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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카파도기아 사역 (359-375)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7. 24.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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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삼위일체와 영성
저자: 크리스토퍼 빌리
역자: 백충현
출판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기독교를 핍박한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358년 또는 35930세의 나이에 카파도기아로 되돌아왔다. 그는 잠시 동안 나지안조스에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아마도 고향 지역 및 가족에 대한 의무들을 감당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폰토스에(Pontus)에 있는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를 보기 위하여 여러 번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연구 및 기도의 수도원적 실천을 계속하였다. 카파도기아로 돌아온 첫 여러 해 동안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뚜렷하게 삼위일체적 및 오리게네스적 기독교를 형성하는 것이 대체로 완성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기본적인 윤곽에서는 그렇다. 358년과 362년 사이에 때때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는 성경주석과 자유의지에 관한 오리게네스의 저작들의 선집을 만들었다. 『필로칼리아』로 알려진 이 저작은 『제일원리들에 관하여』 제3권과 제4, 여러 설교들과 주석들, 또는 『켈수스를 반대하며』에 있는 몇몇 그리스어 구절들을 보존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이 시점에서 두 사람이 정확하게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었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의 초기 주요 저작인 『에우노미오스를 반대하며』는 그들의 공동의 노력들을 확실히 반영한다. 이 저작은 360-361년에 저술된 에우노미오스의 『변증』에 대한 응답으로 아마도 363년에 쓰여진 것 같다. 이 저작에서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는 에우노미오스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성을 선포하는 것을 옹호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어느 정도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저작을 닮았다. 특히,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는 신학적 언어의 본질에 관하여 다루었고, 성부, 성자, 성령의 정체성들을 다루었다.

카파도기아에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성인기 첫 여러 해 동안 여러 사건들이 발생하였고, 그의 인생의 여정을 급격하게 바꾸었다. 황제 콘스탄티우스의 후원 하에 360년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개최된 교회회의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반 니키아적 유사적 교리를 제국의 공식적 교리로 공표하였다. 이것은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나지안조스에 자라면서 접한 신앙에, 그리고 부친의 교회의 신앙에 대립되는 것이었다.

동일한 해에 상이본질파(heterousian) 신학자인 에우노미오스는 키지코스의 감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361년 즈음 『변증』을 저술하여 자신이 360년 교회 회의에서 제시하였던 것과 같은 철저히 종속론적인 교리를 옹호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부친은 부주의하게도 유사적인 (Homoian) 콘스탄티누폴리스 신조에 서명함으로써, 다수의 지역 수사들이 그와의 교제를 중단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로써 지역교회가 분열되었다.

361
113일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였다. 그의 후계자 황제 율리아누스는 교회를 방해하고 고대 그리스의 종교의식들을 회복하고자 조직적인 노력을 즉각적으로 시작하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변화들은 초기 단계에 있는 친니키아적 운동에 심각한 타격을 가하였다. 소아시아의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최근에 이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일들을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뼈저리게 느끼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의 부친이 362년 주현절에 그를 목회자로 강제로 임명한 사건이었다. 분열된 지역교회에서 그의 도움을 얻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이 사건을 부친의 손에 의해서 일어난 끔찍한 충격이며 독재적인 형태이라고 묘사하였다. 목회직의 공적 직무가 자신이 아주 즐겼던 관상적인 고독을 빼앗기 때문에 나지안조스가 목회직을 경멸하였다는 견해가 오랫동안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자신에게 부여된 권위를 본인이 결코 바라지 아니하였다는 그의 항변들은 모두 심히 변증적인 저작들에서 주로 나타난다. 즉 이말은, 381년 이후 자신의 권위가 의문시되고 있을 때에 이 권위를 옹호하고자 하는 저작들에서 나타난다. 더군다나, 그와 같은 항변들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의도된 헬레니즘적 정치 수사학의 표준적인 전략이다. 이러한 언급들과는 별도로, 그가 교회의 방향과 지도력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목회직을 수행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많은 희생을 감수하였다.

