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단성론자들과의 화해를 모색하기 위해 나온 단의지론/단활동론에 대하여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8. 22. 03:28

본문

단의지론으로 단성론자들과의 화해를 모색한 소프로니우스

 

헤라클리우스의 통치(610~641)
610년에 아프리카 총독의 아들인 헤라클리우스가 카르타고로부터 배를 타고 와서 전에 마우리키우스 황제와 그 가족을 살해하고 권좌에 올라 무법적으로 통치하던 찬탈자 포카스를 밀어냈다. 당시 로마제국은 파탄에 빠져 있었고, 백성의 도덕은 문란의 극치였으며, 국고는 고갈되었고, 군과 행정은 뒤죽박죽 상태였다.

게다가 동서의 국경지대는 이민족들로부터 침탈당하고 있었다. 황권을 잡은 헤라클리우스는 이러한 난국을 타계하기 위해 비교적 안전이 보장된다고 생각한 북아프리카 카르타고로 수도를 옮길 계획을 세웠다. 이에 대해 콘스탄티노플 시민들과 특히 총대주교 세르기우스의 반대가 거세지자 황제는 뜻을 접고 말았다.

당시에 동로마제국은 호스로 휘하의 사산조 페르시아와 전투를 벌였다. 제국 군대는 611년 안디옥에서 페르시아 군대에게 패배했다. 613년 페르시아 군대는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는 다마스커스를 점령하고, 북쪽으로는 남부 소아시아 지역인 타르수스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 황제와 세르기우스 총대주교는 힘을 모아 백성에게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완하는 멋진 파트너였다. 헤라클리우스가 상심에 빠지면 세르기우스가 희망을 불러일으켜주었고, 텅 빈 국고에 교회 소유의 재물을 기꺼이 전해주었다.

황제가 전선에 나가면,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에 남아 황제를 대행해 질서를 유지하고 적들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일에 앞장섰다. 황제에게 흩어져 싸우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묶어줄 신학적 근거가 필요할 때 세르기우스는 단활동론(Monoenergism), 단의론(Monothelitism) 같은 교리를 통해 황제를 도왔다.

한편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동로마는 아주 강하게 헬라화되었다. 라틴어 대신에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채택되었는데 한 세기가 지나자 심지어 지식인층에서도 라틴어를 아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따라서 그리스어를 쓰는 동방과 라틴어가 교회의 지식인층 언어이자 교회의 통용어로 쓰이던 서방 사이에 소통의 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논쟁
동남부 지역에 속하는 아르메니아, 시리아, 이집트가 다시 로마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자 황제는 그간 잠복해 있던 종교 문제, 곧 칼케돈 공의회의 노선을 따르는 소아시아, 이탈리아, 아프리카 교회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저항세력으로 밀려난 단성론자들과 화해를 모색하는 문제를 고심했다.

지난날 단성론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안디옥의 세베루스는 이미 그리스도의 한 본성(One Nature), 한 의지(One Will), 한 행위(One Activity)를 강조한 바 있었다. 세르기우스는 분명 칼케돈 공의회가 채택한 그리스도의 ‘’두 본성 안에(in two natures)”에 마음을 두고 있었으나, 그것을 그리스도의 한 행위이 주장과 화해시키는데 마음을 쏟았다.

세르기우스는 교황 레오의 진술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답했다. 그는 두 본성은 독자적으로 두 가지의 다른 규범으로서가 아니라 서로 공유를 전제하는 두 본성이라는 바탕에서 각각의 본성에 따른 방식대로그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다고 답했다. 키루스 주교 역시 단활동론 주장에 매혹되어 이후 이집트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이 교리를 전파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이 협의의 과정에서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시리아 교회가 단활동론을 수용함은 물론이고 이후에 변형되어 나타난 단의론까지도 받아들이도록 했다. 이 협상으로 인해 제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 논지에 대한 찬성자가 시리아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교부들의 주장
디오니시우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는 하나님의 일을, 사람으로서는 사람의 일을 하시지만,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의 합작품이다.”

키루스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양성이 연합을 이룬 이상 두 행위로 나누어 이야기할 수 없으며, 성육신한 분이 정신과 몸으로 말하고 행하신 모든 것은 연합된 하나의 행위라고 해야 한다.”

단성론파는 단활동론이 그리스도의 단성론을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 결정을 기꺼이 수용했다. 633년에 황제는 외세의 침략에서도 승리하고, 교회에서도 아르메니아, 시리아의 야곱파, 이집트의 콥트파 등 단성론 진영과도 화해를 성취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즈음 알렉산드라이에 한 수도사가 나타나 그간 통용되던 연합협정에 신학적으로 비정통적인 요소가 깔려 있다면서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의 이름은 예루살렘의 소프로니우스(Sophronius of Jerusalem)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행위가 단일 대행자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두 본성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그것이 신학적이든 인간적이든 그리스도의 모든 행위는 성육신한 말씀인 단일 대행자에게서 기인하며, 그의 활동을 숫자로 말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어 세르기우스는 모든 행위는 분열이나 혼동 없이 하나가 된 성육신한 말씀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가르치라고 했다. 숫자로 표현하여 한 활동을 말하면 그리스도의 한 휘포스타시스 안에 두 본성이 있음을 간과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두 활동을 말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의지가 서로 반대되는 두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염려에서였다.활동의 이중성을 부인하면 -> 본성이 혼합될 위험이 있음 -> 활동의 차이를 보고 본성의 다양성을 알게 됨.

교황은 세르기우스에게 서신을 보낼 때 한 활동자와 활동하는 두 본성이라고 말함이 적절할 것이라면서, 이 점을 예루살렘의 소프로 니우스와 알렉산드리아의 키루스에게도 전했다고 했다.

교황의 칙령인 엑테시스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으로서 오직 하나의 의지만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고백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어느 경우에도 성육신으로 하나가 된 말씀과 별개로, 또는 그와 분리하여, 또는 스스로의 충동으로 육신을 따라 의지를 행하신 적이 없고, 항상 하나님의 의지가 원하는 때와 방식과 범위에 따라 자연스럽게 행하셨다.”

->
논쟁의 방향이 하나의 행동에서 그 행동의 원천인 의지로 옮겨갔다.

그런데 로마와 서방 교회에 반대 의견이 대두되었다. 그들의 논리 대로라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리스도가 사용하기 위해 차용한 다루기 쉬운 도구로, 자체의 의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당시 비잔틴 신학의 선두주자였던 막시무스의 대응을 보자.


진실로 그리스도의 본성이 둘이라면, 본성이 발하는 활동도 당연히 둘이어야 한다. 활동은 실존하는 존재의 본질이다. 활동을 통해서만 본성은 구별되고 식별될 수 있다. 본성과 활동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떨어질 수 없다. 진실로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존재한다면, 반드시 두 활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의지를 모르고 있거나, 의지에 주저하거나, 의지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의 자연적 의지는 의심이나 갈등 없이 항상 완전한 선을 지향한다. 그리스도는 인간적이든 신적이든 항상 자연적 의지만을 지니고, 스스로 주권적인 자유를 가지고 적절한 선을 선택하신다. 그리스도가 가진 두 본성과 두 활동과 두 의지는 각각 신적 그리고 인간적 본성으로부터 나오지만 항상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나온다. 거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신성이 언제나 올바른 선택의 주인공 역할을 한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