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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가?" 바트어만에 대한 마이클 버드의 반박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7. 25.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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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가?

발제자: 마이클 F. 버드

서명: 하나님은 어떻게 예수가 되었나? (How God Became Jesus?)
역자: 손현선
출판사: 좋은 씨앗

 

내용 요약
제자들은 예수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가? 예수 자신은 그가 하나님임을 알았는가? 예수가 명백하게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는가? 어만은 이 모든 영역에서 부정적으로 답한다. 어만에 의하면 예수는 자신이 악한 현세의 종말과 다가올 시대의 미래 이스라엘 왕에 관한 예언을 하는 선지자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이 땅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선한 왕국을 세울 인자의 임박한 임하심을 앙망했다. 비록 요한복음은 예수가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하지만 어만은 이런 주장은 뒤늦게, 이차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요한복음의 예수가 신적 존재라는 자기주장은 역사적이지 않다”라고 반박한다.

우리가 예수에 관해 상대적 확실성을 가지고 알 수 있는 바는 예수의 공적 사역과 선포는 그의 신성에 초점이 맞춰진 게 아니라는 점이다. 기실 그 내용은 그의 신성과는 전혀 별개였다”.

어만에 대한 나의 대응의 목표는 예수가 고유한 권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고유한 관계를 가진 신적 대행자로서의 자기 정체를 밝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울러 예수는 말씀을 전할 때 직접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로 말하였으며 자신이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고 회복시키는 사역에서 바로 하나님의 위격 자체를 자기 안에 구현한 존재라고 믿었다.

어만의 방법: 부정확한 필사본, 역사적 잣대, 역사적 예수

나는 성서 문헌 학회 SBL의 패널 토의에서 어만이 이렇게 호언장담하는 것도 들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원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하니까요그러니까 신약의 필사본 전승은 엉망진창이고 원 본문을 복원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언가 희한한 일이 일어난다. 어만은 무슨 조화인지, 그의 다작 활동에서 이 오염되고 변질된 본문 전승을 주된 원자료로 사용하여 역사적 예수의 공생애를 재구성해낸다. 사실 그는 오로지 역사적 예수만을 다루는 책을 집필하기까지 했다! 이뿐 아니라 베드로, 바울, 심지어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실화까지 발굴해내는 능력도 있다.

절대적으로 기이한 현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기이한 이유는 어만이 신약 필사본들에 관해 말한 대로라면 그의 예수 탐구는 방법적으로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신약이 그토록 과도하게 변질되었다면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예수 생애를 재구성하는 주된 원자료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정직하게 답한다면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어만은 이 사실을 개의치 않는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어만이 비평가들로부터 숱한 비판을 받았지만 방법론적 일관성을 가졌다는 평은 받지 못할 거라는 점이다.

데일 앨리슨이 한 말이 마음에 다가온다.

“[
복음서가] 부활-이전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가 아닌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만일 보존하고 있다면 어딘가로 진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면 예수에 대한 탐구는 아마도 무의미할 것이며 무지에 항복하는 것을 고려해봐야 한다. 만일 전승이 전반적인 수준에서 심각하게 잘못되었다면 그 디테일을 가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션 프레임도 비슷한 말을 한다. “우리는 예수의 초기 제자들이 예수에 관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할 때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에 대한 관심과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는 걸 수용하든지, 아니면 프로세스 자체를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접근법은 진공상태를 만든 후 그 공간을 학자의 허구로 채우는 것과 진배없다.

우선 진짜 전승과 진짜가 아닌 전승을 가려내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단순한데, 예수의 역사는 초대교회의 예수 선언과 모든 지점에서 완벽하게 용접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신학으로부터 역사를 분리해내는 것은 보라에서 빨강과 파랑을 추출해내는 것과 일견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진정성의 기준 중 다수는 비판적 검토를 통해 복음서의 주어진 부분의 역사성 또는 비역사성을 정립하는 데 부적합하다고 밝혀졌다.

이 점에 관한 데일 앨리슨의 진솔한 이야기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어떤 사람이 특정 어록의 역사와 기원을 추적하는 능력, 이런 류의 질문에 답변하는 능력에 대해 점점 덜 신뢰하게 되었다.”

단적인 예로 어만이 사용하는 상이성(Dissimilarity)의 기준을 살펴보자. 어만의 논리는 복음서의 주어진 부분의 어록이 만일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에 관해 말하고자 의도하는 바와 상이하면역사적으로 참되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일부 학자들은 이중 상이성을 모색한다. 그러니까 유대교와 초대교회 모두와 상이한 전승은 참된 전승이라는 것이다. 어만은 현명하게도 좀 덜 극단적인 형태를 취하여 초대교회만을 상이성의 기준으로 적용한다.

그렇다고 해도 상이성의 기준은 광기에 가깝다. 생각해보자. 예수에 관한 스토리나 예수가 전한 것으로 알려진 말씀이 교회가 예수에 관해 주장했던 바와 전혀 다를 때만 역사적이라니, 어떤 역사가가 역사적 플라톤과 플라톤 학파가 플라톤에 대해 말했던 바와 다르다고 하겠는가?

진짜 요한 웨슬리가 했던 말을 복원해내려면 웨슬리파가 요한 웨슬리에 관해 전했던 비 웨슬리적 어록들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

상이성의 기준은 한 운동의 창시자와 후대의 운동 간에 거대한 괴리가 있어야 한다는 얼토당토 않은 전제 위에 서있다. 이 기준의 종착점은 예수의 가장 초기의 제자들이 예수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했다고 믿었던 바와 전혀 다르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한 예수다.

