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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로 물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해야 하는 성경적 근거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7. 1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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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로 물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해야 하는 성경적 근거

 


책 이름: 천국 묵상
출판사: 국제제자훈련원
역자: 서경의

패널토의:
D. A.
카슨
팀 켈러
존 파이퍼
보디 보캄
타비티 얀야빌리
미구엘 누네스

2014
2015년에 미국은 뉴욕과 미주리주 퍼거슨시를 포함한 여러 도시에서 발생한 인종 폭력 사태로 몸살을 앓았다. 언론은 소수자를 위한 정의 문제를 대서특필했고, 복음주의자는 성경에서 말하는 사회 정의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했다. 교회는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폭력과 분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경찰과 일부 시민 사이에서 갈등이 깊어질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성경은 정의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의 지혜를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2015
<가스펠 코얼리션 전국 콘퍼런스>에서 여섯 명의 참가자는 이 질문을 놓고 토론했다. 토론의 생동감을 살리기 위해 편집은 최소화했다.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대답해야 할 질문에 대한 사려 깊은 성경적 해답을 얻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제프 로빈슨

인상 깊은 구절들
타비티
얀야빌리: 태초에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고 하셨다. 이 일은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다. 말라기 215절은 하나님이 왜 결혼 제도를 세우셨는지를 설명한다. 자기에게 영광을 돌릴 자손을 두기 원함이었다. 따라서 정의는 예배와 관련이 있다. 인간이 번성하는 일과 서로를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는 일은 서로 관련이 깊다. 이로써 정의의 실현을 논의하기 위한 기초는 놓였다고 생각한다.

[2:15,
개정]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보디 보캄: 이 문제에서 우리는 크게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는 사람 중심이 대세다. 사람들이 가스펠 코얼리션에 열광하는 이유는 하나님 중심의 사고가 옳으며, 이를 다시 부흥시키려는 노력 때문이다. 주님의 양들은 주님의 목소리를 알기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며 하나님이 복음의 중심이 될 때, 사람들은 그 복음에 끌린다. 사람들은 참된 복음에 굶주려있다.

팀 켈러: 한 가지 이유는 각자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인종에 따라 일상적인 경험은 달라진다. 우리는 보는 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한 가지 이유는 된다. 우리가 그런 경험을 일반화하는 것은 내가 보기엔 정상이다.

팀 켈러: 얀아빌리가 한 말에 조금 더 덧붙이겠다. 이런 주제를 신학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정치적 목소리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진보주의자는 개인을 사회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사회나 종교가 뭐라고 하든 개인은 자기 생각대로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반면 보수주의자는 개인이 국가, 정부, 규제, 법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매우 다르면서도,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둘 다 얄팍하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성경이 말하는 정의를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지 그들이 웹사이트에 올린 내용을 읽는 수준에서 그친다면, 퍼거슨이나 스텐튼 아이랜드의 문제를 놓고도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대신에, 다수의 정치적 목소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누네스: 사람을 만날수록, 세계관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문제는 세계관이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많은 지식을 얻는다. 그러나 세계관은 감정, 경험, 성장배경 등과 관련이 있다. 우리 교인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이 진리를 듣고, 알게 된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 말씀과는 다르게 행동한다. 따라서 성경의 진리를 가르칠 때, 청중의 세계관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인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같은 신앙을 가지고, 똑같이 성화된 경우에도, 삶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남미인은 북미인과 다를 수 있다. 또한 개인마다 성화의 정도도 다르다고 생각한다.

카슨: 야고보서 1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부자는 들판의 꽃처럼 죽어 사라지는 것을 인식하고 겸손해야 하며, 가난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높음을 자각해야 한다. , 같은 복음이라도 두 그룹의 사람에게 매우 다르게 적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목사는 두 그룹의 사람에게 매우 다르게 적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목사는 교인 중에 소외되는 사람이 있는지 민감해야 하며, 특별히 구성원의 배경이 다양한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일은 쉽지 않다. 사람들이 정의의 문제와 관련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돕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파이퍼: “왜 차이가 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싶었는데, 우리가 이 문제에 잘 훈련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만약 성도들이 잘 훈련받지 못했고, 목사들이 잘 훈련하지 못했다면, 왜 그랬을까? 내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선뜻 나서지 못했던 이유는 피부에 와 닿는 해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론을 말하기는 쉽다. 내 생각에, 목사들이 정의의 문제에 나서기를 꺼리는 이유는 어떤 수준에 이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된다. 창세기 9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야고보서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됨을 설교할 수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훈련하면 된다. 다른 이유는 비겁함 때문이다. 우리는 겁이 나서 침묵해왔다. 교인 중에는 내가 설교하는 내용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겁나서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두 가지 아유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보캄:
덧붙여서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많은 사람이 경험이 최고라는 사상에 물들어서, 경험하지 못했다면 진리라고 생각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다. 성경 진리가 사람의 경험만큼 강력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또한 성경의 진리를 말할 때, 청중이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말은 그럴듯하게 한다는 비판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경험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져서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다음 사람들에게 개인의 경험이 전부가 아님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의 모든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켜야 하듯, 우리의 경험도 그렇게 해야 한다. 따라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어떤 문제에 대해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과 교인들에게 잘못하는 것이다. 경험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전부인 것처럼 믿고 행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얀야빌리:
뉴스에 노출되지 않은 이야기는 이런 토론에서도 소외된다. 비슷한 사람끼리 어울리다 보면, SNS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만 접한다. 스스로 관심 있는 문제에만 신경 쓰고, 다른 사람 이야기는 잘 듣지 않는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더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견해에 좀 더 관용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많은 대화 속에서 정의를 이야기할 때, 이 단어는 좌파적, 진보적 개념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정의는 성경에서 나온 단어다.

파이퍼: 복음은 우리에게 정의를 위해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정의보다 더 큰 것을 위해 살기를 촉구한다. 정의는 최소한의 의무다. 사람을 대접할 때, 그 사람이 대접받아 마땅한 정도로 대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은 우리가 대접받아 마땅한 것 그 이상으로 우리를 대접하셨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얻은 것은 정의가 아니라 은혜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는 정의 그 이상으로 사람을 대접한다. 당신은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면 공정할까보다 더 큰 것을 고민해야 한다. 복음은 정의보다 훨씬 더 큰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단지 공평한 사람이 되는 것에 머물면 안 된다. 그것은 최소한이다. 거기에서 시작해서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사람들을 마땅히 취급 받아야 할 수준 그 이상으로 대접할 때, 세상은 비로소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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