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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트 어만'에 대항하는 마이클 F. 버드의 '인자 대 서사시'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7. 25.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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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자: 마이클 F. 버드

서명: 하나님은 어떻게 예수가 되었나? (How God Became Jesus?)
역자: 손현선
출판사: 좋은 씨앗


내용 요약
최종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류의 증거는 인자 어록이다.이 자료만큼 예수에 대한 논의가 혼돈스럽고 복잡한 영역도 없다.

어만의 견해: 예수는 선한 묵시론적 선각자로서 인자를 통해 임할 왕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만은 그 많은 예수 어록 중에서 이 땅을 심판하러 온다고 언급하는 대목에서 예수는 인자가 자신이라는 암시를 준 적이 없다는 말까지 한다.

마이클 버드의 반박

1. 히브리어로 인자라는 표현인 벤 아담은 그냥 인간이라는 뜻이다. 시편 8:4를 생각해보라.

[8:4,
개정]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이 구절은 유의어의 병치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사람과 인자는 인간을 뜻하는 동의어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가장 빈번하게 사용한 횡은 인자였는데, 여기서 인자는 일종의 유한한 육신에 불과한 존재라는 의미를 보인다(2: 1, 3, 8). ‘인자를 일반적인 인간을 뜻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공관 전승에도 그 족적이 남아 있다. 마태는 예수의 중풍병자 치유에 관한 마가의 기술에서 셈족어의 숙어적 표현을 부각함으로써 마가의 기술을 재 셈족어화 한다고 할 수 있다.

[9:6,
개정]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9:7, 개정]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9:8, 개정]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마태는 하나님이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었음에 흥분하는 무리를 묘사함으로써 셈족어 표현의 의미를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다.

둘째, 다니엘서 7장은 하나님 옆 보좌에 앉아 왕의 위엄과 초월적 분위기를 갖춘, 심지어 하나님과 나란히 경배를 받기까지 하는 한 인간의 형상을 한 존재(Human Figure)를 지목함으로써 유대교와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에 중추적 영향을 끼쳤다. 간추려 설명하자면, 다니엘서 7장은 우리의 불쌍한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온 땅을 황폐케 할 네 마리 무서운 짐승이 바다에서 차례대로 올라오는 환상에 관한 보고서다. 그러나 네 마리 짐승은 그 권능을 박탈 당하고, 다니엘은 이렇게 기술한다.

[7:13,
개정]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7:14, 개정]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짐승은 바빌론, 미디아, 페르시아, 그리스 등 차례로 세상에서 부상할 왕국을 상징한다. 인자 같은 이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다면적 가치를 지닌 상징이다. 그래서 이 인자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통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짐승은 명백하게 왕들을 가리키며 인자는 짐승에 대한 천상의 대응자이다(7: 8, 11, 17, 23-24). 그리고 이 인간 존재에 주어진 지배권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과 동일하다(7: 18, 27).

에녹1서
37-71과 쿰란 두루마리 4Q246, 4복음서, 요한 계시록, 기원 후 70년 이후의 묵시록인 에스라4서와 같은 묵시 문학은 다니엘의 인자를 명백하게 메시아적으로 해석했음을 고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후 발전한 전승에서도 인자는 역시 천상의 선재적 존재로 간주되었다. 그렇다면 다니엘서의 이 이야기가 예수에게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점에 관해서는 어만과 나는 의견이 완벽하게 일치한다.

셋째, 예수는 아람어를 구사했는데, 아람어에서 바르 에나쉬는 인간이라는 총칭이나 한 사람또는 어떤 사람이라는 불특정형, 또는 이 사람이라는 특정형 지칭어로 쓰인다. 예수는 이 아람어 표현을 이야기의 주인공인 자신을 또는 적어도 어떤 특정 분류의 사람들 중 한 사람인 자신을 지칭하기 위해 썼던 것으로 보인다.

