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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 기독론을 주장하며, 중간적 존재 예수가 신이 되었다는 주장 반박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7. 24.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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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하나님, 천사, 인간에 관하여
발제자: 마이클 F. 버드

서명: 하나님은 어떻게 예수가 되셨나? (How God Became Jesus?)
역자: 손현선
출판사: 좋은 씨앗


내용 요약
초대교회가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예수가 유일한 한 분인 하나님이었다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그보다는 살짝 약한 주장으로, 예수가 천사와 같은 신적 존재이거나 어쩌면 사후 신격화된(defied) 왕과 같았다는 의미였을까? 어만은 초대교회가 예수를 하나님으로 간주했음을 충분히 잘 알고 있지만,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였는지를 가려내고자 한다.

어만은 그의 책에서 고대에는 원래 모든 지상 생물과 분리되어 저 위 천상에 존재하는 유일하고 지고한 주권자로서의 하나님 개념이 없었다고 논증한다. (?) 즉 그의 말은 배타적이고 절대적인 신격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착상은 고대보다 한참 후에야 대두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죽고 약 300여 년이 지난 4세기 교회의 발명품이었다는 것이다. 어만은 고대인들의 상상 속에는 저 아래에서 고통하는 비천한 죄인들과 거대한 심연을 사이에 두고 분리된 천상의 주권적 하나님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어만의 고대 원자료 독해에 의하면 인간에서 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존재가 연속선상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신적 영역에는 권능과 위엄의 정도 별로 등급화된 피라미드가 있고 각 등급 안에는 다양한 서열의 셀 수 없이 많은 신격들이 있었다[1]. 어만은 그의 책의 첫 두 장을 인간이 된 신적 존재나 신적 존재가 된 인간을 묘사하는 그리스-로마와 유대 문헌을 논하는 데 할애한다. 이 저술들을 통해 우리는 초대교회에서 예수가 어떻게 신적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는지를 발견하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예수가 신이라는 것은 수에토니우스의 저술에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사후 신격화된 것, 에녹2서에서 에녹이 천사로 변한 것, 유대인 철학자 필로의 저술에서 모세가 신으로 선포된 것과 같은 의미였다. 달리 말하면 예수가 신이라고 한다고 해서 예수가 세상으로부터 무한 분리되고 모든 지상의 실재를 완전히 넘어선 절대적이고 고유한 신적 실체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는 신적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넘나드는 차상위 존재라는 폭넓은 의미에서의 신이지, 무한한 의미의 전능한 하나님은 아니었다.

어만은 예수를 오직 한 분 참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예수의 신성에 훨씬 적합한 비유는 이 땅을 방문한 대천사들과 훗날 천사가 된 인간들의 스토리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방법에 관한 고찰
어만이 인용하는 원자료들에는 신격화된 왕, 신적 인간, 육욕 충만한 신들, 불량한 천사들, 승귀된 에녹, 신비로운 멜기세덱에 관한 가히 환상적인 주장들이 나온다. 심지어 모세조차도 나름의 신적 위엄을 향유한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점은 신약의 저자들은 이미 이런 세계에 대해 완벽하게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이 이런 환경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에 나온다.

고린도전서
[8:5,
개정]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8:6, 개정]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바울은 이 신들의 정체에 대해 허상과 귀신 사이 어디쯤엔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전 8:4). 바울과 바나바 역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오인되어 흥미진진하지만 골치 아픈 상황에 휩싸이는 경험을 했다(14: 12-13). 바울은 골로새인들에게 쓴 서신에는 천사 숭배에 대한 경고가 등장한다. 천사숭배는 종교의 용광로인 소아시아 내륙지방에서는 뜨거운 사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 18). 유다 역시 교회들에게 쓴 편지에서 <에녹 1서>와 <모세 승천기> 같은 저술을 인용하며 이상한 가르침과 부도덕한 형태를 분명히 경계한다(9, 14).

어만은 그가 원용한 문헌들이 어떻게 또는 어떤 의미로 예수가 신적 존재로 간주되었는지를 설명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므로 어만은 아우구스투스가 하나님의 아들로 추앙된 것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추앙된 것은 사소한 차이는 있지만 일맥상통한 이야기라고 보았다. 모세가 천사가 되었고 에녹도 천사가 되었으니, 예수도 천사가 된 게 아닐까? 글쎄, 이런 비교에는 뚜렷한 연관성이 있지만 A = B와 같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이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버터넛 스쿼시와 버터스카치 푸딩은 모두 버터로 만들어졌다, 안 그런가? 아이고 맙소서, 그래도 둘은 같지 않다! 그러므로 몇 가지 논증을 해야만 하겠다.

