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칼 바르트 신학 해설, 위대한 열정 정리) 1-2 가리키는 손

신학서적

by noruboy 2021. 2. 1. 02:00

본문

지은이: 에버하르트 부쉬
역자: 박성규
출판사: 새물결 플러스 

가리키는 손
바르트의 신학 여정의 초기부터 그의 책상 앞에 걸려 있었던 그뤼네발트의 십자가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서 요한의 손은 낮아지신 하나님의 아들을 거의 불가능한 방식으로” –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가리키고 있다. “이 손은 바로 성서에 기록된 손이다.” 이 손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어떤 사상이나 프로그램을 의미하지도 않으며 전적으로 인간을 향해 오시는 하나님을 향해 있다. 바르트의 인식에 따르면 모든 올바른 신학은 그 손을 본받아야 하며, 어쨌든 바르트 자신의 신학은 그 손을 닮고자 한다.

바로 그렇게 가리키는 일을 결단코 행하는 것, 그 무엇보다도 바로 그 한가지 일을 항상 또 다시 행하는 것이 자가당착에 빠져 있던바르트가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르트는 신학자로서의 긴 여정에서 그렇게도 자주 새로운 시작을 감행하고 빈번하게 방향을 전환했다. 그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바로 그 가리키는 손의 임무수행을 끊임없이 새롭게 시험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바르트의 신학 여정에서 매우 자주 일어났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일관성 있게 관철된 상수가 있었던 것도 그가 위의 그림에서 요한이 가리켰던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로 회심한 순간에 관하여 바르트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와 나의 개인적 그리스도교는 내가 선포하는 케리그마에 속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르트는 왜 신학을 공부했는가? 바르트가 짧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바로 그 스핑크스와 직면하는 호기심때문이다.

그러나 25세의 나이로 신학적으로는 아직 철저한 자유주의자였던 바르트가 아르가우 주에 있는 자펜빌(Safenwil) 지역의 목사가 되었을 때, 이미 그의 메시지는 그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목사이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 말해야만 하기 때문에 나는 목사다.”

한편 젊은 본회퍼는 이제 막 대학교수가 된 바르트의 세미나에 처음으로 참석한 후에, 바르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바르트는 자신의 저서들보다 더 깊고 높은 곳에 서있다.” “그곳은 반대 의견에 대해 열려 있고 준비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런 의견도 중심 내용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제를 향한 집중력과 격렬한 충동도 있었는데, 그것을 향해 사람들은 자부심 있게 또는 겸손하게, 당당하게 또는 매우 불확실하게 각각 의견을 말할 수 있었으며, 확실한 것은 그 모든 것이 바르트 신학에 우선적으로 봉사하도록 결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75
세의 나이가 되어 바르트는 위대한 열정에 대한 글을 썼다.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은 그런 열정에 충만하고 추진되고 인도되고 사로잡히게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내면에서는 바로 그런 열정의 불이 타올랐다. 그 불길이 타오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공허한 개념이 아니라 완전히 살아 움직이는 현실성, 곧 모든 것을 결정짓는 순수한 현실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 단어는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를 지탱하는 힘이고 무한히 중요한 개념이며, 그 중요성은 우리가 추가한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노는 감정이 아니라, 진지하게 여겨야 할 사실성이다.

1914
년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이 계신다라는 짧은 문장은 혁명을 뜻한다. 왜냐하면 그 짧은 문장은 우리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사고 방식과 계속해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1933년에 유대인 신학자 쉐프스(H.J. Schoeps)는 바르트 신학이 특별하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그의 신학이 하나님에 관한 인간적인 진술에 담긴 위험을 직감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었다. 그 위험 때문에 우리는 진리를 바르게 표명하려는 매 순간마다 두려움 앞에서 떨어야 한다.


하나님 앞이라는 자기 자리를 떠나게 되는 것은 신학이 어떻게 그 자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간과하거나 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 자리에 서려는 우리의 자의적인 결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 앞에 서시고, 스스로를 인간 앞에 소개하시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