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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 J. 게더콜의 ‘터널기’: 문헌-이전 정형화 문구 속 예수 반박 (로마서 1장을 중심으로)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8. 8.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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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그렇다고 해도 마태, 마가, 누가가 본 장 제목에 언급된 초기 기독교인에게 우리를 인도하지는 못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합의된 견해는 이 복음서들의 연대는 1세기 후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어만은 신약 사복음서 중 그 어느 것도 가장 초기의 제자들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은 없다고 본다(?). 그럴지라도 어만은 초기 기독교인의 가장 원시적인 견해를 발굴하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 기원후 30-50년의 초창기에 대해 어떻게 그런 작업이 가능한지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만의 답변은 현존하는 신약 저술의 최종 텍스트 안에서 이전 견해들의 흔적을 감별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만은 이것을 문헌 이전 전승(preliterary)”이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예수는 마태나 누가가 제시했듯이 잉태나 출생 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게 아니었다. 예수는 어만의 눈으로 본 마가가 제시하듯이 세례 시 하나님의 아들도 된 것도 아니었다. 답은 예수 교육계획안의 더 뒷부분에서 찾아야 한다. 어만에 의하면 이 문헌-이전 전승들은 예수가 부활 시점에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입장 위에 서 있다.

로마서 13~4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많은 다른 학자들의 뒤를 이어 어만은 여기에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된 원시 기독교 신조가 있다고 규명한다. (a) 예수는 육신적, 인간적 차원으로는 다윗의 후손이며, (b) 영적, 초인적 차원으로는 하나님의 후손이었다. 이 후손의 지위는 부활 시 양자가 됨으로 예수에게 수여된 것이다.

여기 개별적으로 고려해야 할 두 사안이 있다. 첫째, (1) 이것이 바울-이전신조인가 아닌가의 문제다. 둘째, (2) 이 신조의 원래 문안을 어떻게 규명할 수 있는가이다. 어만이 내린 결론은 바울은 그저 이 신조의 원시 문구에 로마서 1:4능력으로를 덧붙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은 다 추정이다.

반박
로마서 1: 3-4이 바울 이전 신조라는 진술은 충분히 합리적인 추정이다. 이 진술은 이런 논의에서 통상 사용되는 평가 잣대, 가령 긴밀한 병행 구조와 이례적 언어 사용 등을 일부 충족시킨다. (예를 들면, “성결의 영이라는 문구는 바울과 병행성이 없다). 이 진술이 초기 기독교인의 신조였을 가능성은 상당하다.

어만은 한 발 더 나아가 (3)이 정형화된 문구가 아람어 배경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므로 아마도 문헌-이전 정형 중 가장 최초일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 정형화된 문구가 전체 바울 서신 중 가장 오래된 신조의 단편이라고 논증할 수 있다”. 어만은 이 정형화된 문구가 예수와 그의 첫 제자들이 쓰던 언어인 아람어로 된 원래 신조에서 온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왜냐하면 로마서 1:4성결의 영은 헬라어로는 일상적 표현이 아니지만 아람어나 히브리어 구문론 패턴이 반영되어 그런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헬라어 속 셈족어 현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추정 위에 서 있는 추정 위에 서 있는 추정을 본다. 역순으로 다루어 볼 수 있다. “성결의 영이라는 문구가 ‘셈족어 현상처럼 들린다고 할지라도, 이 신조의 원문이 아람어에서 왔다고 하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 학계에서 1세기 넘게 널리 인정된 바와 같이 ‘셈족어 현상은 이보다는 훨씬 복잡하다.

(2)
에서 이 논증의 추측성이 가장 확연히 드러나며 순환성이 가장 악한 지경에 달한다. 이 정형화 문구에는 신학적으로 기이하게 보이는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예수가 이 땅에서 다윗 왕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 내용은 바울 서신으로 확증된 다른 서신들에서는 강조된 적이 없다는 말은 충분히 맞는 말이다. (그러나 딤후 2:8을 보라)

그러나 이 다윗 계열의 메시아 됨은 바울 저술의 다른 부분에서는 언급된 적이 없는 견해라는 말은 부정확하다. 로마서 마지막 부분으로 페이지를 넘겨보면 예수가 이새의 뿌리라는 이사야의 말이 인용된 것을 볼 수 있다(15: 12, 11: 10).

어만은 아래와 같은 삼단논법을 사용한다.
1)
신조의 성경을 지닌 정형화 문구는 양자론적 기독론을 천명한다.
2) “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는 양자론적 사상을 저해한다.
3)
그러므로 능력으로는 바울이 덧붙인 것이다.

내가 폐기하고 싶지 않은 개념은 (1) 로마서 1:3-4이 바울-이전 정형화 문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견해를 채택할 때에는 항상 상당 정도의 추정이 들어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면 이 추정 위에 무언가를 쌓아 올리기 전에 잠시 멈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만은 쌓아 올리기를 감행하며 (2) 이런 신조적 정형화 문구 내에 어떤 부분이 원문이고 어떤 부분이 바울의 덧붙임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선명한 잣대가 존재한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이 분별의 과정은 산 넘어 산이다. 요는 더러 이런 문제에 대해 추측할 수도 있지만 자신의 추측에 개연성의 힘을 부여하여 그 추측을 다른 논증의 토대로 사용하는 데까지 진행하는 것은, 별로 미려한 표현은 아니지만, 변론할 수 없을 만큼 나쁜 방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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