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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게더콜 ‘초기 기독교의 예수관’ “내가 왔노라”는 표현을 중심으로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8. 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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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하나님은 어떻게 예수가 되셨나? (How God Became Jesus)
역자: 손현선

들어가며
두말할 나위 없이 어떤 스토리든 시작이 중요하다. 교회의 출발선상에서 가장 초기의 제자들이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했는가? 바트 어만의 주요 포인트는 대변화(transformation)의 스토리, 그러니까 미운 오리 새끼’내지는 <사운드 오브 뮤직> 같은 류의 스토리다.

이 스토리에서 예수는 다수에 의해 거부당하고 정치적 위험인물로 처형당한 한 평범한 인간에서 종국에는 (니케아 신조를 인용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 빛으로부터 온 빛, 그리고 성부와 일체인 존재로 변화한다. 어만의 견해에 의하면 이 대변화는 어느 모로 봐도 순식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일어난 진화였다. 어만이 기술하는 대변화의 여정은 역사적 예수 이전에 시작되어 기원후 451년 칼케돈 공의회까지 진행된다.

그렇다고 해도 이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초입에 일어난다. 바로 이 스토리의 핵심 전환점이 되는 부활 출현이다. 예수는 부활 시점에 하나님 우편으로 승귀 된다. 어만은 예수의 부활에 관한 역사적 진실의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다시 살아난 예수를 눈으로 본 체험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했다. (가장 초기의 제자들 중 일부는 예수를 봤다고 진짜로 생각했다). 이 시작적 체험은 그들이 예수를 이해하는 방식에 큰 변화를 촉발했다.

어만의 주장
1)
일각에서는 예수의 양자됨(adoption)이 예수의 세례 시점에 일어났다고 본다
2)
일각에서는 세례보다 더 이전인 출생 시점에, 심지어는 잉태 시점에 양자가 되었다고 본다
3)
어만은 바울 저술은 예수를 천사 같은 존재로 인식했다는 견해를 표명한다

본 장에서 다룰 어만의 기술에 등장하는 핵심 전문용어는 승귀 기독론(exaltation)과 양자 기독론(adoptionist)이다. 기독론은 예수가 하나님 우편으로 승귀 또는 고양(elevation) 되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었나』에 의하면 가장 초기의 신자들이 가졌던 예수관은 예수 사후 하나님이 그를 지고의 권세를 가진 위상으로 승귀 시켰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는 비록 새롭게 찾은 아버지와 같은 부류의 신적 속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그의 양자로 삼았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가장 초기의 기독교인들의 예배를 받았다. 그들이 유대인들이었으므로, 별개의 신격으로서 예배를 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나란히 예배를 받았다.

우리는 연대기상 역순으로 접근할 것이다. 먼저 모두 1세기 후반에 기록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기독론을 살펴볼 것이다. 그 다음 본 장 후반부에서 시간을 소급하여 응달진[2] 영토인 터널기속으로 이동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우리가 본 장을 통해 보게 될 것은 초기 기독교인의 예수관이 점진적으로 발전했다는 가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가 본 예수
시작하기 전에 먼저 복음서의 순서를 재배열해야겠다. 그 이유는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인상은 대다수 학자들이 선호하는 마가 -> 마태 -> 누가복음이라는 것이다.

출생 시점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다? 마태와 누가복음 속 기독론
마태와 누가의 기독론에 관한 어만의 견해는 대체로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 어만은 두 복음서 중 어느 것도 선재하는예수, 그러니까 천국에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진 존재로 그려지는 예수를 담고 있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었나』에 의하면, 두 복음서는 예수가 잉태 또는 탄생 시점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존재하게 되었다고 규정한다. 누가복음에서는 성령이 마리아에게 임하였고, 그러므로 이 거룩한 아이는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즉 쉽게 말해서 예수는 지상에서 존재하던 출발점부터 신적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만이 심혈을 기울여 강조하는 바는, 마태와 누가복음에 개념 정의된 예수는 신조에 나타난 예수와 일치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터콜은 이 대목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이와 상반된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오로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나온 그리스도의 선재성이라는 주제를 논증하기 위해 책 한 권을 쓴 적이 있기 때문이다.[3] 몇 가지 다른 논점들이 있지만 나는 마태와 누가복음에 몇 차례 나온 (마가복음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내가 왔노라어록을 주목했다. 예수는 다양한 사건을 통해 다음과 같은 구절로 자신의 사명을 요약했다.


[2:17, 개정]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
5:17, 개정]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눅
12:49, 개정]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마 10:34, 개정]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
10:35, 개정]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10:45, 개정]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20:28, 개정]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눅
19:10, 개정]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어록에는 예수가 그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다른 어딘가로부터 왔다는 암시가 자연스럽게 묻어난다는 것이다. 예수의 이런 어록을 검토할 때 구약과 유대 전승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비근한 짝은 천사가 자신의 지상 명령에 관해 설명할 때이다.

다니엘
[9:22,
개정]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9:23, 개정]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나는 구약과 유대 전승에서 천사가 자신의 지상 사명을 …..하기 위하여 내가 왔노라는 식으로 요약한 24개의 어록을 발견했다[4]. 구약이나 유대 전승에서 선지자나 메시아가 이렇게 자신의 필생의 과업을 소개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나는 복음서에서 예수가 천사로 간주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건 전혀 아니다. 내 말은 예수가 필생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어딘가로부터, 구채적으로는 천국으로부터 왔다는 인식이 복음서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어만은 만일 우리가 마태나 누가복음을 면밀히 읽어보면 그리스도가 잉태 전부터 존재했다는 발상과는 완전히 무관함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우리가 마태나 누가복음을 유대적 배경에 비추어 면밀히 독해한다면, 그리스도가 잉태 전부터 존재했으며, 지상 사역에 착수하고자 이 땅에 오기전부터 존재했다는 내용에 전적으로 부합함을 알게 될 것이다.


 


[1] 신적 속성이 다르다는 말은 전혀 종류가 다르다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같이 아버지와 아들 같은 개념으로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일 수 있는가? 이는 많이 아닌 것 같다.

[2] 그늘진

[3] S. J. Gathercole, The Preexitent Son: Recovering the Christologies of Matthew, Mark, and Luke (Grand Rapids: Eerdmans, 2006).

[4] S. J. Gathercole, 113-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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