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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J. 게더콜, “예수는 세례 시점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나?”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8. 1.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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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하나님은 어떻게 예수가 되셨나? (How God Became Jesus)
역자: 손현선


내용 요약어만은 마가복음의 예수를 선재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이 점에서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었나』의 마가복음 묘사는 마태와 누가복음 묘사와 중첩된다. (방금 선재성에 관해 제기한 논점은 마가복음에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예수의 내가 왔노라진술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골고루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만에 의하면 마가복음의 예수 이력의 정통성은 보다 약화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마가복음의 예수는 동정녀로 잉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11, 개정]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è  이 구절에 대해 어만은 선재성과 상관이 없는 구절이라고 말한다. 이 음성은 그냥 선포에 불과하다. 마가복음에서는 바로 이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말한다. 바트 어만은 이때부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마가복음에서 하늘에서 음성이 내려오는 일이 후에 재현되는데, 그 내용 역시 비슷하다. 변화산에서 하나님이 예수에 대해 말하시는 구절을 보자.

 

è  [9:7, 개정]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같은 패턴이 다시 반복된다. 다시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 말하신다. 바트 어만은 마가복음 111절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표현이 예수의 신격화의 시작! 예수의 아들로서의 입양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내용이 한참 후인 마가복음 97절에 다시 반복된다.

다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선포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재 입양하시는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슷하게 들리는 변화산의 음성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의 예수는 신적 존재인가?
아마도 의외겠지만 이 질문에 대해 어만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의 그의 진의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서 예수는 신적 위계 또는 피라미드 상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지만 분명 정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신적 존재이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의 신은 아니다.

그러나 야웨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던 전적인 사면권, (충격적이게도 예수의 언행은 단지 구약의 하나님의 언행과 중첩되는 수준이 아니다). 죄사함이라는 권세는 신적 상하구조의 말단에 있는 god으로서 예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죄사함은 오직 한 분인 참 하나님의 고유한 전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에 관해 가장 많이 알려진 팩트 중 하나는 그가 열두 제자를 세웠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것을 새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의 단핵을 형성하는 행위라고 본다. 여기서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 상응한다(3: 13, 눅 6: 13). 그러므로 예수는 구약의 하나님의 위치를 점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마 11: 27, 10: 22. , 어떤 사람이 천부를 알게 될지 선택하는 자가 예수라는 논리가 형성된다.

그리고 바다 기적, 선지자 파송, 초자연적 지식. 성부-성자-성령 신적 삼위에 속함 등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오직 한 분인 참 하나님의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한편 누가는 분명 사도행전에서 사람에게 엎드려 절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보았다(10: 25-26). 헬라어에는 이런 경외적 엎드림을 일컫는 프로스키네시스라는 일종의 전문 용어가 있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더 대제가 그리스 백성에게 의무화한 경외의 표현이 바로 이 프로스키네시스다. 하나님 경배에 견줄 만한 이 프로스키네시스를 알렉산더 대제에게 드리지 않겠다고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1]. 

바트어만은 그의 책 1장에서 보다 광범위한 로마제국 내에서 신격은 상당히 유연한 개념이었음을 바르게 지적한다. 그리고 소수의 경우지만 일부 유대인 텍스트도 그에 대해 일정 정도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예수 당대의 유대사회의 분위기는 하나님/피조물 구분이 엄격했다는 것이다. 가령 마가복음 2장의 서기관들은 예수의 죄 사함을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신의 영역에(Divine Realm) 참여할 수 있는지에 관한 흥미진진한 실험이라고 보진 않았다.

신약의 저자들은 종종 이 경계의 중요성에 호소한다. 요한이 천사를 만난 뒤 그 눈부신 영광에 압도되어 천사 앞에 절하는 계시록 장면에서 엿볼 수 있듯이 계시록 역시 이 경계를 강조한다. 천사들은 자신들도 참 하나님을 섬기는 같은 종에 불과하며 오로지 하나님만이 경배받기에 합당하다면서 즉각 요한을 책망한다(19: 10, 22: 8-9).

 


[1] P. Cartledge, Alexander the Great (London: Macmillan, 2004), 특별히 72-73의 탁월한 설명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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