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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의 교리 논쟁들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7. 29.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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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의 교리 논쟁들

서명: 삼위일체와 영성(on The Trinity and the Knowledge of God)
저자: 크리스토퍼 빌리(Gregory Of Nazianzus)
옮긴이: 백충현


교부학과 성공회 신학의 전문가인 크리스토퍼 빌리 교수의 책


인상적인 구절들 요약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자신의 활동 중간 시점에서 셀레우케이아에서 약 4년을 보냈다. 아마도 성테클라 수도원(St. Thekla’s Monastery)에서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들이 드물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인 성향, 수도원적인 삶이 혼합된 생활에 대한 공언, 그리고 이후의 저작에서의 더 큰 신학적 초점을 고려하면, 그가 이곳에서 더 깊은 신학적 연구를 행하면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었음이 아주 확실하다. 습관적으로 그는 성경과 오리게네스에 계속 몰두하였다.

이때까지의 저작에 따르면, 그는 당시의 유사파의 우세한 상황과 자신 및 동료들이 공언하는 온전한 삼위일체 교리 사이에 있는 긴장들에 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와 같은 광범위한 쟁점들을 인식하면서 자신의 신학적 발전을 지속하였을 것이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360년대 초에 교회활동을 시작할 때에는 자신이 양육을 받으면서 배웠던 삼위일체 신앙이 제국의 공식적인 교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였다. 콘스탄티우스는 351년 단독 황제로 즉위한 이후로 이전의 특수하고 협소한 “에우세비오스적” 신학에 근거하여 제국의 교회적 일치성을 공격적으로 증진하고자 하였다.

325
년 니케아 공의회 어간에, 카이사레이아의 에우세비오스, 니코메데이아의 에우세비오스, 궤변론자 아스테리오스가 이끄는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자가 초월적 하나님의 지식의 매개자 및 계시자로서 구별되는 천상적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그들이 보기에 니케아에서 제시되고 있던 새로운 교리와는 반대였다.

그들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세 본체들또는 위격적/존속적 존재들이라고 논증하였고, 그리스도를 주로 성부 하나님의 형상으로 여겼다.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인데, 이런 논리가 되면 아담과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 아닌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성자의 실재적 존재에 의해서만 사람들이 초월적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런데 신학자 마르켈로스는 성자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며, “성부의 본질로부터출생한다는 니카이아의 구절들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고린도전서 1524-28절에 근거하여 마르켈로스는 종말에 성자가 성부에게로 완전히 포함될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함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에우세비오스주의자들은 아레이오스(Arius)를 지지하였다. 320년대에 아레이오스의 가르침에 관한 논쟁의 발발에서부터 336년 아레이오스가 죽을 때까지 지지하였다. 부분적으로는 궁정에서의 마르켈로스의 영향 덕분에, 알렉산드레이아의 알렉산드로스와 그의 후임자 아타나시오스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레이오스와 에우세비오스 주의자들에 대하여 애매한 승리를 그럭저럭 확보하였다.

어떠한 사람들은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상이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상이본질적 교리를 고취시킨 것이 무엇인지는 불분명하다. 아타나시오스의 호소가 니카이아에서 더 커지고 있다는 점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고, 또한 단지 성부의 비출생, 즉 성부 하나님은 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묵상 과정의 결과일 수도 있다. (즉 성자는 출생하는데, 성부는 출생하지 않음으로 둘의 본질 역시 같을 수 없다는 뜻. 비출생은 상이 본질파 신학의 중심적인 범주였다.”[1]

그러나 상이 본질파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명파들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점을, 즉 창조주/피조물 같은 개념들이 성부/성자와 같은 개념들과는 예리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을 논증하였다. 이러한 점은 아타나시오스가 330년대 이후로 에우세비오스주의자들에 반대하여 논증하였던 점이었다. 서명파들의 주장에 따르면, 창조주-피조물 구별과는 대조적으로 성부-성자 관계는 성자가 성부와 본질에 있어서 유사함을 의미한다. 이 구절로 인하여 서명파 지지자들은 이후로 유사본질파라는 명칭을 얻었다.[2]

유사본질파 학자들은 니카이아의 동일 본질이라는 용어가 세 위격들의 구별을 양태론적인 방향으로 타협한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 용어를 계속 거부하였다.

본질이라는 개념이 성경 안에 명시적으로 진술되어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암시적으로 포함되어 있음을, 그리고 성자의 출생을 가리키는 성부라는 용어가 단순히 하나님에게 기원이 없음을 말하는 “비 출생”이라는 용어보다 하나님을 가리키는 더 분명한 용어이다.

위격들에 관하여 말하지만, 세 위격들이 세 첫 원리들(three first principles), 또는 세 신들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누구든지 파문한다. 황제 콘스탄티우스의 유사파적 기획의 신앙 고백은 성경에 따라 성부와 유사함을 진술하였고 (“모든 점들에서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다우시아와 휘포스라는 용어들의 사용도 모두 금지하였다.

