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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상 파괴의 유무를 놓고 논쟁한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8. 2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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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상 파괴에 가장 앞장섰던 황제는 바로 레오3세였다. 726년 레오3세는 비잔틴제국 세계의 성화상을 몽땅 뒤엎는 투쟁을 개시했다. 그 결과 로마제국에 소위 성화상 파괴 논쟁’ (Iconoclast Controversy)100년간 휘몰아쳤다. 키칭거는(E. Kitzinger)는 이 현상이 레오 3세의 공권력 행사에 대해 사람들이 폭발한 것일 뿐, 갈등은 계속 있어왔다.”라고 평가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구약성서의 하나님 앞에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았다. 당연히 그들의 눈에는 그레코-로만 세계의 모든 성화상이 우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사실 200년에 이르러서야 그리스도교 미술이 나타났고, 4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교회 내부가 그리스도교 미술품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4세기 후반에는 그리스도인 미술가들이 그리스도교 작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는 운동을 시작했다. 물론 이와 함께 이런 것을 반대하는 조류도 동반해 발전했다.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는 언젠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누이동생 콘스탄티아가 제기한 질문, 곧 그리스도의 형상에 관한 질문을 받고 당황하여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른 어떤 인위적인 형상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그분의 역사적 형상만 그대로 지니고 있으면 됩니다. 그것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굴욕을 당하셨으나, 그분이 지니신 신적인 영광이 압도하여 이를 덮었고, 그분의 인성이 신성과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광을 생명이 없는 색채로 채색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다가올 영광의 날에 그분을 만날 순간을 고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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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후반에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 속에 아주 심오하게 승격되고 수용되었기에 그의 인성을 단순한 인성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파악할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고, 생각해낼 수도 없고, 서술할 수도 없는 그분의 모습을 설령 모세가 본다 한들 제대로 채색해낼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6세기에 이르러서는 시리아의 단성론 교회 안에 겨우 몇몇 성화상만 남아 있었다.

서방에서는 교황 그레고리오 1(604년 사망)가 성화를 찢어 철거한 세레누스 주교를 꾸짖는 일이 있었다., 성화가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진수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은둔 수도사가 성화를 철거해달라고 요구하자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나는 하나님처럼 경배하려고 우리 구세주의 성화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드님이 사랑의 구세주이시기에 그분의 따뜻한 사랑을 늘 마음속에 되새기려고 성화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화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출생과 면류관을 그린 그림을 통하여 기억 속에 등장하시는 그분을 예배하려는 것입니다

동방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교육용이든 회상용이든 상관 없이 성화상에 대한 태도가 서방과는 달라졌다. 아마도 불안정한 시대적 상황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에서 성화상을 통해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쉽고도 구체적으로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일반 교인들은 성화상을 어떻게 바라 보았을까? 일반 교인들의 성상에 대한 열정이 너무도 크다 보니 카물리아나에서는 지난날 야만족들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교회와 마을을 재건하는 기금을 모으려고 가장 존경받던 그리스도 상을 앞세우고 행진하기도 했다. 성상에 관계된 일화들은 많다. 성상을 험하게 다뤘더니 피가 흘러내렸다든지, 마른 샘에 성상을 내렸더니 물이 솟았다든지, 성상에 발라둔 기름이나 이슬을 상처에 발랐더니 나았다든지 하는 등의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온다.

레오3세의 성화상 파괴
그렇다면 레오 3세는 왜 성화상 파괴에 앞장섰던 것일까? 늘 그래 왔듯이 승자는 패자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당대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한다. 몇 가지 제기되는 동기 중 하나는 레오 3세가 북부 시리아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곳에는 종교적 형상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야곱파 단성론이 강해 친제국적인 칼케돈주의가 빛을 보지 못했다.

다른 동기로는 무슬림들의 영향을 꼽을 수 있다. 북부 시리아는 무슬림의 지배를 받았는데, 레오 3세는 셈족 출신으로 시리아어와 아랍어를 모두 구사했다. 723-4년에 유대인들의 강권에 따른 것이라고 보이지만, 무슬림 칼리프 야지드가 그리스도교의 성화상뿐만 아니라 생존 인물들을 묘사한 모든 성물을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무슬림과 교분이 있었던 레오3세가 이러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있었다)

성화상 파괴를 가장 강력하게 반대한 사람은 다마스쿠스의 요한 주교였다. 그의 주장은 아래와 같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잘못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인간과 함께 사시고 육신의 온갖 성품과 체질과 모양과 색깔 전부를 취하신 성육신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은 전혀 잘못일 수 없다.” 그는 그리스도만 화폭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모든 영적인 존재를 다 담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형상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안에도 그가 지으신 세계의 형상이 담겨 있으며, 세계와 인간 자체도 하나님의 형상이다. 물질로 만든 그 무언가의 형상을 숭배하면 안 된다고 하는 주장은 자칫 만물을 악으로 보는 마니교 사상에 빠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 십자가, 예전에 쓰는 모든 성물, 이 모든 것은 물질로 되어 있지만 우리의 존경과 숭배의 대상이 된다. 물론 성격을 잘 구분해야 한다. 엄밀히 말해서 경배는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 그러나 숭배는 특별한 위엄과 존귀함을 지닌 모든 사람과 물건에 드릴 수 있다. 이러한 것들 중 성화상은 신앙의 진실을 일꺠워주고, 그리스도인들이 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준다.”

