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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리나리스ㆍ성령 훼방론자ㆍ아리우스 주의자들을 청산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8. 10. 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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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The First Seven Ecumenical Councils 327-787)
저자: Leo Donald Davies
옮긴이: 이기영


목차: 31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

아타나시우스는 처음부터 말씀이 육신을 입은 것은 인류를 구원하고 인간을 하나님처럼 만들려는 경세 때문이라는 확신에서 출발했다. 아버지는 본성상 선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본성상 항상 생성하신다. 아버지의 존재는 무언가가 첨가되지 않으면 완전에 이르지 못하는 불완전한 것이 아니고, 그의 아들의 생성의 본성도 사람이 부모에게서 생성되는 방식과는 달리, 아버지의 본성을 지닌 채 직접 인간 존재의 옷을 입으신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분리된 어느 한 부분적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비물질적이며 부분이 없는 전체이시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는 처음에는 니케아의 용어인 호모우시오스를 주목하지 않다가, 그 의미하는 바를 숙지하고는 가장 결연한 변호인이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 말씀이 같고 하나라는 말을 단순히 정신과 의지가 일치와 조화를 이룬다는 정도가 아니라 본질이 같고 동일하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적 본성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고, 말씀과 아버지가 공동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나누어질 수 없는 유일한 단지(monad)이다.

분명 새 신조는 표현이 애매모호한 니케아 공의회의 호모우시오스도 피하고, 이미 시르미움 선언에서 그 마각이 드러난 과격한 아리우스파가 말하는 아들이 아버지의 신성을 온전히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도 배격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런데 칼케돈 공의회 전에 있었던 애매한 표현들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생각에 따라 인용하기 쉬운 작품으로 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어떤 신조들은 다른 어떠한 사변적 신학이론보다 더 콘스탄티우스 2세의 목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시대에 작성된 니케아 신조가 제국의 안정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판단, 문제가 되지 않는 포괄적인 용어를 원했다. 그것이 바로 호모이오스였다. – 옮긴이 주)

한편 이교도 역사가 아미아누스(Ammianus)는 황제가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싸움이 얼마나 표독한지 아무리 적대적인 야수도 그들만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두 전투
삼위일체 논쟁이 지루하게 계속되자 교회는 두 분야에서 위험성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하나는 그리스도론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론이었다.

아폴로나리우스는 본래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의 핵심을 굳게 대변했으나, 그가 그리스도론을 전개하면서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아타나시우스는 ‘말씀-육신’이라는 그리스도론의 틀을 중심으로 담론을 전개할 때, 그리스도에게 있는 이성적인 마음의(mind) 위치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했다. 이에 비해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아들의 영혼이 인간 예수의 영혼을 대치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변화 가능한 피조물의 성분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330년에 니케아 신조를 두둔한다는 이유로 파면된 안티오키아의 주교 에우스타티우스와 다른 주교들은 로고스-인간의 그리스도론 틀을 내세워 인간 예수의 온전한 실재성을 강조했으나, 신인 일치가 무엇인지는 시원하게 해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을 파고들어 아폴리나리우스는 지적 능력을 힘껏 발휘하여 자신의 그리스도론을 전개한 것이다. 아폴로나리우스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인류가 구원받고 회복됨을 확고히 믿었다.

그는 새 삶은 단 하나의 원천, 곧 하나님과 우리를 중재하는 중보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만약 신성이 사람과 결합하는 경우에는 두 신분, 곧 하나님의 본성을 타고난 아들과 양자 된 아들이 가능하다. 따라서 구세주의 육신은 신성에 덧입혀진 그 무엇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성과 한 본성을 이룬 몸이다.

 

육신의 모든 움직임은 전혀 다른 원리의 움직임과 행위에 의존하여 이루어지고, 그 자체로서는 완결된 생명체가 아니요, 완결된 모습을 취하기 위해서 그 어떤 다른 것 속으로 들어가고 그것과 결합한다. 말하자면 하늘에 속한 다스림의 원리와 결합하고 피동적 육신과 움직임을 주도하는 능동적 신성이 합하여 하나의 생동하는 인격체가 된다.”라고 주장했다.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이성적 영혼인 인간적 마음을 거부했다. 아들은 변화할 수 있는 피조물로 축소될 수 없다. (아리우스와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은 아들의 존재가 결과적으로 완전한 신성의 하나님도, 완전한 피조물인 인간도 아닌 중간 존재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교차된다.)

