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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적인 흐름의 해석학이 성경보다 우월하다는 윌리엄 웹의 주장 비판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7. 4.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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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웨인 그루뎀
역자: 조계광
서명: 복음주의 페미니즘(Evangelical Feminism)

 


앞 장에서 논의한 “궤도추적 해석학을 약간 변형시킨 접근 방식이 『노예와 여성과 동성애자』라는 책을 펴낸 윌리엄 웹의 구속적인 흐름의 해석학에서 발견된다.[1] 웹의 책은 프랜스와 톰슨의 “궤도추적 해석학과 비슷한 접근 방식을 위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해로운 성질을 띤다. 왜냐하면 매우 복잡하고, 완전히 새로운 방법으로 신약 성경의 윤리적인 명령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웹의 원리는 신약 성경의 윤리적인 명령을 모두 의문시한다.

웹은 성경의 가르침은 신약 성경의 윤리보다 더 우월한 윤리, 곧 신약 성경이 목표로 하는 궁극적인 윤리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자칭 구속적인 흐름의 해석학으로 일컫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이 방법을 사용해, 결혼과 교회에서 남성이 차지하는 지도자적 위치를 다룬 신약 성경의 본문들이 문화적인 상대성을 지닌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늘날의 문화는 성경 본문을 구성하는 개개의 용어들을 통해 표현된 윤리보다 더 나은 윤리가 가능한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관점에서 여성들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X -> Y -> Z
원리
웹이 적용하는 방법의 핵심에는 구속적인 흐름의 해석학이 놓여 있다. 웹은 X -> Y -> Z 원리라는 것을 이용해 자신의 해석학을 설명한다. 문자 X본래의 문화적 관점, 문자 Y는 하나의 주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각각 가리킨다. 웹은 중심에 위치한 Y는 성경을 구성하는 개개의 용어들이 하나의 주제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나타낸다.”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문자 Z궁극적인 윤리”, 즉 성경이 지향하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이상을 나타낸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이 특정한 주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윤리(Z)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Y)에 지나지 않는다. 웹은 이렇게 말했다. X -> Y -> Z 원리는 많은 성경 본문이 정의와 평등을 온전히 이룬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궁극적인 윤리를 지향하는 제한된 가르침을 전할 목적으로 문화적인 틀 안에서 기록되었다.

웹은 오늘날의 문화가 성경에서 발견되는 윤리보다 더 나은 윤리를 지향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측면들을 거론했다. 우리의 문화는 더 나은 윤리, 성경 본문을 구성하는 개개의 용어들을 통해 계시된 윤리보다 궁극적인 윤리(Z)에 좀 더 근접한 더 나은 사회 윤리를 반영한다.” 웹은 여성들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 관련해 신구약 성경이 주변의 문화보다 여성들의 지위를 좀 더 향상시킨 측면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다면 결혼과 교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역할에 관한 웹의 입장은 무엇일까? 웹은 나중에 자신의 책에서 현저하게 완화된 가부장제를 가정과 교회에서의 지도자적 역할을 남자들에게만 국한시키지 않고, 단지 그들에게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명예만을 부여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아울러 그는 상호보완적인 평등주의를 남녀가 결혼 생활에서 서로를 온전히 의존하고, “서로에게 복종하며”,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 차이에 의해서만역할의 차이를 인정하는 체계로 정의했다.

웨인그루뎀은
몇 가지 간추려 다음과 같이 웹의 주장을 비판한다.

1) 웹의 방법은 원칙적으로 신약 성경의 도덕적인 명령을 폐지한다
웹의 방법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가 동성애를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간주하고, 동성애를 단죄한 신약 성경의 가르침이 초문화적인 성격을 띤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부모에 대한 자녀들의 복종을 권하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도 초문화적인 성격을 띤다고 말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은 그의 방식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동성애와 자녀들의 문제에 관해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도기까지의 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단지 그 결론만을 고려한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웹이 그런 명령들이 초문화적인 성격을 띤다고 인정한 근거가 신약 성경 자체의 가르침이 아닌 그 자신의 체계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체계가 성경의 가르침을 평가해 승인하는 기능을 수행한 셈이다. 웹이 성경에 관한 그의 결론에 도달한 방식과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의 결론에 도달한 방식은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대다수의 복음주의자들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6: 1)와 같은 말씀을 읽고 오늘날의 자녀들이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이 옳다고 결론짓는 이유는 그것이 새 언약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된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즉 신약 성경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웹의 경우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나 권위의 근거가 전혀 다르다. 그것은 웹의 평등주의적인 판단 기준을 통과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웹의 방법은 신약 성경의 도덕적인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오늘날 우리는 새 언약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된 도덕적인 명령에 복종해야 하지만 웹의 경우에는 자신의 열여덟 가지 판단 기준을 통과한 명령만이 구속력을 지닌다고 믿는다.