마태
[8:20,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누가
[9:58,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Q에 귀속된 이 두 어록 모두에서 예수는 분명히 인자를 자기 지칭형태로 사용했고 이는 아람어에서 이 사람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면 완벽하게 앞뒤가 맞는다. 이런 어록들은 아마도 진정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에서 예수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조롱하는 표현을 애써 고안해내고 예수의 집 없음을 부각시킬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탄탄한 역사적 근거 위에 서있다.

내가 말했듯이 인자 자료는 복합적이다. 하지만 (1) 만일 인자가 유대 문학에서 메시아적 인물이고, 어만도 인정하듯이 만일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했다면, 예수가 자신을 인자로 칭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근거가 무엇이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한 없다! 인자라는 표현은 그의 왕으로서의 염원에 쓸데없는 도발을 방지하기에 알맞게 애매한 방식으로 메시아적 정체성을 일부러 암호화해 일컬은 것이다.

어만의 기술을 보면 인자는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 열두 제자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가운데 그의 영광의 보좌에 앉아 있다. 이 해석에는 한 가지 작은 문제가 있다. 대체 예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인자는 영광스러운 보좌를 차지하고 제자들은 각자의 보좌를 차지하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주관하는데, 예수는 그의 수고의 대가로 무엇을 받았는가? 치킨? 천국의 유대인 코미디 클럽의 앞 좌석? 만일 어만이 말하듯 예수가 자신이 이스라엘의 미래의 통치자라고 믿었다면, 그리고 만일 예수는 하나님의 메시아로서 모든 보좌 중 최고의 보좌에 앉을 것이라는, 우리는 인자가 앉고 있는 곳에 예수를 기대해야만 한다.

(2)
더욱이 인자라는 칭호는 교회가 예수를 지칭할 때 선호하는 표현이 아니었다. 바울 서신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고, 복음서를 벗어나면 신약 전체를 통틀어 단 네 번만 나온다. 더욱이 바나바 서신 같은 초기 2세기의 문서에서는 예수가 인자라는 것을 전면 부인한다. 나는 바로 이런 것을 비유사성이라고 부르고 싶다!

4
복음서의 재판 장면 전체는 텍스트적, 역사적, 신학적 사안들의 실타래다. 신성모독에 대한 고발은 아마도 예수가 시편 110 1절과 다니엘서 7: 13을 중첩시키며 자신이 하나님과 나란히 보좌에 앉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했을 때 촉발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어록의 배경과 왜 예수가 신성모독을 저질렀다고 여겨지게 되었는지에 관한 설명은 TV 프로 <왕자의 게임>의 유대인판과도 같을 것이다. 야웨가 그의 보좌를 어느 누군가와 공유하는가? 앞 장에서 우리는 이미 에녹3서 16에서 엘리샤 벤 아부야가 보좌에 앉은 메타트론의 환상을 보고 천국에 두 권능이 있다”라고 주장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았다 (엘리샤는 즉각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다).

이뿐 아니라 위대한 랍비 아키바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기원 후 135년 경 사망). 그는 다니엘서 7:9의 복수로 쓰인 보좌들이 하나는 하나님, 하나는 다윗을 위한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신성모독으로 고발당했고 아키바는 이에 굴복했다. 그러므로 많은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옆에 미니어처 보좌가 있고, 그 위에 앉을 짝이 있다는 설명에 상당한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예수는 아마 시편 110편과 다니엘서 7: 13-14을 아키바와 유사한 방식으로 해석했을 것이며, 이 구절들이 메시아가 보좌에 앉는 것을 뜻한다고 보았을 것이다. 1세기의 어떤 인물도 이러한 주장을 한 예가 없었다. 바트어만은 예수가 부활을 통해 실패한 선지자에서 신적 위격으로 변모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그러나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부활 신앙은 기독론 형성에 기여했지만 그 기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절대 신적 기독론은 부활 하나만으로 창출된 것이 아니다. 예수의 자기주장은 부활로 말미암아 창출된 게 아니라, 확대된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예수와 하나님 간의 고유한 관계에 대한 믿음은 부활로 말미암아 시작된 게 아니라 강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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