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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가 폭정인가, 어디로 가는 길인가? (1937~1946): 하이에크,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케인스의 정책안을 칭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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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12. 10.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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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케인스 하이에크(Keynes Hayek, The Clash That Defined Modern Economics)
저자: 니컬러스 웝숏
옮긴이: 김홍식

영국의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

ㅋ자유인가 폭정인가, 어디로 가는 길인가? (1937~1946)
『일반이론』의 출간으로 미국에서의 케인스 혁명은 확실하게 뿌리내릴 것 같았지만, 케인스의 착상을 실행에 옮기는 루스벨트 행정부의 행보는 들쑥날쑥하고 고르지 못했다. 루스벨트는 백악관에서 케인스를 환대했지만, 케인스의 학설이 주창하는 대로 공공사업을 대규모로 추진하자니 너무 큰돈이 들어가는 게 걱정거리였다. 1937년 봄에 이르자 산출량, 기업 이익, 임금이 1929년 수준으로 올라섰다. 실업률도 193616.9퍼센트에서 14.3퍼센트로 떨어졌다. 이걸 보고 연준 이사회는 의장 메리너 에클스를 비롯한 루스벨트의 몇몇 자문가들은 뉴딜의 고용 정책이 기적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경제 회복이 착착 진행 중이라고 본 루스벨트는 얼마 후 방향 전환을 시사했다.

1937
6월 루스벨트는 정부 지출을 줄이고 신용을 긴축하며 세율을 높이는 조치를 취했다. 정통파 이론을 수용한 것이다. 고용을 창출하던 연방 관청의 사업도 추진이 미뤄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경제는 다시 경기 후퇴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루스벨트 불황Roosevelt Recession’이라고도 불리는 이 경기 후퇴기는 1937년 중반에 시작해 이듬해 끝까지 지속됐다. 이 기간 중 산출량은 3분의 1이나 줄었고, 덩달아 물가도 3.5퍼센트가량 떨어졌으며, 실업률은 다시 19퍼센트로 높아 졌다. 루스벨트는 책임을 회피하려고 대기업들을 비난했다.

루스벨트는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기승을 부리는 극단주의가 미국을 휩쓸지 않게 하려면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줘야 한다고 주장해 자신의 정책 선회를 정당화했다. “미국 민주주의 제도를 건실하게 유지하는 것은 일 없이 노는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주려는 우리 정부의 확고한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해 2, 케인스는 루스벨트에게 사적인 서한을 보냈다. 그는 루스벨트 불황이 찾아온 이유로 미래 수요를 과다하게 추정하는 낙관론의 유로탓도 있다고 보았고, “지금까지 나온 정책 중 최상의 경기 회복 지원책인 주택 건설에 집중할 것을 권고하면서 루스벨트를 고무했다. 그리고 기업인들이 혼란스러운 상태로 황당해하며 실제로 겁을 먹고 있으니?” 그들을 적대시하는 언사는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나라가 떠안은 무거운 짐을 시장을 통해 풀어야 하는데 기업인들을 거칠고 완강하게 겁주는 분위기로 몰아가면….그 짐을 시장으로 나를 수 없습니다.”

전쟁과 평화
1930년대 말을 향해 갈수록 독일의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됨에 따라 루스벨트는 케인스의 처방대로 지출을 대폭적으로 늘리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히틀러는 19331월 권력을 장악하고 베르사유 조약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대대적인 재무장에 돌입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대량 실업에 시달려 온 독일은 그 덕분에 1년 내에 완전 고용을 누리게 됐다. 독일의 재무장에 신경을 곤두세운 유럽 각국이 군비 확충에 나서는 바람에 미국 군수 산업이 득을 보는 상황도 연출됐다. 영국에서도 네빌 체임벌린 정부가 조용히 군비를 늘리기 시작했다. 영국의 실업률도 군비 확충과 더불어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독일에 선전 포고할 때까지는 여전히 기록적인 수준이었다. 그래도 미국의 고용 수준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할 때인 1941년까지는 루스벨트 불황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한편 영국에서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하이에크는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걸 새삼 느끼고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여전히 예전의 외국인이었고 국내에 있는 적국 출신자였다.전쟁을 도울 수는 없었지만 폭행당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면 아주 이상적인 생활을 누렸던 셈이다.”