웹에 따르면,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그리스도인들과는 달리 더 이상 신약 성경을 펼쳐 들고, 바울 서신에 기록된 도덕적인 명령들을 읽고, 복종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런 방법은 미래 세대를 위해 성경 본문을 적용하는 방식을 크게 바꾸어 놓게 될 의미의 정신적 흐름의 요소를 간과한 채 단지 성경 본문을 구성하는 개개의 용어들을 읽는 데만 치중하는 정체된 해석학을 활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결국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궁극적인 윤리를 향해 가는 궤도의 한 단계일 뿐이다.

2)
웹의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성경 말씀에 복종해야 할지를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복종해야 할 성경 말씀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궁극적인 윤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웹의 방법을 적용할 경우에는 그 대답을 찾기가 몹시 복잡해진다. 웹이 예비적인 단계로 일컬은 첫 번째 판단 기준을 설명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성경이 가르치는 명령의 문화적인 상대성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제시한 것이 무엇인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1)
고대 근동의 세계와 그리스-로마 세계는 당시의 법률적인 체계에 견주어 평가되어야 하고, (2) 전체적인 성경의 주제는 그것을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에 비춰 검토되어야 하며, (3) 성경 본문은 다른 고대 근동 및 그리스-로마 문화와 비교해야 하고, (4) 흐름의 과정은 이국적인 요소, 국내적인 요소, 정경적인 요소라는 세 가지 평가 기준에 입각해 광범위하게 묘사되어야 한다.

이것이 웹이 제시한 열여덟 가지 판단 기준 가운데 첫 번째에 해당한다. 어느 누가 이런 기준을 활용할 수 있을까?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을 만큼 고대 문화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나는 학술계에 몸담은 지 30년이 넘지만 웹의 방법을 활용해 오늘날의 우리가 따라야 할 도덕적인 기준을 일러 줄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채 1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신학교 교육을 받은 목회자들 가운데도 웹의 방법을 적용해 오늘날 우리가 복종해야 할 도덕적인 기준을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1퍼센트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성경과 연관된 고대의 모든 문화는 차치하고, 어느 하나의 문화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만 해도 너무나도 거창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결혼과 이혼에 관한 법률, 사유재산권, 교육, 자녀 양육 가운데 단 한 가지 주제를 파악하는 일조차도 결코 쉽지 않다.

그렇다면 웹의 방법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한 마디로 그의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가운데 어느 하나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게 만든다. 고대 문화의 이런저런 측면에 관해 성경의 가르침이 어떤 식으로 발전할 것인지를 말해주려고 노력하는 학자들이 더 많아질수록 우리에게 제시되는 견해도 더 많아질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곧 그분의 궁극적인 윤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해 느끼는 좌절감도 더욱 커질 것이다. 웹의 방법은 신약 성경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가르침과 너무나도 판이하다 (4: 25).

3)
웹의 방법은 기독교 윤리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린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우려하는 것은 웹의 방법을 따르기가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의 방법이 실천적인 차원과 원리적인 측면에서 신약 성경의 도덕적인 권위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해석학을 이끄는 구속적인 정신(redemptive spirit)”이 성경 본문에서 비롯했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구속적인 정신이 성경의 가르침과 동일하지 않다고 인정했다. 그것은 고대 문화와 성경 본문의 상관관계를 다룬 웹의 분석에서 비롯했다.

그는 신약 성경의 도덕적인 명령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완전하고, 최종적인 도덕 체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명령은 단지 신성한 목적을 향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지침일 뿐이다. 본문을 구성하는 개개의 말씀이 항상 목적 자체인 것은 아니다. 때로 하나님의 교훈은 그분의 양 떼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 사람들이 일단 웹의 방법을 채택하면 성경의 다른 명령들을 거역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할 때마다 온갖 종류의 새로운 구속적인 흐름을 주장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도덕적인 권위가 더 이상 성경이 제시하는 가르침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경 이후에 발전한 것으로 생각하는 기준에 부여된다.

그가 자신의 윤리를 성경의 윤리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단지 성경을 뛰어넘는 발전의 방향을 가늠하는 수단으로 성경을 이용했을 뿐이다. 웹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 곧 복음주의자들은 항상 성경 안에서의 구속적인 흐름은 신약 성경으로 종결되었다고 믿어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1] William Webb, Slaves, Women, and Homosexuals: Exploring the Hermeneutics of Cultural Analysis (Downers Grove, Ill.: InterVarsity Pres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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