성화상 반대 논리

성화상 찬성 논리

그리스도는 두 본성에서 나온 한 프로소폰 혹은 한 인격이다. 그리스도의 올바른 형상은 원형과 동일 본질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인성과 신성이 나뉠 수 없이 결합된 한 프로소폰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단지 그의 인성만을 표출한다면, 그것은 그가 지닌 신성을 단절하고 거짓된 형상을 표출하는 것에 불과하다. 신성과 인성을 지닌 분을 형상으로 만드는 일은 신성을 제한하고 우회적으로 그리며, 해서는 안 될 그 무엇으로 축소시키는 꼴이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그림으로 그려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유일한 참 형상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자신 뿐이며 참된 형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찬만이 유일한 참 형상이다.

(
콘스탄티누스 5)

그리스도를 형상으로 만들면서 그것은 오로지 그의 육신의 모습을 담았을 뿐이라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육신을 하나님의 말씀과 분리시키는 네스토리우스의 오류를 반복하는 자이다. 성화상 파괴를 찬성하는 주교들은 오리게네스와 카이사레아 에우세비우스의 신학 냄새가 베어나는 논지를 결의문 속에 담아내었다.그 육신은 하나님의 말씀의 육신이기에 어떤 분리도 없으며, 신성에 의해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졌고, 온전히 신성을 지니셨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이제 와서 분리되고 상호 떨어져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지닌 인간적인 영혼도 아들의 하나님 되심과 무력한 육신 되심을 중재하고 있지 않는가?....그리스도의 신성은 자발적인 수난에서 몸이 영혼과 분리되는 순간에도 나누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누가 바보처럼 육신과 신성을 분리하려고 하며,억지로 분리시킨 모습을 단순한 인간의 형상이며 그려낼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를 형상으로 표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 순수한 이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가현론자들에게 기울어 있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인성이 오래전에 이미 신성에 흡수되었다고 믿는 단성론파에 동조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를 그리는 것은 그의 휘포스타시스를 그리는 것이지 그의 신성이나 인성을 따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예수 개인이 지니고 있는 특성은 그의 휘포스타시스에 담겨 있고, 당연히 형상화될 수 있다. 어느 한 사람을 여러 모양으로 설명할 수 있듯이 모든 인격체는 다 그렇게 할 수 있다. 부활 이후에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제자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시고, 부활 전에는 물위를 걸으시고, 이런 것들이 신성안에 사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이긴 하지만, 그의 인간적 모습을 당연히 다양하게 설명하고 그릴 수 있다. 형상(Image)과 원형(Prototype)은 본질상 다르지만 비슷함을 공유하고 이름도 공유한다. 존경의 대상은 구성된 물질 재료가 아니라 형상 속에 담겨 있는 원형과 유사한 모습이다. 성자들의 경우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으로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랑, 유품, 상징이기 때문에 존경하는 것이다.


저자의 결론
예술적 견지에서 보면, 성화상 파괴는 진보사상을 억누르고 수많은 고대 보물을 없앤 주범이다. 서방까지 성화상 파괴가 교회의 공식 교리로 채택되었더라면, 서방은 그동안 쌓아놓은 수많은 조각 성상들을 소실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적으로 엄청난 빈궁함의 실상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화상 파괴 정책이 끝나고, 비잔틴 예술이 다시 일어나면서 서방에 강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 예컨대 기하학적인 문물이며 동물의 모형을 그린 게르만 예술의 상속자가 되었다.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수도사들이 황권과 교권이 휘두르는 무한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결연하게 성화상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기에 이들이 평신도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하고 그 위상도 높아졌다. 원형이 담고 있는 영적 능력을 그대로 표출한 성화상들로 가득 채운 수도원 성당이 바야흐로 신성과 인성을 진실로 중재하는 대표적 장소가 된 것이다. 수도사들이 세상에서 거룩한 사람 됨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신학적으로 보면, 논쟁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회복시키자는 시도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전적으로 표출해보려고 노력한 안타오키아 학파의 그리스도론이 일방적으로 과장된 키릴 루스의 그리스도론에 묻힌 나머지 단성론과 단의론에 빠져들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일부 황제들의 성화상 파괴 정책은 하나님을 오직 지적으로 이해 가능한 추상적 존재로 보게 하거나, 그리스도의 인성이 지니는 중요성을 단지 20-30여 년 동안 우리와 함께 사신 그의 지상생활 영역으로 축소하는 경향을 띠게 했다. 그러나 성화상을 옹호하는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지니는 영구한 중요성을 지켜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며, 승천하셔서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경우에도 항상 참 인성을 지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요 인간이신 예수는 과거에도 지금도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그의 성육신을 참되게 묘사하고 그의 신적이고 인간적 원형을 표출해보려는 그리스도의 형상은 바로 그런 사실을 영원히 기억하도록 돕는 역할을 담당한다.



 


[1] 그런데 에우세비우스의 견해의 배경에는 교부 오리게네스의 그리스도론이 자리하고 있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의 유일무이한 역사적 사건은 지나가는 사건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그의 역사적 성육신도 하나님의 말씀이 발하는 계시의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심지어 그리스도의 지상생활도 그의 본래의 모습대로 묘사될 수 없으며, 묘사한다고 해도 육신의 소유자에게 적용되는 형상일 터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부적절한 형상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부활하신 이후에 그리스도의 몸은 신성 속으로 들어가시기에 이전의 몸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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