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칼 바르트 신학 해설, 위대한 열정 정리) 1-3 날림공사는 이제 그만!

신학서적

by noruboy 2021. 2. 2. 01:41

본문

지은이: 에버하르트 부쉬
역자: 박성규
출판사: 새물결 플러스

 

 

날림공사는 이제 그만!
신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이래로 바르트는 줄곧 교회 및 신학과 싸워왔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와 신학이 현실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그 앞에 머무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단지 하나님만을 다루려고만 시도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교회와 신학이 앞에서 말한 사고의 역전을 실행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 관해 말하고 있다고 보았다. 바르트가 투쟁했던 교회와 신학은 우리 인간이 미리 앞서 제시하고 명문화한 사상들과 목표를 이해 하나님을 끌어들이거나, 또는 하나님을 교회와 교회적 신학의 손 안에서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자본금처럼 다루는 것으로 보였다. 바르트는 앞서 언급한 탄식과 더듬거림과는 한없이 거리가 먼 어떤 확신 및 쾌활함과 투쟁했다.

바르트는 이미 신학 여정의 초기부터 거짓 예언자를 그와 같은 의미에서 대적했다. “거짓 예언자란 하나님께 옳게 보이려고 하기보다 사람들에게 옳게 보이려고 한 목사였다.

교회를 공격해 들어오는 그 어떤 무신론도 교회의 담장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반역만큼 교회를 위협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바르트는 언제나 강조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아무리 화려하게 사용되었다고 해도 공허한 개념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신론보다 더 나쁜 일인데, 왜냐하면 여기서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에서 바로 하나님이 비워지기 때문이다. 거기서 하나님에 관하여 말하는 것은 실상은 어느 정도 더 큰 목소리로 인간에 관하여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상황에서 이미 현존하는, 잘못된, 나아가 하나님 없이 사유된 현실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더해지는 것이라고는 주어진 현실 자체를 과도하게 높이고 강화하는 것 외에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한편 바르트는 1934년 파리에서 연극을 관람하고서 이렇게 썼다. “나는 다시 한 번 옛 물음을 떠올렸다. 왜 교회는 노래하고 연기하고 춤추는 세상의 자녀들만큼만이라도 자기 일을 잘하려고 하지 않고, 최소한 그런 의지라도 드러내지 않는 것일까?”

엄밀히 말하면 건강을 위협하는 미아스마 병균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기 위해 하수구를 퍼내는 노동자는 사회에 매우 유익한 일원이다.” 반면에 그는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교리로 사람들의 머리를 흐릿하게 만들려고 시도하는 신학자는 극단적으로 해로운 존재다라고 말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학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따르는 대신에, 어떤 지점에서 하나님을 옆으로 제쳐주거나 혹은 뒤로 미뤄두고서 어떤 다른 과제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신학은 정말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이 사치스러운 일에 몰두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 인간, 세계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에 대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사색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 신실하게 봉사하지 않는다면, 그때도 신학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1920년대 이후로 바르트에게 가해졌던 많은 비판의 대부분은 다양하게 변주되기는 하지만 핵심에서는 하나의 의의제기로 압축될 수 있다. 즉 바르트가 지시했던 바로 그것이 정작 바르트 자신의 신학에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일면적으로만 진지하게 여김으로써, 정작 바르트는 수용하는 자들즉 인간, 역사, 현대성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현실을 소홀히 하거나 억압했으며, 그래서 바로 그 수용자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라는 방법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