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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는 어떻게 미국을 접수했나? 하버드 대학을 자신의 사상의 전초기지로 만든 '일반이론'

일반서적

by noruboy 2020. 12. 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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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케인스 하이에크(Keynes Hayek, The Clash That Defined Modern Economics)
출판사: 부키

경제학자 케인스는 어떻게 미국을 접수했나? (1936)
1936
2『일반이론』의 출간은 조만간 들이닥칠 케인스 혁명을 시작하는 첫 총성이었다. 서문 첫 문장에서 케인스는 이 책은 주로 동료 경제학자들을 위해 쓴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말은 곧 정부가 돈을 대는 공공사업으로 실업을 줄이자고 정치인과 공직자를 설득하느라 10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음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후버트 후버 대통령과, 이어서 등장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행정부가 대공황기 엄청난 숫자로 불어난 시업을 줄이고자 그때그때 산발적인 소규모 공공사업을 조용히 추진하고 있었다.

두 대통령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즉 뭔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 유권자도 뭔가 행동하기를 바란다는 것, 나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 욕을 먹느니 무엇이든 행동에 옮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해러드의 설명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실업자들이 많으니 일자리를 대량으로 창출하고자 했고, 필요한 예산을 가능한 한 세금으로 충당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다 재정이 적자로 돌아선다면 물론 아주 안 좋은 일이지만, 나중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케인스는 이러한 행동이 옳다는 경제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일반이론』의 논증을 전개했다. 따라서 그가 목표로 하는 독자층은 대공황 희생자들을 도우려는 열의에 차 있고 자기 나름대로 이상을 추구하는 영국과 미국 대학의 젊은 경제학자 세대였다.

루스벨트에게 보낸 구애편지
1929년 주식 시장 붕괴와 뒤따른 대공황은 케인스의 생각이 퍼져 나가는 비옥한 토양이 됐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비서진에게 대공황의 고통을 줄일 색다른 방안을 시도하자고 고무하면서 그러한 정책을 뉴딜이라고 불렀다. 주식 시장 붕괴 후 투자가 90%나 격감하면서 미국인 1,300만 명이 일자리를 상실해 성인 인구 4명당 한 사람이 실업자가 됐다. 당시는 통계를 집계하는 방법이 열악해 재앙의 실상이 크게 과소평가됐으므로 실제 상황은 통계 숫자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농장 노동자를 빼고 계산하면 실업률은 37퍼센트를 웃도는 것으로 추정됐다. 오하이오 주 털리도의 경우는 성인 인구의 80퍼센트가 실직 상태일 정도로 심각했다. 루스벨트 새 행정부는 막대한 과제를 앞에 두고 압도당할 지경이었다.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의 말을 빌리면, “실업자들을 먹이고 재우기 위한 보호 장치가 갈수록 부하가 커지는 것을 견디다 못해 곳곳에서 붕괴되고 있었다……굶주림이 폭력으로 번지거나, 심지어 (적어도 일부 사람의 생각에는) 혁명으로 번질 상황이었다.”

이처럼 커다란 혼란이 밀어닥칠 시기에 케인스는 새 대통령에게 조언했다. 우선 1933년 초에 추후
『일반이론』에서 더 깊이 있게 다룰 내용을 간략히 축약한 『번영으로 가는 길』 1루를 루스벨트에게 보냈고, 이어 19331231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공개서한에서 자신의 생각을 루스벨트에게 제시했다. 이 공개서한은 하버드 대학에서 행정법을 가르치면서 루스벨트와 친밀했던 정치 자문단 브레인 트러스트의 지도급 인사인 펠릭스 프랑크푸르터의 제안으로 쓰게 된 것이다. 케인스는 프랑크푸르터가 시오니즘을 고무하고자 파리 평화 회의에 왔을 때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프랑크프루터는 1933~1934년 가을과 겨울 학기에 옥스퍼드 올소울스 칼리지에 방문 교수로 머물던 중 케인스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루스벨트에게 실업을 줄이기 위한 공적 자금을 더 많이 지출할 것을 촉구할 생각이 있다면 자신이 중간에서 다리를 놔주겠다는 것이었다…….그는 루스벨트를 만난 자리에서 그의 획기적인 산업 부흥법이 장점도 크지만 단점도 보인다고 지적했다. 케인스는 루스벨트가 직면한 이중의 과제로 경제 회복과 개혁을 들었고 이 두 가지는 목적과 시급성이 서로 다르다고 설명하면서, 산업 부흥법은 본질적으로 개혁에 해당하며 경제가 회복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경제 회복을 추진하는 기법의 일부로 잘못 인식되다 보니 너무 성급하게 추진됐다”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케인스는 가격을 의도적으로 올려 농민을 비롯한 여타 생산자들의 수입을 방어해 주는 루스벨트의 정책에 적잖은 공감을 표현하면서도 하지만 물가 상승이 산출량 증가를 해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면 결코 좋은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경고했다. 케인스는 나라 전체의 구매력을 증강시켜 산출량을 촉진하는 것이 가격 수준을 높이는 올바른 길이며, 이를 거꾸로 뒤집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지적하고, 정부가 빚을 내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마땅한 정책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피력했다.

