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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의 씨앗이 된 칼케돈 공의회(451)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8. 17.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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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옮긴이: 이기영
출판사: 대한기독교서회 
책: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The First Seven Ecumenical Councils 325-787)

 

네스토리안 신학의 부활을 알린 칼케돈 공의회, 하지만 이로 인해 동서방 교회는 분열이 시작된다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공헌
교황 레오는 플라비아누스에게 서방 교회의 그리스도론을 요약한 교리서한(Tome)을 보냈다. 이 교리서한에서 교황은 자신이 키릴루스보다는 훨씬 덜 사변적임을 내보이며 토론이나 논증 대신에 사안을 명확히 판별해주고 난제들을 조정하여 해법을 찾는 내용을 담았다. 그는 매우 비상한 정확성과 열정으로 테르툴리아누스,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안티오키아 학파의 신학을 재생시켜 보냈다. 그리스도의 위격은 하나님 말씀의 위격과 동일하다는 것이 레오의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종의 모습으로 사람이 되신 분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지닌 바로 그분이시다.” 말씀이 동정녀로부터 몸을 취하셨음으로 온전하고 완벽한 참 인성을 품은 참 하나님이 나셨고, 그러므로 그에게 속한 것이 온전하듯이 우리에게 속한 것도 온전하다. “성육신이 자기비움을 동반하는 것은 겸비하심을 뜻하는 것이지, 그의 전지전능을 축소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신적 본성과 인간적 본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혼동 없이, 혼합 없이 한 위격 안에 존재한다. 그리스도라는 인격의 단일성 안에서 존재하는 두 본성은 각자의 고유한 본성을 견지하는데, 종의 형태를 띠었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형태를 축소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인각을 구속하시려고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에 필요한 대로 한 본성은 죽을 수 있고, 다른 본성으로는 죽을 수 없다.”

각 본성은 자기 나름의 원칙에 따라 작용하지만, 둘의 결합을 떠나 별개로 역사하는 것은 아니다. “각 본성은 상대방과의 일체감으로 아주 적절한 형태로 행동하며, 말씀은 말씀에 속한 일을, 육신은 육신에 속한 것을 이루어 낸다.” 이런 위격 상의 일치를 소위 속성의 교류라고 한다.

이것은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이 공존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자신을 낳아준 동정녀에게서 육신을 취하신 하늘 아들의 이름이고, ‘인자라는 이름은 하늘에서 강림한 땅의 아들의 이름이다. 이렇게 두 본성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신성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고 묻히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영원하신 존재요 동일한 본성을 지니셨으나, 동시에 인성의 나약한 본성도 함께 지니신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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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독립적 실제를 견지하는 데 일조하고,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키릴루스의 기본 주장인 성육신하신 분의 위격이 하나님의 말씀의 위격과 동일하다는 견해를 견지하는 데 공헌했다.

안디옥 학파

알렉산드리아 학파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독립적 실체 강조

성육신 하신 아들의 위격은 말씀의 위격과 같다 강조


칼케돈 신조 평가
역사학자 펠리칸(J. Pelikan)의 분석에 따르면, 인용의 대부분은 키릴루스 주교의 것이며, 결정적인 대목은 교황 레오의 교리 서한에서 나왔다고 한다. 주교들은 이러한 신조를 발표하면서 위격과 본성을 구별했고, 그리스도가 한 위격이요 두 본성임을 확실히 표명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본래 두 본성을 지니고 있고, 두 본성으로 삶을 산다는 것을 긍정하며 한 본성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를 배격했다.

그리고 아폴리나리우스의 구호인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한 한 본성이 본래 키릴루스와 그의 제자들이 생각해낸 것이라거나 아타나시우스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을 반대했다. 주교들은 두 본성의 결합이 혼합 없이 이루어졌음을 거부하거나 두 본성의 차이를 위태롭게 하는 위격적 결합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거부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가 두 인격으로 분열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어의 네 개의 부정 부사를 사용해 혼동 없이, 변화 없이, 분할 없이, 분리 없이 두 본성이 신비스럽게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결합됨을 선언했다.