1)
어만은 기독교의 기독론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 고대 문헌과의 병행성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학자들이 한 문서에서 발견된 용어와 개념이 다른 문서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주장할 때, 병행성은 두 문헌이 동일한 사상을 공유함을, 또는 한 문서가 다른 문서로부터 차용하여 그 문서에 대해 문학적 의존성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일이 늘 그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2]

예를 들어 요한복음의 서론은(1:1-18)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유형의 문헌들과 비교되었다. 구약과 유대의 지혜 문학, 랍비 서술, 사해 두루마리, 필로, 영지주의, 만다이즘 문헌, 그 외에도 허다한 문헌들이 거론되었다. 많은 학자들이 요한복음 서론의 참 의미는 ‘X’에서 발견된다거나 또는 ‘X’가 요한이 그의 사상을 가져온 원자료라는 식의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문학적 병행성은 주어진 본문의 문학적, 수사학적 분석을 압도하는 게 아니라 조명하는 보조적 역할을 해야 한다. 문헌을 이해하기 위해 매도급으로 병행화에 의존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본문에 대한 훌륭한 역사적 조사를 마비화하는 것이다.

2)
유비는 계보가 아님을 늘 명시해야 한다. 단지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과 신적 존재에 관한 그리스-로마의 주장 간에 언어적, 개념적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기독교인이 이교도의 문헌을 원용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가 이교를 본딴 게 아니라 역으로 이교도들이 기독교 원자료의 스토리를 본딴 경우가 있었다는 말이 될 수 있다.

3)
당연히 기독교 역시 당대의 다양한 철학과 종교와 상호작용했으므로,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주장과 동시대의 지적 사조 안에 대응 점이 있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는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을 본연의 조건으로, 자체 맥락 안에서, 고유의 형태를 가려내기 위한 수고를 통해 이해하려는 힘겨운 작업을 해야 하며, 이를 다양한 유사성을 핑계로 대충 넘겨서는 안 된다.[3]

가령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사신 메시아를 예배한다는 것은 청중이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독특하고 믿기 힘들 만큼 파격적인 스캔들이었던 게 틀림없다. 유대인 청중에게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을 예배하는 것은 당연히 신성모독이었다. 헬라인에게 죽음에서 최근 부활한 사람을 예배하는 것은 좀비 묵시록에서 당신이 처음 마주친 좀비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과 같았다.

바트어만의 개념처럼 만일 기독교의 하나님 사상이 고대 세계에서는 너무나 식상하고 흔해빠진 것이었다면 왜 바울은 유대 사회에서 채찍질당했으며 (고후 11:24), 아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그리스 철학자들의 조소를 받고 내침을 당했을까? (17: 32) 혹시 기독교의 하나님 사상이 유대인과 이교도에게는 해괴망측하고 불쾌감을 유발하는 것이라서 예수에 관한 주장을 놓고 소화불량에 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바울, 누가, 요한과 같은 신약 저자들이 예수와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은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유대인과 이교도 이웃들이 생각하는 하나님과는 의미가 많이 달랐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의 하나님을 소통하기 위해서는 일정 정도 노력이 들어가야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에 딱 맞는 사례가 있다. 세계시민적인 유대인 철학자 필로는 인간을 표상으로 예배하는 걸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 변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가능하겠다.”[4]…. 이는 사람이 하나님이 되는 경우, 유대인의 중간적 존재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로마의 반신적 인물에 대한 믿음과 그리 손쉽게 맞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음을 가리킨다. 

더군다나 이교 신화와 복음서 간의 유사성을 즐겨 지적했던 켈수스와 같은 2세기의 이교도 비평가가 신이, 또는 신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부인했던 것은 분명 흥미로운 일이다. 켈수스를 통해 이교 신화가 예수에 관한 기독교의 주장에 선례를 제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신의 방문의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고유성의 견지에서 보자면 예수에 관한 초기 기독교인의 믿음은 유대 유일신론의 개정판이라고 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기독교의 예수 경배는 유대 유일신론으로부터의 일탈이나 유대 유일신론과 그리스-로마 종교 사상의 혼합주의 실험의 결과가 절대 아니었다. 그보다는 유일신론의 핵심 전제 하에 작동하지만,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미친 영향과 하나님의 메시아와 성령에 관한 참신한 믿음에 비추어 유일신론을 표현하는 종교적 체험에 의해 추동된, 유대 유일신론의 재발견에 가까웠다.

그래서 교회의 초창기에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에 초점을 맞춘 선명한 이위일체적 섬김이 대두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5].이런 이유로 몇몇 학자들은 기독론적 유일신론을 거론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예수를 통하여, 심지어 예수로서 계시되었다. 물론 유일신론이 개정되었다는 말은 유일신론 자체에 대해 좋은 의문들을 제기하게 한다.