케인스는 그때 56세의 나이라서 전시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에는 나이가 많았고 건강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체임벌린 정부의 눈 밖에 나 있으니 재무부의 환영을 받을 처지도 못되었다. 전기 작가 스키델스키가 설명하듯, “영국 정부가 보기에 케인스는 평범한 공무를 맡기자니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고, 그렇다고 재량권을 주고 일을 맡기자니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케인스는 가만히 앉아 일이 주어지기를 기다릴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런 요청도 없었지만 케인스는 전쟁 자금을 마련할 방도를 찾아 나섰다. 그는 1차 세계 대전 때처럼 물가 상승을 유발하는 해결책은 배격했고, 물자를 배급하는 방식은 좋지 않다고 봤다. 19404월 케인스는 전면적인 배급을 실시해 소비자 선택을 묵살하는 것은 종종 볼셰비즘이라 불리는 폭력적인 방식의 전형적 산물이라고 썼다.

그 무렵 체임벌린 총리의 재무부 장관 존 사이먼은 자기도 모르게 모범적인 케인스주의자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세금을 올리지 않고 정부 차입으로 군비 확충 자금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둬들인 세금은 1700만 파운드에 그쳤던 반면, 국방비 지출은 6억 파운드로 늘어났다. 당시 영국 재무부는 실업률이 9퍼센트를 유지하는 한 물가 상승 위험은 별로 없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케인스의 생각은 달랐다. 거액의 군비 지출로 소요가 자극되는 데 더해 병력까지 징발되면 노동 인구 전부가 고용돼 막대한 총수요 증가를 부채질 할 거라고 본 것이다. 그러면 정부는 전쟁 수행에 긴요한 물자를 구하기 어려워질 뿐 아니라, 물자는 부족한데 너무 많은 돈이 풀리게 되니 물가가 크게 오를 상황이었다. 결국 1) 세금을 올리든가, 2) 세금을 올리지 않고 적자 지출을 감행해 물가 상승을 감수하든가, 아니면 3) (공급을 할당해 강제로 총수요를 통제하는) 배급 체제를 강행하든가, 아니면 이 세가지를 조합하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케인스가 설정한 문제였다.

케인스는 전쟁이 끝나고 강제 저축 계좌에 불입된 돈이 풀리게 되면 전비 지출이 끝나자마자 들이닥칠 경기 침체가 완화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이에크는 케인스의 제안을 기발한 착상이라고 묘사했고, 가격을 제거하면 불공정을 초래한다는 평소 소신에 따라 배급에 반대하는 케인스의 견해를 환영했다. 하지만 전후 경기 침체에 맞서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비자 지출이 급증하도록 기획한다는 생각을 안 좋게 본 하이에크는 지급이 연기된 저축을 주식에 투자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제산세를 부과해 마련한 세수로 일종의 거대 지주 회사를 설립하고 이 지주 회사의 주식으로 강제 저축 불입자들에게 상환 함으로써 전시 채무를 해결하자는 것이었다.

하이에크는 케인스가 제안한 계획을 쭉 검토하면서 케인스를 현존하는 경제학자 중 창의성이 가장 풍부한학자로 묘사했고, “케인스의 제안이…..현실적으로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인다.”라고 결론지었다. “그처럼 대대적인 지출 증가가 과연 경기 침체를 해결하는 현명한 방안일지는 미심쩍다라고 하면서도, 케인스가 자기편으로 돌아온 것을 환영한다는 말도 남겼다. “오랫동안 케인스와 좀 더 정통파적 경제학자들을 가르던 경계선이 사라졌다.” 하이에크는 나중에 전쟁 기간에는 케인스 편에 서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과 싸웠다. 왜냐하면 케인스가 물가 상승에 매우 적극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회고 했다.

1940
LSE는 독일의 대공습을 피해 런던을 떠나 케임브리지의 피터하우스 칼리지로 장소를 옮겼다. 이곳에서 케인스를 거세게 비판했던 하이에크와 피구가 수업을 분담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이에크에게는 케임브리지 피난이 영국 생활에 완벽하게 동화하는 계기가 됐다. “전쟁이 한창인 때에 케임브리지에서의 생활은 특히나 안락하고 편안했다.”라고 하이에크는 회고했다. “영국이란 나라의 전반적 분위기와 지적 환경이 순식간에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전적으로 영국인들을 응원하며 전쟁의 시간들을 보냈기에 영국을 내 나라처럼 편안하게 느끼는 정서적 동화가 더욱 빠르기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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