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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의 활약으로 인해 하이에크가 느낀 절망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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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12. 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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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크의 불발탄
왜 하이에크는 『일반이론』에서 자신이 논리적 오류라고 판단한 내용에 즉각적으로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을까? 『일반이론』이 출간된 시점에 반론을 제기하고 나섰다면 이제 막 싹을 틔우려던 케인스 혁명을 잠재웠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이에크는 그렇게 하지 않은 사연을 죽을 때까지 시원하게 답변한 적이 없었다. 그로부터 근 40년이 지난 뒤에야 오늘에 이르기까지 명백히 응했어야 할 의무를 회피했다는 감정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털어놨을 뿐이다.

케인스는 하이에크의 비판을 청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을 노리는 적수가 책이 출판될 시점에 비판을 제기할 수 있도록 출판 전에 미리 하이에크에게 여러 부의 견본을 보내 주기까지 했다. 홍보 능력을 타고난 케인스는 논쟁을 끌어들이는 것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하이에크와 후끈한 논쟁이 붙는다면 책이 더 잘 팔릴 게 뻔했다.

케인스의 야심은 논쟁에서 적수들을 이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의 입지 자체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일반이론』이 세상에 나오자 열광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지만, 그 물결에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잠기는 정도로는 케인스의 뜻을 이루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케인스는 책 곳곳에서 하이에크와 그 동료들을 지목하며 입장을 방어해 보라고 공격했지만 논쟁의 장으로 당연히 나오리라 여겼던 하이에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하이에크는 케인스가 경제학을 위험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줄곧 싸움에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하이에크는
『일반이론』을 충분히 검토하는 대로 케인스가 주관하는 <이코노믹 저널>에 자신의 논평을 기고할 지면을 요청하겠다고 케인스에게 알렸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의문점이 계속 유효하다면 몇 가지 논점에 대해 원고를 작성해 <이코노믹 저널>에 실어 주십사 부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원고는 영원히 나오지 않았다. 남은 평생 하이에크는 『일반이론』이 출간되고 나서 왜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는지 설명해 달라는 압박을 두고두고 받았지만 한 번도 신빙성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반격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화폐론』이 출간된 뒤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분석을 마치기도 전에 케인스가 또다시 생각을 바꿀까 봐 염려됐기 때문이라는 하이에크의 답변은 좀처럼 믿기 어렵다.

『일반이론』에서 경제의 작동 방식을 설명하는 관점은 미시경제가 아니라 거시경제에서 본 것이었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하기 어려웠다는 것으로, 하이에크는 이 문제를 그때는 희미하게만 느꼈다.”라고 인정했다. 자신이 제기할 반론은 경제학을 밑에서 위로 올라가며 이해하는 상향식 접근이었던 반면, 케인스는 경제학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이해하는 하향식 접근이었기 때문에 반대 의견을 적절히 표현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하이에크의 신조는 경제의 작동은 오로지 수많은 개인의 선택을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만 설명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개인의 선택이 모여 경제 전체를 이룬다는 것이었다. 물론 케인스가 사과를 얘기하는데 하이에크는 오렌지를 얘기하는 상황이었다면 『일반이론』의 제반 가정을 반박하는 데 큰 장애가 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이에크의 능력을 넘어설 정도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기에, 이러한 설명도 표적을 정확히 겨누지 못한 것에 대한 빈약한 변명으로 보인다.

세월이 더 흐르자 하이에크가 케인스에 맞서지 않은 것을 두고 단지 태만의 문제가 아니라 비난받아야 할 행동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 말인즉, 하이에크가 제대로 개입했다면 고전파 경제학자들이 보기에 파괴적인 경제 정책을 수도 없이 쏟아 낸 케인스의 이론을 완전히 중단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기세를 누를 수는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한편 하이에크는 LSE 록펠러연구자금위원회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앞으로 18개월 안에 연구를 마쳐 자본 이론에 관한 꽤 두툼한 책을 낼 생각이라며 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재 4분의 1정도 완료한 상태인데, 이 책이 온전히 완성되려면 실력 있는 사학자의 지속적인 지원이 절실합니다. 내가 개발해 온 정교한 그래프 도구를 매우 정확하게 산출할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부록에 국한할 생각이지만 불행히도 꼭 필요한) 분석적인 설명도 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능력을 갖추고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 구사도 가능한 수학자가 1934-1935년에 하이에크를 지원하도록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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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크를 떠나 케인스에게로
케인스의 『일반이론』을 둘러싼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하이에크의 강연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앨런 에번스타인이 하이에크 전기에서 밝혔듯이 케인스가 『일반이론』을 출간한 뒤로….하이에크는 전문 경제학자로서는 거의 잊히게 됐다……193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무시당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지만, 그 무렵 하이에크는 그보다 더 심한 최악의 상태를 겪게 된다. 하이에크의 LSE 세미나를 수강하는 사람들의 태도마저 변하게 됐기 때문이다. 한때는 수강생들이 하이에크의 명성을 존중했고 권위가 배어나는 그의 발언을 경외의 대상으로 여겼다. 하지만 하이에크를 가까이 보는 것이 일상화 되면서 그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가 싹텄고, 그의 화려한 적수 케인스가 급속한 상승세를 타면서는 그러한 태도가 경멸감으로 번지기도 했다. 케인스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경제학도들은 하이에크를 화석처럼 고루하고 마치 지구가 평평하다고 우기는 사람처럼 취급했다.

『일반이론』의 대항마가 되지 못한 『순수자본이론』
가까운 동료와 절친한 친구가 떼를 지어 케인스 쪽으로 빠르게 전향하는 일이 계속 생기니, 하이에크가 자신감을 갖고 『순수자본이론』을 마무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406월 저술을 마무리하고 이듬해 책이 출간됐지만 둔탁한 반향만 일었다. 시의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내용에, 독일어식 문장과 산문체로 인해 읽기가 더욱 어려웠다. 새뮤얼슨은 하이에크의 『순수자본이론』이 사산아로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다. 분명 경제학이란 연못으로 날아간 조역돌인데 전혀 물결이 일지 않았다.”라고 평했다.

하이에크는 『순수자본이론』의 서문에서 자신에게도 책의 주제가 무겁게 다가왔음을 인정한다. 그는 심히 저어하는 마음으로 저술을 시작했으며, 케인스를 비롯한 사람들이 추상적인 이론에 지쳐 현실 세계에서 경제 논리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눈을 돌리려는 심정을 이해한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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