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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381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의 사역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8. 1.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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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삼위일체와 영성
저자: 크리스토퍼 빌리
역자: 백충현

점령당했던 콘스탄티누폴리스의 그림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콘스탄티누폴리스에서 재임한 짧은 기간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풍성한 기간이었다.그래서 이 기간은 삼위일체 정통신앙에 아주 결정적이었다.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그는 제국의 후원과는 무관하게 거의 오로지 자신의 목회적 및 신학적 노력들의 영향을 통해서 수도 안에서 친 니키아적 공동체를 강화하고 증대시켰다. 나중에 그는 이러한 역할이 자신의 경력에서 최고의 업적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수도에서 체류하는 중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도착할 때에 그는 수도 교구에서 유일한 감독이 되었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379년이 끝나기 전에 4편의 설교를 한다. 이것들은 신앙의 기본적 해설로서 신자들을 굳건하게 하고 경쟁하는 파당들의 분열을 고치려는 자신의 초기 시도들을 예증한다. 그는 자신의 설교 사명을 신학에 대한 자신의 기본적인 접근과 자신의 교리에 대한 요약으로 시작하였다. 자신의 이전의 저작에 있는 구절들을 반영하면서 그는 다음을 주장한다. ,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에 대한 올바른 이해뿐만 아니라, 이에 상응하는 상태, 즉 신학자에게서의 영적인 정화 및 사변적 자제의 상태를 모두 포함한다.

그의 마지막 설교 『논쟁에서의 중용에 관하여(On Moderation in Debate, Or. 32)』으로서 아나스타시아 교회의 상당히 많은 회중에게 전해졌다. 그는 너무나 많은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와 같이 그리고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파와 성령파와 같이,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파당들이 있음을 한탄한다. 그리고 도덕적인 이유들과 단순한 삼위일체적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거듭 평화와 일치를 호소한다(32.5, 21). 또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교사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강조한다(32.12). 그리고 다양한 지체들과 은사들이 있지만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되어 있다는 바울의 이미지를 환기시키며(32.11-13.15)[1], 모세라는 인물을 거듭 가리킨다(32.16-17).

그 이듬해 봄까지 더 이상의 설교는 없지만, 380년 겨울 몇 달 동안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생겨났다. 2월에 토오도시우스는 테살로니케에서 『쿤크토스 포풀로스』를, 즉 제국의 공식 종교는 로마의 다마수스와 알렉산드레이아의 페트로스가 고백하는 것과 같은 보편 신앙이어야 한다는 그의 유명한 칙령을 공표하였다. 이것은 동등한 위엄과 정통적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의 신성에 대한 믿음을 규정한다. 테오도시우스의 칙령이 있은 이후 여러 달 동안 아나스타시아 교회에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공동체를 반대하는 갈등과 위협들의 수위가 계속 증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인상 깊은 구절들
1. 그리스도와 태양이 모두 동쪽으로부터 나온다는 의심스러운 근거들을 대면서 동방교회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직접 다루는 특권을 옹호하였다(DVS 1680-1702). 나지안 그레고리오스는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모색했지만 그것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러 공의회의 절차들에서 서방교회가 점점 부재해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참된 신학적 일치가 확립될 어떤 가망성이라도 있다면 서방의 바램들을 고려하여야 한다고 그는 알고 있었다.

2.
소크라테스와 소조메노스 모두의 보고에 따르면, 공의회의 첫 번째 의제로서 황제와 감독들이 성령과 다투는 자들및 그들의 지도자 엘레우시스를 다수파와 화해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였지만, 그들이 거부하고 떠나버렸다. “성령과 다투는 자들이 잠시 참여하였지만 나중에는 영원히 떠나버렸던 것 같다.


3.
그런 후에 황제의 주도로 공의회는 보편 신앙의 합의문을 중재하고자 시도하였다. 이것은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와 같은 삼위일체론자들과 379년 멜리티오스의 교회회의에 참석한 감독들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또한 아마도 양태론의 낌새가 보이기 때문에 성령의 신성을 고백하는 데에 불편해하였던 감독들을 대표할 것이었다. 논의들이 진행되는 동안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감독들이 삼위일체에 대한 온전한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교리가 혁신적인 것이라고 여겨 반대했다(DVS 1760).

