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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 목회와신학에 올라온 김세윤 교수의 톰라이트 신학 비평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12. 7.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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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목회와 신학』(Ministry and Theology) no. 378에 김세윤 교수의 글이 올라왔다. 김세윤 교수는 톰라이트의 『바울』 평전을 읽고 그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약점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개인적으로 김세윤 교수는 글을 감동적이고, 재미있게 쓰는 능력이 떨어진다. 재미없고 따분하다는 소리다. (물론 한국 역사상 바울 신학을 전공했던 사람들 중 가장 성공했고, 탁월한 사람으로 인정받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가 감동적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재미있는 글을 쓰는 능력이 ‘마이클 버드’, ‘바트어만’이나 다른 신학자들에 비해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날카롭고, 설득력이 있다. 김세윤 교수의 비판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2018년에 출시된 김세윤 교수의 저작, 두란노서원이 번역했다.

 

김세윤 교수의 톰라이트 신학 비판

1. 톰라이트는 칭의를 신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음 후 그분의 나라로 이전됨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롬 1: 3-4; 고전 15: 23-27; 골 1: 13-14) 왜냐하면 톰라이트는 아브라함, 그의 씨를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언약 목적의 성취 도식의 성취에 집중하기 때문이다(창 12:2-3; 18: 18-19; 22:18). 라이트는 예수의 메시아직을 해당 도식에서만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예수의 왕적 통치라는 범주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의 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왕적 통치라는 메시지는 구체성이 전혀 없는, 단지 추상적인 구호로만 남게 된다.

2. 그런데 칭의를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라이트의 접근 방식은 (하나님 나라 또는 그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로 이전하는 것으로 해석하지 않고 오직 아브라함의 가족 구성원 되기의 범주로 해석하는 것) 그가 근래 열정적으로 설파하는 바울 복음의 반제국적(Counter-imperial) 메시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3. 라이트는 바울이 예수가 다윗적 ‘메시아-왕’, ‘하나님의 아들’이며 만유의 ‘주’라고 선포하며 그가 ‘의’와 ‘평화’를 주신다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같은 칭호들로 자신을 참칭하면서 온 세상에 ‘의’와 ‘평화’와 ‘구원’을 가져왔다고 선전하는 로마의 황제에 대항한 것이라고 본다. 이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거짓 ‘주’ 가이사와 그의 거짓 ‘복음’을 신뢰하며 그에게 충성하는 것을 그만두고 참 ‘주’이신 예수와 그의 참된 ‘복음’을 믿고 그에게 순종하여 참 ‘구원’을 얻게 하려 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라이트는 그의 대작 <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에서 이 같은 주장을 수없이 되풀이 하는데, 정작 그 책 어디에서도 메시아/주 예수의 통치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떻게 로마 제국이 온 세상에 베푼다고 선전하던 ‘정의’와 ‘화평’ 그리고 ‘구원’보다 더 월등한 진짜 구원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다.

4. 라이트는 예수의 메시아직을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 그리고 칭의를 아브라함의 가족 되기로 해석하는 데 집중하면서 칭의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의 회복으로 해석하는 것을 등한 시 하는 것은 당연히 의로운 생활을 위한 바울의 윤리적 권면들을 그의 칭의론과 연결시키지 못하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5. 라이트는 바울의 윤리를 세례 때 칭의의 선취를 받은 신자들이 종말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칭의의 완성을 얻기 위해 칭의의 현재적 단계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현재적 왕적 통치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자신의 영을(롬 8:9-10, 고후 3: 14-18) 통해 신자로 하여금 자신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순종할 능력을 주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신자는 그러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믿음의 순종을 해 성령의 열매(갈 5: 22-23), 즉 의의 열매를(빌 1: 11) 맺게 되는 것인지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라이트는 성령의 사역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긴밀하게 연결시켜 설명하지 못한다.

6. 라이트는 그의 책 『바울 평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라이트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성을 그토록 강조하고, 자신의 사도직을 ‘내게 주신 은혜’라고 버릇처럼 부르는(참조, 롬 12: 3, 15: 15; 고전 3: 10; 갈 2:9; 엡 3:2, 7, 8) ‘은혜의 사도요 신학자인 바울’의 전기를 ‘은혜’에 대한 성찰 없이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7. 바울의 윤리가 그의 칭의의 복음에서 기원하기에 그것과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히지 못하고, 칭의의 현재적 과정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덧입어 이루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에 라이트는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리라는 바울의 가르침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한 그 은혜의 통치와 전혀 연결시키지 않고 설명한다. 그래서 그가 세례 때 받는 칭의의 첫 열매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지지만, 최후의 심판 때 칭의의 완성은 다만 우리의 선한 행위로 받는다고 이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8. 라이트는 1996년에 출판한 그의 책 Jesus: The Victory of God (예수: 하나님의 승리)에서 예수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로마에 항전을 꿈꾸던 이들과 비판적 거리두기를 했다고 썼다. 그러나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의 리처드 허슬리(Richard Horsley) 등 소수의 학자들이 전개해 온 바울 신학에 대한 반제국적(anti-imperial, counter-imperial) 해석 운동에 합류해 그 운동이 당시 미국에서 네오-콘(Neo-Con) 이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지 부시 정권의 다분히 패권적이고 신제국적이기까지 한 정치를 배경으로 많은 지지자를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해석학들에 있어 바울의 로마서 13장은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로마서13장에서 로마정부에 순종할 것을 권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반제국적 해석가에게 있어 로마서 13장은 아킬레스건이다. 그러기에 라이트도 그 곳의 의미를 축소하고 변명하려 애를 많이 쓰지만, 설득력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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