최근 학계의 관심은 몇몇 하자 있는 기준을 가지고 복음서 속의 역사적 은에서 신학적 찌꺼기를 걸러내려는 게 아니라, 역사적 예수 연구에 사회적 기억을 접목시키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예수가 말하고 행한 것들이 어떻게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하나의 기억을 창출했는가, , 제자들에 의해 충실하게 전수되었지만 초대교회가 계발 중이었던 신학적 틀에 의해 굴절되기도 한 하나의 기억을 창출했는가이다.

예수 전승에 관한 역사가로서 우리는 스토리텔러다. 우리는 경쟁 상대보다 더 설득력 있는 내러티브를 만드는 것, , 더 흡족한 방식으로 더 많은 데이터를 선명하게 담아내는 것, 우리의 미학적, 역사적 감성을 충족시키는 내러티브를 만들기를 열망하는 것, 그 이상을 해낼 수 없다.

예수, 이스라엘의 회복, 그리고 시온으로 돌아온 야웨
글쎄, 우선 예수를 훌륭한 유일신론자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볼 근거가 없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후대의 교회는 예수를 선포했다는 말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 안에도 항상 암시적인 자기 지칭이 있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예수가 바로 권능과 축귀와 치유와 말씀선포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11:20,
개정]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는 단지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는 발표를 전달하는 페덱스 택배원이 아니다. 그는 왕국이 임하는 그때에 그 자리에 있는 선구자이자 주인공이다!

이사야 52: 7-10에서는 야웨의 왕되심에 대한 이사야의 선언은 야웨가 시온으로 돌아오며, 이스라엘의 원수를 심판하는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유배가 종식되며, 야웨는 그의 백성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유배의 종식, 새 성전, 새 언약, 새 다윗왕이라는 테마는 에스겔서에서도 선지자적 위용과 위력으로 되풀이된다. 에스겔서 347-17절에서는 양떼가 노략 거리가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야웨가 거짓 목자들을 대적하시며, 백성을 다시 목양하기 위해 오실 것이며, 이것이 그가 임하시는 목적이다.

[34:22,
개정] 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 거리가 되지 아니하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34:23, 개정]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34:24, 개정]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다윗이 야웨라는 뜻이 아닌 건 분명하지만 또 모종의 하청업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것은 다윗이 백성에게 야웨가 유배된 자들에게 되기로 약속한 것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라는 의미다.

유대인의 회복을 소망하는 이 내러티브는 예수 자신의 말과 행동의 배경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의 대본이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하나님이 왕으로 오심을 말하고 있었다. 예수가 열두제자를 선택한 것은, 오합지졸 같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마침내 이스라엘의 회복이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나는 예수가 자신을 이 다가오는 왕국의 왕인 메시아로 간주했다는 어만의 말에 동의하지만 유대인의 회복 종말론을 배후에 놓고 볼 때 그 이상을 말하고 싶다. 예수는 그의 사역과 심지어 그의 위격 안에서 야웨가 마침내 시온으로 돌아오신다고 믿었다. 이 전제에 비추어 예수의 공생에에서 신적 원저자와 신적 대행자 간의 구분선이 흐려짐을 알게 된다.

2: 1-12절에서 보면 예수는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였고, 이로 인해 율법 선생들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가 만약에 제사장이고, 그 장소가 성전이었다면 그가 하는 말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아무도 여기에서 그에게 기다려 봐! 당신은 제사장이 아니 잖아!” 내지는 잠깐, 여기는 성전이 아니잖아!”라고 하지 않는다.

도리어 불평의 내용은 이렇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 중풍병 걸린 남자는 치유되었다. 예수의 수사에 깔린 뉘앙스는 예수가 옳음이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권세에 근거하여 신적 계명들을 재구성하였고, 한 번은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므로 안식일을 초월할 권세가 있다고 주장했다.

저명한 유대인 학자 제이콥누스너는 저서 『예수와 대화한 랍비』에 관한 인터뷰에서 율법에 대한 예수의 접근법이 너무나도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그래서 예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말한다. “대체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해요? 하나님이라고?”

다른 곳에서도 예수는 자신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가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신적 지혜의 대행자이며, 신적 임재의 보좌이며, 악을 이기는 신적 권능의 표출이라고까지 자기를 규정했다. 이 개념들은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철두철미하게 유대적인 사고방식과 완벽하게 융합되어 있다.

누가가 그린 예루살렘으로 나아가는 예수의 초상을 보면 숨이 가쁠 정도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오싹할 정도로설마기이하게도 시온으로 돌아오는 야웨와 닮아 있다. 물론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지만, 바로 그 도래 속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현현이 있다.

첫째, 여리고를 통과하는 예수의 여정은 어떤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 줄 기회가 되었다. 예수의 행보는 하나님 나라의 개방성의 상징이자 누가 하나님 편인가 아닌가에 대한 선입견을 급진적으로 뒤흔드는 것이었다. 이야기의 결말에서 삭개오가 공개적으로 회개하자 예수는 다음의 말로써 자신의 행보를 설명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9: 10).

예수는 고대 선지자처럼 방탕한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고 타이르지 않는다(5: 4). 도리어 예수는 소외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 나선다.이것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떼를 다시 모으려고 하나님이 시온으로 재림할 때 나타날 그 절정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31: 10, 34: 8-10, 9: 16). 여기서 야웨가 백성을 찾아 그들의 목자가 되기 위해 임하시는 이런 본문들이 예수의 활동에 대한 적합한 묘사로 서로 공명하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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