4.
그들은 이 시점에서 성령과 다투는 자들을 여전히 포함하는 더 많은 다수파에게 호소하고자 하는 바램으로 테오도시우스가 권고하였던 것처럼 더 중도적인 입장을 선호하였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자신의 가까운 일부 친구들조차도 그가 그러한 방침에 따르도록 설득하고자 하였다고 말한다. 친구들 중에서 아마도 니사의 그레고리오스를 가리키는 것 같다.

5.
그러나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견해에 따르면, 그러한 제안은 기만적으로 및 부정직하게 비정통적이고, 그래서 제국의 미심쩍은 의제에, 권력자에게 좋은 것은 무엇이든지!”라는 것에 기여하게 될 수 있었다.

6.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안티오케이아의 승계에 관한 논쟁이 공의회를 오랫동안 괴롭히는 중심적인 문제라고, 또한 정통신앙을 널리 알리지 못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나중에 여기게 되었다. 이집트인들이 제기한 비난들에 대답하기 위하여 그가 감독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대신 사임하는 설교로서 그들을 놀라게 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모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마지막 자리의 설교에서도 삼위일체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만약 감독들만이라도 참 신앙 안에서 연합할 것이라면, 그는 배를 위하여 물속으로 던져진 요나와 같은 역할을 비록 그의 경우에는 폭풍우를 자신이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런 후에 회의 밖으로 걸어나왔고, 감독들은 충격 속에서 박수를 보내고 존경을 표했다. 그는 황제에게로 가서 사임에 대한 동의를 요구했다.

7.
그는 공의회는 교회법들을 통하여 니카이아 신앙이 여전히 확립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였고 모든 이단들을 비난하였다. 특히, 비유사파 에우노미오스주의자들, 아레이오스적인 에우독시오스주의자들, 반 아레이오스적 성령과 다투는 자들”, 사벨리오스주의자들, 마르켈로스 주의자들, 포티노스주의자들, 아폴리나리오스주의자들을 비난하였다.

8.
더욱 의미가 있는 점은 성부와 동일본질이다라는 니케아 구절이 빠져 있는 것이다. 이 구절이 처음에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후 유사 본질파 성령과 다투는 자들과 협상을 하는 동안 생략되었을 수 있다. 성자의 동일 본질을 아타나시오스가 설명하고 옹호하는 데에서 이 구절이 차지하는 중심적인 위치를 고려할 때, C에서 이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은 동방교회의 신앙고백들이 갖는 지속적인 독특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표지다. 이것은 아타나시오스와 이후 그를 따랐던 자들의 교리적 체계와는 구별되는 점이다.

9.
그러나 가장 중요한 점은 성령에 관한 항목에서 다음과 같은 긴 구절이 추가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생명의 주님과 시여자이신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성부 및 성자와 함께 예배를 받으시고 함께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신조가 성자에 관하여 진술하는 것과는 달리, 이 진술에는 하나님이라는 점을, 또는 성령이 성부와 동일본질이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는다.

10.
여기에서 사용된 언어는 성령과 다투는 자들의 입장을 수용하기 위하여 본래 선택된 것처럼 보이며, 그런 후에는 앞으로의 화해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편으로는 황제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다른 한편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감독들의 무리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보존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사용된 언어는 370년대 중반에 성령의 신성에 관하여 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가 취한 신중한 입장을 상세하게 반영하여 준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도 이러한 입장을 나타내었다.

11.
그러나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370년대 및 381년 공의회에서 정확히 이런 입장에 반대하였다. 그는 공의회의 교리적 작업이 그 부모와는 완전히 같지 않은 자식이라고 말하였다. 즉 공의회가 니케아 신앙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디오도로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 그리고 다른 감독들은 이와 같이 덜 공격적인 진술이 친 니키아적인 성령론을 고백하는 적절한 방식이었고, 또한 이럼으로써 교회의 평화를 조성하는 추가적인 혜택이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1] 12: 5-6; 고전 12; 4:4;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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