고대 유일신론어만은 엄격하고 절대적인 유일신론은 로마제국의 기독교화의 일환으로 4세기에 일어난 후대의 발명품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심지어 어만은 유대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신론자였다”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문제는 이것이 그냥 순전한 거짓이라는 데 있다. 이교도들에게도 기독교 시대 한참 전부터 유구한 유일신론의 전통이 있었다. 2세기의 기독교 비평가 켈수스는 그 자신이 이교도 유일신론자였다. 고대 세계에서는 하나의 하나님에 여러 다른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다중적 유일신론자가(Pluralistic Monotheist) 되는 게 가능했다.

이교도 작가 바로는 유대인의 하나님은 주피터와 동일하다”라고 했다. 켈수스는 어떤 사람이 제우스를 섬기건, 아도나이나 사바오스나 아모운을 섬기건, 모두 같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타키투스와 같은 이교도 작가가 유대인에게는 오로지 하나의 신이라는 개념밖에 없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이런 유대교의 유일신론적 맥락을 감안할 때 예수의 이름에 영예로운 지위를 부여하며 그리스도를 창조주와 동일시하며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신학적 모험이며 사회적 파격이며 역사적 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이런 엄격한 유대 유일신론이 인간이 된 천사나, 천사가 된 인간 같은 모든 중간적 존재(intermediary figures)’와 양립할 수 있을까?

물론 유대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신적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칭호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으로 불리며 신적 특성을(divine attributes) 너무나도 많이 부여받아 종종 하나님과 구별하기도 어려운, 하나님의 권능과 주권의 개인적 확장체로 기능하는 존재들이 유대인 가운데 활보한다는 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6]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유일신론은 매우 엄격했다.

그들이 좋아하는 에녹 3서나 다른 곳에서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이 인류로부터 공간적으로 멀리 유리되어 있음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러므로 텍스트를 근거로 볼 때 초기 유대교에서 천사 숭배가 일반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섣부른 판단인 것이다. 연관성이 높은 원자료들은 천사숭배가 흔한 관행이라는 추론을 허락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 천사 경배는 특정한 맥락에서 표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사 숭배는 하나님 경배의 대체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실상 대개의 경우 천사 숭배적 언어 다음에는 곧바로 하나님의 지존하심을 강조하는 부연 설명이 잇따라 나왔다.

주의 천사가 야웨이기도 하고 동시에 야웨가 아니기도 하다. 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편재함을 전달하기 위한 신비로운 신적 조우의 주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호함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표현 형성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 천사가 야웨 자신의 임재 및 위격과 동일시 될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동일시 되는지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격은 성부 하나님과 구별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그리스도의 신적 임재를 나타내는 양태는 하나님의 형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형상그리고 성육신한 하나님까지 훨씬 구체적인 언어에 담겼다.바트어만이 주장하는 천사 변형론적 기독론의 주장은 초기 기독교인의 예수관을 설명하는 틀로서는 별 유용성이 없다. 예수의 지상 생애를 보면 그는 천사들과 구별된 존재로 계속 남아 있다. 그는 천사들을 다스리는 전권까지 보유했다.




 


[1] Ehrman, How Jesus Become God, 43. (『예수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갈라파고스)

[2] Samuel Sandmel, “Parrallelomania,” JBL 81 (1962): 1-13; D. A. Carson, Exegetical Fallacies (Grand Rapdis: Baker, 1984), 43-44.

[3] Erman (How Jesus Became God, 18-19)도 이 점을 시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사상에 원래 존재하던 신적 존재가 유한한 인간 여자에게서 출생하는 유형의 신인의 사례가 또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에 근접한 개념들은 있다.” 다음 책을 참조하라. James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A New Testament Inquiry into the Origins of the Doctrine of the Incarnation [2nd ed.; Grand Rapids: Eerdmans, 1996], 22): “기독교 출범 이전에 고대 근동에서 신 또는 신의 아들이 인간이 되기 위해 하늘에서 강림하여 인간에게 구원을 준다는 착상을 진지하게 품었다는 증거는 거의 없거나 전무하다.”

[4] Philo, Embassy to Gaius, 118. Dunn (Christology in the Making, 18)을 참조하라. “유대 저술은 신의 아들 됨과 신성을 인간에게 귀속시키는 데 있어서 더 까다롭고 덜 자유로운 경향이 있다.”

[5] Hurtado, Lord Jesus Christ, 134-53 (『주 예수 그리스도』 새물결플러스); 같은 저자, How on Earth Did Jesus Become God? (Grand Rapids: Eerdmans, 2005), 46-55를 보라.

[6] 같은 책, 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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