그런데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에서 해결하기 힘든 점 한 가지를 찾아냈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구세주가 취하지 않은 것은 구속 받을 수 없다”. 전적인 아담이 타락했다면, 구세주는 전적인 아담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담의 전적인 본성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영혼은 가지고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인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마음이 없는 동물이 아니지 않는가? 신성이 인간 지성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무엇으로 온 인류와 접촉하시는가?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지성이 없는 영혼과 육신이라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아폴리나리우스에게 한 분이신 신인이 두 본성을 지녔다는 말은 어불성설이었다.그런데 아폴리나리스[1]는 인간적 마음은 죄에 물들기 쉽고 저주를 받기 때문에 신인이 인간적 마음을 소유하는 것을 거부했다.

성령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당시만 해도 성령이 누구인지에 대해 명확한 정의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후기 아리우스 주의자인 아에티우스와 에우노미우스는 성령을 아버지의 요청으로 아들이 만들어낸 최상의 피조물로 치부했다. 그들에게 성령은 다른 천사들보다는 지위가 높고 목양을 담당하는 천사일 뿐이며, 아버지나 아들과는 그 본질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들 그룹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어 활동한 듯 보이고, 360년 유사본질을 주장한다고 하여 아리우스 파에 의해 파문당한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마케도니우스의 추종자들로, 성령에 대항하여 싸운다 하여 성령훼발론자들이라고도 불렸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아버지와 아들의 본질이 동일하다고 믿었고, 일부는 아들이 본질상 혹은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동일하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신성은 아버지와 아들에만 해당하는 것이지,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 역시 성령이 성부-성자와 동일본질이며, 아들과 성령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동일하게 찬양을 받는 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교회의 통념을 존중하여 성령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진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아폴리나리우스/성령훼방론/아리우스 주의자들을 한꺼번에 배격했다는 점이다.

아타나시우스의 한계는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를 명쾌하게 구별하지 못한 점이다.그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사용해서 혼란을 자초했다. 하지만 바실리우스는 오랜 숙고 끝에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를 구별해냈다. 그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차이로 설명했다. 그는 우시아라는 말을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분모이며, 각자가 지닌 특성을 지닌 이런저런 사람이라 칭하는 경우를 휘포스타시스라고 말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처음부터 아버지, 아들, 성령이 동일 본질임을 강조했다면, 바실리우스와 그레고리우스는 통일성 안에서의 구별에 강조점을 두었다. 전자는 하나인 우시아와 셋인 휘포스타시스를 엄밀히 구별하면서도 세 분이 상호 안에 존재한다는 위격의 상호 내재 사상이다.

의의
결론적으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니케아 공의회의 논리를 지켜냈다. 성서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니케아가 말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조심스럽게 성령에까지 확대 적용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위상을 새로운 로마로서 그 정치적 위치와 일치시킴으로써 전통적인 동방의 네 지역 간의 관계와 서방 교구와의 관계에 분란의 씨앗을 뿌린 결과를 초래했다. 이 공의회에 동방 교회에서는 150명에 이르는 주교들이 참석했으나, 서방 교회에서는 우연히 한 명만 참석했기 때문에 에큐메니컬 공의회라고 불리기는 힘들 것이다.


 


[1] 라오디케이아의 아폴리나리스 또는 ()아폴리나리스(그리스어: Άπολλινάριος, 라틴어: Apollinaris, ? ~ 382[1])시리아에 있는 라오디케이아의 주교이다. 그는 부친 대(大)아폴리나리스와 합작하여 호메로스핀다로스의 시문 형태로 구약성경을 편집하였으며,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가 그리스도인들이 고전 문학을 배우는 것을 금했을 때는 신약성경을 플라톤대화풍으로 편집하였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아리우스주의를 배척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해서는 아리우스의 주장과 유사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 하느님의 로고스는 육화를 통해 인간의 육체와 결합된 것이지, 그 영혼까지 취한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의지(voluntas divina)와 인간적 의지(voluntas humana)가 충돌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그 자체로서 완전한 두 개의 상이한 본성들이 하나의 단일체(單一體)를 구성할 수는 없다는 논리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신적 영혼(anima divina)과 인간의 육체(corpus humanum)가 결합된 존재라는 주장을 펼쳤다.[2] 결국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적 주도 원리인 로고스가 인간 영혼의 자리 혹은 적어도 이성적 부분인 정신’(νοῦς, nous)의 자리를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리스도를육체를 취한 하느님혹은육체를 취한 정신이라고 칭하였다.[2] 따라서 이러한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은 몇몇 시노드와 특히 381제1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단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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