케인스는 정부가 공공사업에 더 많은 돈을 쓰라고 촉구하면서도 루스벨트의 고충에 공감한다는 말도 꺼냈다. 정부의 공적 자금을 당장 투입해 유용하게 추진할 만한 준비된 프로젝트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영국도 이미 경험했다는 것이다. 루스벨트가 선호하는 수력 발전용 댐이나 고속도로, 국립 공원 등의 건설은 정부가 지출한 돈이 경제로 흘러들기까지 여러 달, 심하면 여러 해가 걸린다는 점도 시사했다…….그러고서 그는 이러한 사업은 경제 시스템이란 공이 굴러가도록 시동을 거는 것이 목적입니다. 향후 6개월 내에 큰 힘으로 잘 밀어 주기만 한다면 미국은 얼마든지 번영을 향해 잘 굴러갈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케인스는 하버드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루스벨트가 경제학에 대해서는 산발적인 지식을 갖춘 정도일 거라고 봤다. 그런데 실제 만나보니 예상보다는 경제학을 더 섬세하게 알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 선거 운동을 할 때 건전한 화폐를 추구한다고 공표했는데, ‘건전한 화폐의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해 달라는 질문에 그에 관해 책을 쓸 생각은 없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케인스는 루스벨트와 만난 자리에서 칸의 승수가 작동함에 따라 공공사업에 지출할 차입은 투자로 봐야지 비용으로 보면 안 된다는 점, 그리고 공공사업을 통해 새로 고용되는 사람들에게서 조세 수입이 발생하므로 공공사업에 쓰는 돈은 그 돈값을 한다는 점을 논리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케인스가 설명하는 내용은 대부분 루스벨트가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었다.

케인스는 백악관을 나와 곧장 루스벨트의 노동부 장관 프랜시스 퍼킨스를 만났다. 퍼킨스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술회했다. “케인스는 루스벨트가 취한 조치를 여러 차례에 걸쳐 높이 평가했다. 다만 조심스러운 어조로 대통령이 경제학적인 이야기를 잘 이해할 거라고 짐작했는데 아닌 것 같소라고 말했다.

케인스가 이야기한 모든 논지를 루스벨트가 파악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스벨트가 세계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자유방임과 자유시장론에 반대하는 논객을 뉴딜의 심장부에서 환대했다는 사실만큼은 세상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 워싱턴으로 모여드는 젊은 경제학자 집단의 시선에 분명히 포착됐다. 당시에 루스벨트에 반대하는 보수적 인사들 역시 케인스와 대통령의 직접적인 만남이 이뤄졌다는 사실이 갖는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으며, 자유시장에 대한 태도 자체가 미국과는 맞지 않는 위험한 외국인이 대통령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됐다고 봤다.

케인스와 루스벨트의 짧은 만남이 직접적인 결실을 낳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케인스가 루스벨트에게 제시한 권고 사항의 영향으로 미국 정부가 경제에 한층 더 개입하게 됐다는 시각도 있다. 칼럼니스트 얼터 리프먼은 케인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공개서한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당신이 알고 계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채권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고 장기 금리를 낮추려는 목적으로 재무부에서 지금 장기 국채를 매입하는 정책을 조용하지만 실질적으로 전개하고 있는데, 이 정책을 취하게 된 주된 요인이 당신의 공개서한이라고 합니다.”