하지만! 칼케돈 신조가 실제로 키릴루스 추종자들의 관심사를 전부 정당화해주지는 못했다. 말하자면 두 본성의 차이가 한 결합 속에서 유지된다는 말속에는 그리스도의 인간적 속성은 단지 인간의 품성에 국한되고, 신적인 속성은 신성에만 국한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성의 불변성과 무손상을 말하려는 혼동 없이, 변화 없이라는 표현도 결국 인간의 구원이라는 것이 사실 본래의 인성이 신성으로 변화되는 삶의 모습에 본질이 있다고 본다면,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구원의 과정을 시작한다는 입장에 대한 공격으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의회가 동일한이라는 형용사를 여덟 번이나 써가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위격적 일치를 말했지만, 본성의 일치에 관해서는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표출하지 못했다. 두 본성이 한 위격 안에 결합되었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펠리칸의 지적처럼 인간의 신격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아주 은밀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한 인격체로 결합되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표현하지도 못했다.

공의회의 신조가 서방 교회에는 대체적으로 만족감을 주었으나, 동방 교회는 위격적 결합에 대한 문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문제, 인간의 인격화 등의 문제가 불분명하게 표현되었다고 보았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론에 있어서 칼케돈 공의회보다 키릴루스의 교리가 훨씬 더 명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제 본격적으로 새로운 논쟁이 시작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편 이런 분위기 속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아시아, 폰투스, 트라키아에서 대주교에 대한 임명권을 행사해온 오랜 관행을 정식으로 인준했음을 알렸다. 이는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특권 부여가 아니고, 행정 치리를 원활하게 하려는 뜻이었다고 밝혔다.

동방 교회에 미친 영향
칼케돈 신조도 125년 전의 니케아 신조와 마찬가지로 논란을 종식한 것이 아니라 심화시켰다. 공의회가 끝나고 총대로 참석했던 수도사 테오도시우스는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자마자 키릴루스 신학의 대변자로 칭송받던 디오스쿠루스 총대주교에게 내려진 부당한 과정을 밝히려고 들었다. 그들이 칼케돈 공의회를 반대하는 이유는 에우티케스의 정죄 때문이 d니라 공의회가 키릴루스의 신학 내용을 통째로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칼케돈 공의회에 저항하는 세력들은 키릴루스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한 한 본성”, 곧 ‘단성론’자들이었다. 티모테우스 아릴루루스와 키릴루스의 신봉자들은 칼케돈 신조가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담고 있으며, 키릴루스 신학의 핵심 교리인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신한 한 본성부분을 빠뜨리고 있다는 점을 불만스러워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칼케돈 공의회가 그리스도를 두 인격체로 분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티모테우스 아릴루루스나 키릴루스의 신봉자들은 본성을 위격과 거의 동의어라고 파악한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휘포스타시스 없는 본성은 없으며, 프로소폰 없이 존재하는 휘포스타시스도 없다. 따라서 두 본성이 있다면 두 인격이 필요하고, 두 그리스도가 있다는 말이 된다.”

교황 레오가 그의 교리 서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한 본성으로는 죽으시고 다른 본성으로는 죽으실 수 없기에 두 본성이 서로 교류하며 각자의 본성에 걸맞게 일을 행한다. 말씀은 말씀에 속한 것을, 육신은 육신에 속한 것을 행한다. ‘나와 내 아버지는 하나이다내 아버지는 나보다 더 크시다는 말씀을 보면 똑 같은 본성에 속한 일만을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것을 들어 오히려 칼케돈 신조가 네스토리우스 교리로 기운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존재 분리를 말하는 것이기에 키릴루스 교리와 정반대이며, 동시에 분명히 네스토리우스와 같은 계열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키릴루스 신학을 중심으로 삼은 에페소 공의회가 금지시킨 것을 칼케돈 공의회가 나서서 니케아 신조에 후속으로 삽입한 점도 지적했다.

한편 시리아 지역은 본래 안디옥 학파 신학의 모태로서 키릴루스의 신학이 놀라울 정도로 탄탄대로를 걷고 있었다. 특히 수도사들이 신학 전파의 선두에 있었다. 일반인에게서도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강조가 뚜렷한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이제 단성론은 동방 그리스도교 전역에 걸쳐 상승세를 띠게 되었다. 결국 칼케돈 공의회 이후 33년만에 칼케돈 신조는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극렬하게 분열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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