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그렇다고 해도 마태, 마가, 누가가 본 장 제목에 언급된 초기 기독교인에게 우리를 인도하지는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합의된 견해는 이 복음서들의 연대는 1세기 후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만은 신약 사복음서 중 그 어느 것도 가장 초기의 제자들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은 없다고 본다(?). 그럴지라도 어만은 초기 기독교인의 가장 원시적인 견해를 발굴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 기원후 30-50년의 초창기에 대해 어떻게 그런 작업이 가능한지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만의 답변은 현존하는 신약 저술의 최종 텍스트 안에서 이전 견해들의 흔적을 감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만은 이것을 “문헌 이전 전승(preliterary)”이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마태나 누가가 제시했듯이 잉태나 출생 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게 아니었다. 예수는 어만의 눈으로 본 마가가 제시하듯이 세례 시 하나님의 아들도 된 것도 아니었다. 답은 예수 교육계획안의 더 뒷부분에서 찾아야 한다. 어만에 의하면 이 문헌-이전 전승들은 예수가 부활 시점에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입장 위에 서 있다.
로마서 1장 3~4절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많은 다른 학자들의 뒤를 이어 어만은 여기에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 원시 기독교 신조가 있다고 규명한다. (a) 예수는 육신적, 인간적 차원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며, (b) 영적, 초인적 차원으로는 하나님의 후손이었다. 이 후손의 지위는 부활 시 양자가 됨으로 예수에게 수여된 것이다.
여기 개별적으로 고려해야 할 두 사안이 있다. 첫째, (1) 이것이 ‘바울-이전’ 신조인가 아닌가의 문제다. 둘째, (2) 이 신조의 원래 문안을 어떻게 규명할 수 있는가이다. 어만이 내린 결론은 바울은 그저 이 신조의 원시 문구에 로마서 1:4의 “능력으로”를 덧붙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다 추정이다.
반박
로마서 1: 3-4이 바울 이전 신조라는 진술은 충분히 합리적인 추정이다. 이 진술은 이런 논의에서 통상 사용되는 평가 잣대, 가령 긴밀한 병행 구조와 이례적 언어 사용 등을 일부 충족시킨다. (예를 들면, “성결의 영”이라는 문구는 바울과 병행성이 없다). 이 진술이 초기 기독교인의 신조였을 가능성은 상당하다.
어만은 한 발 더 나아가 (3)이 정형화된 문구가 아람어 배경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므로 아마도 문헌-이전 정형 중 가장 최초일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 정형화된 문구가 “전체 바울 서신 중 가장 오래된 신조의 단편이라고 논증할 수 있다”. 어만은 이 정형화된 문구가 예수와 그의 첫 제자들이 쓰던 언어인 아람어로 된 원래 신조에서 온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왜냐하면 로마서 1:4의 “성결의 영”은 헬라어로는 일상적 표현이 아니지만 아람어나 히브리어 구문론 패턴이 반영되어 그런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헬라어 속 ‘셈족어 현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추정 위에 서 있는 추정 위에 서 있는 추정을 본다. 역순으로 다루어 볼 수 있다. “성결의 영”이라는 문구가 ‘셈족어 현상’처럼 들린다고 할지라도, 이 신조의 원문이 아람어에서 왔다고 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학계에서 1세기 넘게 널리 인정된 바와 같이 ‘셈족어 현상’은 이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2)에서 이 논증의 추측성이 가장 확연히 드러나며 순환성이 가장 악한 지경에 달한다. 이 정형화 문구에는 신학적으로 기이하게 보이는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예수가 이 땅에서 다윗 왕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 내용은 바울 서신으로 확증된 다른 서신들에서는 강조된 적이 없다는 말은 충분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딤후 2:8을 보라)
그러나 이 다윗 계열의 메시아 됨은 “바울 저술의 다른 부분에서는 언급된 적이 없는 견해”라는 말은 부정확하다. 로마서 마지막 부분으로 페이지를 넘겨보면 예수가 “이새의 뿌리”라는 이사야의 말이 인용된 것을 볼 수 있다(롬 15: 12, 사 11: 10).
어만은 아래와 같은 삼단논법을 사용한다.
1) 신조의 성경을 지닌 정형화 문구는 양자론적 기독론을 천명한다.
2)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는 양자론적 사상을 저해한다.
3) 그러므로 “능력으로”는 바울이 덧붙인 것이다.
내가 폐기하고 싶지 않은 개념은 (1) 로마서 1:3-4이 바울-이전 정형화 문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견해를 “채택”할 때에는 항상 상당 정도의 추정이 들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이 추정 위에 무언가를 쌓아 올리기 전에 잠시 멈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만은 쌓아 올리기를 감행하며 (2) 이런 신조적 정형화 문구 내에 어떤 부분이 원문이고 어떤 부분이 바울의 덧붙임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선명한 잣대가 존재한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이 분별의 과정은 산 넘어 산이다. 요는 더러 이런 문제에 대해 추측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추측에 개연성의 힘을 부여하여 그 추측을 다른 논증의 토대로 사용하는 데까지 진행하는 것은, 별로 미려한 표현은 아니지만, 변론할 수 없을 만큼 나쁜 방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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