아타나시오스는 유사 본질파가 니카이아의 두 번째 구절, 즉 성자가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구절이 성자가 성부의 본질로부터이라는 개념의 필연적인 귀결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아타나시오스의 끈질긴 주장에도 불구하고, 앙키라의 바실레이오스와 같은 아시아 신학자들은 그리고 다음 10년에는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와 나지 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도 또한 – 니카이아에 충실한 강력한 삼위일체적 신앙을 다른 용어들로 표명하는 과제에 계속 접근한다.

그들도 또한 결국 동일 본질이라는 니카이아 용어의 유용성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부의 본질로부터라는 구절을 채택하지도 않고, 또한 성자가 성부의 존재에 내적이라는 아타나시오스의 독특한 개념도 채택하지 않는다. 통상적인 교과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아타나시오스는 350년대와 360년대에 니카이아 교리의 지지를 하나로 통합하는 거대한 힘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현저하게 다른 방식들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매우 독립적인 전통들을 다루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신학적 발전들에 비해서 360년부터 380년까지의 신학적 발전들은 덜 분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를 이상적인 입장들과 너무나 성급하게 동일시하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 황제 콘스탄티우스가 361년에 사망하자 삼위일체적 신학자들은 새로운 추진력을 자유롭게 모았다. 황제 콘스탄티우스의 유사파적 운동이 끝났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반기독교적 후계자 황제 율리아누스는 여러 파들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기 위하여 추방되었던 모든 감독들을 불러들였다. 이렇게 하여 친 니카이아주의자들과 다른 삼위일체론자들이 재조직되었다.아타나시오스는 계속해서 양진영이 기독론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더 많은 점들에 합의하였다고 설명한다. , 말씀이 선지자 안에서 거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신이 육체가 되고 마리아로부터 인간이 되었음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는 인간적 영혼 또는 정신이 없지 않음을,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또한 사람의 아들이 되었지만 하나의 아들이지 두 아들들이 아님을 합의하였다고 설명한다.

비록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아타나시오스의 활동의 직접적인 계승자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리고 참으로 아타나시오스의 제안들이 대부분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362년 교회회의에서 제안되었던 것과 현저히 비슷한 의제를 제시할 것이었다.

아폴로나리우스주의란?
즉 그리스도는 인간적 정신이 부족하다는 가르침을 가리킨다.

아래에서 이 문제를 상세하게 다룰 것이지만, 현재로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친 니키아적 공동체를 강화하기 위한 사명을 정말 감당하는 동안, 그는 아폴리나리오스주의자들을 대적하기 위한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에, 그리고 사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디오도로스와 그의 안티오케이아 동료들이 제안하는 기독론과는 현저하게 다른 기독론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정치적 정세가 급변하면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한 번 더 지도력을 발휘하는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 제국의 권력의 중심에서 친 니카이아적 공동체의 목회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의 교회 활동의 가장 짧은 단계이면서, 그러나 가장 많은 결실이 있는 단계가 시작되었다.

개인적 정리
아타나시우스가 정통교리의 선구자이긴 하지만 그가 니케아에서 분명히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퍼포먼스에 불과했다. 그가 승리했지만 당시 교회에는 동일 본질 교리와 차이를 보이는 다른 유형의 목회자들이 로마 교회에서 계속 사역하고 있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교리적 가르침이 공존했던 것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상징적인 승리를 분명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승리가 로마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지방 곳곳에서는 각개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정통 기독교 역사 신학자들은 아타나시우스의 니케아 승리 이후 모든 것이 끝났다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유사본질파적 입장을 보였던 목회자들이 점점 동일 본질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점진적인 정통 교리의 납득 과정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아타나시우스가 니케아에서 승리했지만 이후에 등장했던 율리아누스나 다른 황제들에 의해서 꽤나 정통교리 추종자들은 고전을 하게 된다.

즉 권력의 중앙에서 고전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중앙에서 고전이 시작된다고 해서 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준비시킨 사람들이 지방 곳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도 이 중 한 명이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신학과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이 본질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비록 그들은 동일 본질을 강조한 니카이어의 유용성을 인식했지만, "성부의 본질로부터"라는 구절을 채택하지도 않았고, 성자가 성부의 존재에 "내적"이라는 아타나시오스의 독특한 개념도 채택하지 않았다. 통상적인 교과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아타나시오스는 350년대와 360년대에 니카이아 교리의 지지를 하나로 통합하는 거대한 힘은 아니다. 그는 선구자였지만, 이를 통합하고 주도하는 역할은 다른 신학자들의 몫이었다.

상이 본질론을 주장했던 사람들의 구체적인 논리적 전개 과정이나 근거가 불명확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아폴로나리우스
주의에 대해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그렇게 격렬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1] 앞의 제안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Behr, Nicene Faith, 87; 뒤의 제안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라. Ayres, Nicaea, 147.

[2]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와 같은 유사 본질 주의자들은 이제 동일 본질적 교리에로 훨씬 더 근접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아타나시오스는 곧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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