참석했다. 힉스는 세미나 초반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처음에 우리는 관점은 물론 신념까지도 공유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공유하던 신념은 자유시장 혹은 가격 메커니즘에 대한 신념이었다. 즉 정부나 자본, 노동의 독점적 담합에 의한 개입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쟁 시스템은 쉽게 균형에 도달할 거라는 생각이다. 하이에크는 LSE에 합류하고 나서 이 원칙적 견지에 중요한 단서를 하나 부가했다. 가격 메커니즘이 순탄하게 작동하려면 화폐가 중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하이에크는 영어 구사가 쉽지 않아 자기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잘되지는 않았지만 가르치는 일이 즐거웠다. 1932LSE 학부생이었던 시어도어 드레이민은 하이에크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우리 모두 흥분됐다.”라며 이렇게 회상했다. “첫 강의에 들어가 보니 하이에크가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몇 분이 흘렀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마디라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몇몇 학생이 독일어로 말하는 게 어떠냐고 하자 하이에크가 독일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결국 독일어를 이해할 수 없는 학생들은 수강을 철회해야 했다.” 번번이 이런 일이 벌어졌다. 당시 랠프 아라키는 친구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하이에크라는 교수 있자? 요즘 여기서는 폰 하이에크라고 부르는데, 이 양반히 하는 영어가 어제 새 책을 읽어라이런 식이야. 올 들어 하이에크가 엉터리 영어로 하는 강의가 20개나 되는데(신이여, 우릴 도우소서!) 그것도 모자라 우리더러 네덜란드어 책까지 읽으라고 하더군! 게다가 두툼한 책 30권도 더 있지. 하지만 매우 똑똑한 양반이야.”

LSE
학부생 오브리존스의 기억에 따르면 하이에크는 항상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았는데 꾸며 년 것이 아니라 본래 그의 품성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의 영어는 강세가 너무 독특했고 가르치는 내용이 아주 복잡했다. 강의를 알아들으려면 그나마 앞자리에 앉아야 했다.” 하이에크가 케인스 못지않게 영어를 잘 구사했다면 두 사람의 논쟁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이다. 말로 영어를 구사하는 것이 하이에크에게 시련이기는 했지만, 서두를 일 없이 자기 생각을 차분하게 영어로 쓰는 일은 훨씬 수월했다. 게다가 작문은 보린스와 칼도르, 크룸 등이 곁에서 도와주기도 했다.

한편 하이에크는 1933년 사람들이 나치의 이념인 국가사회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게 되면서 경제 이론과는 거리가 먼 영역을 다루게 됐다. “사람들이 국가사회주의를 사회주의에 대항하는 자본주의적 대응이라고 진지하게 여기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는 주요 인사를 우연히 만났는데, 바로 베버리지 경이었다. 그는 정말로 국가사회주의자와 자본가 진영이 사회주의에 맞서 함께 대응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이 보고서에서 사회주의와 나치즘은 서로 완전히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둘 다 자유시장을 제거함으로써 자유 사회의 핵심인 자유를 축소시킨다는 점에서 거의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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