당분간 그는 폰토르소 돌아가서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와 함께 연구하고 기도하기 위한 기간을 추가적으로 보냈다. 두 사람은 어려움에 처해 있는 교회의 상황을 심사숙고하였다.그리고 최고로 훈련된 젊은 기독교 지성인들로서 교회의 지도력에 참여하는 자신들의 책임감을 깊이 생각하였다. (더 일찍은 아니더라도) 이 기간 동안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자신의 독특한 금욕적인 이론을 만들었다. , 조용한 연구와 공적 임무를 병행하는 중도(middle path)”의 이상에 관한 이론을 만들었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자신의 새로운 목회적 책임들을 담당하는 동안 자신의 첫 세 편의 설교를 자신의 도피와 귀환을 설명하는 데에 할애하였다. 그러면서 목회사역의 본질에 관하여 성찰하고, 지역교회의 분열을 해결하고, 황제가 시행하기 시작하였던 교회에 대한 공격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설교2』는 목회 사역에 관한 이후 교부 시대 논문들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설교3』에서 지역 수사들에게 상호 간의 불화를 중단하도록, 그의 부친의 회중에게로 돌아오도록, 신학적인 해결을 만드는 것은 자신에게 맡기도록 호소한다. 이 설교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자신의 신학적 역량이 부친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경우들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

362년 한여름 황제 율리안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제국 내에서 수사학과 그리스 문학을 가르치는 것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였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즉각적으로 반격을 시작하였다. 자신의 동생에게 편지를 써서 궁정 의사직을 사임하도록 요청하였다. 자신의 동생과 황제 율리아누스와의 연관성이 나지안조스의 교회에 좋지 않은 소문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율리아누스에 반대하며』를 썼다. 그는 여기에 자신의 이름과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의 이름으로 서명하였다. 아마도 그는 구두로 결코 발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문의 이 설교에서 그는 황제 콘스탄티우스 이후의 정통 기독교의 운명에 관하여 설명하고, 그리스 사회와 문화 내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위치를 옹호한다. 특히, 기독교가 그리스 종교 및 철학에 대하여 가지는 우월성을 논증한다. 그러다가 363년 황제 율리아누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368-370년 사이에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여러 가족들이 사망하는 일련의 일들을 겪었고, 이것이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러한 상실감보다 아마도 훨씬 더 큰 상실감은 자신의 오랜 친구이며 협력자이었던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와의 관계가 결렬된 것이었다. 카이사레이아의 감독 관할 구를 얻기 위한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의 공격적인 운동이 두 사람 사이에 첫 번째 심각한 틈을 벌여놓았다.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가 감독직 권위를 행사하는 고압적인 자세로 인하여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깨어졌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379년 말에 나지안조스의 교회에 임명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졌고, 심지어 정통신앙을 위하여 두 사람이 어느 정도로 계속 협력하는 동안에도 그러하였다. 두 사람 사이의 불화는 대부분의 현대 역사기록에서는 간과되어 왔다. 그렇지만 다음 십 년 동안의 신학 발전에서 이 일은 뚜렷하게 드러났다.

또 다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결코 이상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 지도력의 자리로 옮긴 것이 놀랍도록 유익한 결과들을 드러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가 사시마에서 감독 관할교구를 결코 맡지 아니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 대신에 그는 보좌 감독으로서 나지안조스에서 부친에게 합류하였다…….그러나 다시 압도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중도의 길에(middle Course) 헌신하였다.

, 수도원적 삶을 통하여 신적 빛과 연합하는 것과 교회의 감독으로서 그 빛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는 것 사이에서의 중도의 길에 헌신하였다. 그에 따르면, 이것은 고독에 대한 자신의 갈망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결합하는 형태의 삶이었다. 왜냐하면 한 개인의 영혼의 진보보다는 온 교회의 개혁이 더 선호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감독직을 그가 아는 일부 감독들의 세속적인 사역들과는 대조적으로 주로 성령의 활동의 관점에서 기술한다.

이 시점에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주로 성령과 다투는 자들에게 반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규정한다. 비록 그들이 성자의 신성을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반대한다. 이 때에는 그들 중에 카이사 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가 포함된다. 그가 성령의 신성을 온전히 고백하는 데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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