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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안조스 그레고리오스(Gregory of Nazianzus)의 어린 시절 및 교육 (329~359)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7. 24.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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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이름: 삼위일체와 영성
저자: 크리스토퍼 빌리
옮긴 이: 백충현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로마제국 카파도기아(Cappadocia)주 안에 있는 어느 시골의 그리스도인 지주 계층 출신으로 당대의 지도적인 신학자와 동방교회의 주요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생애는 삼위일체 정통교리가 고전적인 형식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었던 교회사의 핵심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 325년 니카이아 공의회로부터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까지의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이 시기에 공표된 일련의 제국 칙령들로 인하여 친니카이아적 기독교가 국가의 공식 종교가 되었다.

329-359 (30세까지)

나지안조스에서의 어린 시절, 타지에서의 교육

359-375 (30-50)

나지안조스에서 목회자 및 감독으로 사역 이후 셀레우케이아에서 4년간
은둔

379-381 (50-52)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감독으로 사역, 총대감독 및 콘스탄티누 폴리스 공의회 의장 활동

381-390 (52-61)

은퇴
나지안조스에서의 교회 활동 및 저술 활동


그의 어머니 논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그레고리오스는 성실하게 잘 목양하는 목회자였지만, 특별히 신학자로서의 재능은 없었다. 아버지 그레고리오스는 360년 또는 361년에 자신도 모르게 콘스탄티누 폴리스의 유사파 신조(the Homoian Creed of Constantinople)에 서명하였다. 이 신조로 인하여 지역 교회가 분열되었다.

아버지 그레고리오스는 지적으로 더 많은 재능이 있는 아들의 도움이 필요하였기에 그리고 아마도 그 동안의 값비싼 교육을 어느 정도 활용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였기에 – 362년 주현절 예식에서 아들의 뜻과는 상관없이 아들을 목회자로 안수했다.

그런데 아들 그레고리오스는 자신이 더 많은 재능이 있는 신학자임을 알았지만 아버지의 권위에 대해서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만약 그가 고향에서 오리게네스의 유산을 이미 만나지 않았다면, 여기에서 앞으로 오리게네스의 유산을 접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 신학의 기초와 절정을 오리게네스로부터 배웠고, 자신의 삶의 영적 및 지적 차원들의 확실한 모형을 오리게네스 안에서 발견하였다.

오리게네스처럼,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다른 무엇보다도 연구, 기도, 기독교적 금욕, “철학에 헌신하는 삶을 귀중하게 여겼다. 그는 또한 이러한 영성적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가르침으로 교회를 먹이고자 수고하였다. 그는 이교도 그리스 서신들 중 걸작들이 기독교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카파도기아 교부들이 아타나시오스의 저작을 읽었으며 기본적으로 그의 작업을 계속 이어갔다고 종종 추정된다. 그러나 학자들의 더욱 최근의 관찰에 따르면, 이러한 점을 정확하게 결정하는 것은 더욱 복잡하고 어렵다.[1] 30년 이상 후에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아타나시오스를 기억하며 썼던 찬사에 따르면, 그가 아타나시오스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였음과 그의 저작들도 알지 못하였음을 알려준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어머니가 그를 바쳤던 이후, 초기 생애에서 그의 인격형성에 두 번째로 가장 중요한 사건이 348년 알렉산드레이아로부터 아테나이로 항해하여 가는 중에 일어났다. 키프로스 근처에서의 격렬한 폭풍우로 배가 심하게 흔들렸고 다른 배와 거의 충돌할 뻔하였다. 곧 죽을 것 같은 예상으로 그는 자신이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음을 기억하고, “우리를 신적으로 만들어주는 정화의 물에 의해 자신이 결코 정결하게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였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글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옷을 찢고, 몸을 엎드리며, 그리스도께 기도하였다. 만약 자신을 구원하여 주신다면, 그때로부터 계속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겠다고 기도하였다. 폭풍우는 진정되었다. 아테나이에 도착할 때, 그는 그리스도께 자신을 바쳤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358년까지 철학적 수사학을 계속 공부하였다. 황제 율리아 뉴스를 가르쳤던 이교도 수사학자 히메리오스와 기독교 수사학자 프로하이레시오스와 함께 공부하였다.[2] 체류를 마칠 즈음에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는 아테나이에서 수사학 교사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기금이 주어진 세 자리들 중의 하나를 제안받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1] 예를 들면, Hasan, Search for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678-679.

[2] Socrates, HE 4.26 ; Sozomen, HE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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