케인스는 뉴딜 정책의 내용이 얼마나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미심쩍게 지켜보고 있었고, 자신을 열렬히 따르는 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전달하고 싶어했다. 미국에 머물 때도 정부가 돈을 대 실업을 줄이는 지원책은 경기 순환의 바닥이나 경기 후퇴기에만 적합하며 경제가 일단 회복된 뒤에는 경제 시스템에 돈을 계속 주입하면 안 된다고 사람들에게 거듭 설명했다. 워싱턴에서 뉴욕에 돌아온 케인스는 경제가 완전 고용 상태에 도달했음에도 국가가 계속 돈을 지출해 수요를 진작할 경우 들이닥칠 부작용을 분명히 지적하느라 진을 뺐다. “사회의 노동과 자본 장비가 전부 다 사용되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유효 수요를 더 늘리게 되면 물가를 한도 끝도 없이 올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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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 혁명의 물결로 미국이 출렁이다
미국 젊은 경제학자들에게 케인스가 어떤 영감을 불어넣었는지는 젊은 케인스주의자로 가장 널리 알려졌을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말에 잘 집약돼 있다. “우리는 비록 어리고 보잘것없어 보였지만 케인스를 따르면서 모건의 체이스 은행이나 내셔널시티 은행, 뉴욕 연방준비은행의 세력가보다 더 우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메사추세츠 주 캐임브리지에 자리 잡은 하버드 대학의 젊은 경제학도들은 케인스가 주창하는 이론을 누구보다도 의욕적으로 수용했다. 반면 하버드의 오래 묵은 경제학자들은 대서양 저편 케임브리지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상이 달갑지 않았고 그 내용에 결코 수긍하지 않았다. 당시 젊고 열성적인 케인스주의자로 나중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게 되는 제임스 토빈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고위층 교수들은 대개 케인스의 사상에 적대적이었다. 그중 일부 집단은 루스벨트가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 행정부의 경제 회복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책을 출판했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그들과 아주 달랐다. 토빈을 비롯한 젊은 경제학도들은 루스벨트가 뉴딜 정책으로 표방하는 이상주의에 대한 열의와 애착을 느꼈다. 토빈은 이렇게 술회했다. “경제 이론을 단단히 감싸고 있는 오류에 저항하는 케인스의 봉기는 젊은 층을 감동시키려는 신성한 전쟁과도 같았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 나아가 진리가 완전 고용을 이뤄 주리라그처럼 진한 진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영국에서
『일반이론』이 출간을 앞두고 있었던 1935년 겨울, 하버드 대학 학부생들은 이처럼 강렬한 기대감으로 책을 빨리 받아 보려고 대서양을 건너는 특별 탁송 화물을 예약해뒀다. 마침내 책을 가득 실은 상자가 도착했을 때 그 속에 담긴 혁명적 사상을 빨리 접하고자 너도 나도 책을 집어 들었다. 토빈의 말처럼 하버드는 케인스가 신세계로 진격하는 첫 상륙 거점으로 변하고 있었다.”

어쩌면 루스벨트는 케인스주의를 잘 몰랐을 수도 있고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케인스주의 처방을 실행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스벨트 행정부의 젊은 인사들은 케인스주의와 그 처방을 분명히 이해하면서 행동에 옮겼다. 그들은 필요한 수준에는 훨씬 못 미치는 자금밖에 동원할 수 없었지만, 케인스주의를 낮은 수준에서라도 실행하는 것이 효력을 발휘할 것이라 생각했다. 실업은 신속히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해가 지날수록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93325퍼센트에서 정점을 찍은 실업률은 이듬해에는 17퍼센트로 떨어졌고, 1935년에는 여전히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긴 해도 14.3 퍼센트로 더 떨어져 고무적이었다. 그리고 1936년에 이르렀을 때는 나라 전체의 생산 수준이 1929년 수준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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