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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안조스 그레고리오스의 경륜과 신학에 대한 개념 이해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5. 14.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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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삼위일체와 영성(Gregory of Nazianzus on the Trinity and the Knowledge of God)
출판사: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저자: 크리스토퍼 빌리(Christopher A. Beeley)
역자: 백충현

 

시간이 나면 한 파트씩 꼼꼼하게 읽어보고 싶다

 

개신교인으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에 대해 들어볼 일이 전혀 없었다. 예전에는 그냥 나지안조스가 캅바도기아 교부들 중 한 명에 해당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는 바실레이오스 및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와 함께 세 명의 카파도기아 교부들(Cappadocian Fathers) 중 하나로 명명된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빌리는 이 명칭이 세 명 사이의 유사점들을 과장하고, 때때로 심각한 차이점들을 모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막연하게 아는 지식으로 인해 이 세 사람의 사상도 몰랐고, 사상을 모르니 차이점도 자연스럽게 몰랐다. 그러다가 나지안조스 그레고리오스의 사상에 관심이 생겨서 백충현 교수가 번역한 ‘삼위일체와 영성’이라는 책의 IV장 삼위일체 중 1) 신적 경륜의 신학 부분을 읽어 보았다. 나지안조스의 경륜 이해와 신학을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나지안조스 그레고리오스의 경륜과 신학에 대한 개념 이해
삼위일체에 대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기본적인 접근은 “신학(theology)“과 ”경륜(economy)“이라고 명명하는 것들의 관점에서 가장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의 신적 경륜의 신학을(the theology of the divine economy) 드러낸다. 즉 신적 경륜의 의미를 더 온전히 명확하게 하고 심오하게 하며 그가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는 고대의 기독교 용어인 경륜, 즉 오이코니미아와 이것의 동족어들을 이용하여 하나님과 피조된 질서와의 관계들을 표현한다.

그의 저작에서의 ”경륜“은 성경 계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창조로부터 최종 완성에 이르기까지 피조된 질서의 일들을 일반적으로 및 특수적으로 하나님께서 목적을 가지고 통치, 운영, 배열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신적 통치에 관한 이러한 광범위한 섭리적 의미가 그의 저작에서 훨씬 더 흔하게 나타나지만, 몇몇 구절들에서 경륜은 구체적으로 성육신을 가리킨다. 즉, 신성화(theosis)로 성장하는 과정을 회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의 일들을 통치하는 일차적인 행동으로서의 성육신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서 경륜은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능동적이고 질서적이며 목적적인 주권을 지칭한다. 신적 경륜이라는 개념은 창조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활동이 계획적이며 자선적이고 질서적이라는 점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개념은 그러한 행동들과 사건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행위를 가리키면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활동들이며 또한 하나님의 활동들로서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음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신적 경륜이라는 개념은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명명하는”신학“의 의미를 암시적으로 포함한다. ”신학“이 없이는 신적 경륜의 개념이 하나님의 경륜(God’s economy)로 전혀 이해될 수 없다. 즉 그에게 있어서 신학과 경륜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신학과 신적 경륜을 대조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도 있었다. 이러한 입장은 성경 또는 교리 교부를 드러내기보다는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따른다. 『형이상학(Metaphysics)』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학적 철학(theological philosophy)”을 사변적 사상의 최고의 형태로 묘사한다. 이러한 “제일 철학(primary은 “그 자체로의 존재(Being as it is)”에 관심을 두고 사물들의 불변하는 원인들에, 즉 직접적인 경험의 대상들과는 “분리된” 불변하는 원인들에 집중한다.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 및 다른 기독교 저술가들이 “신학”을 신정 경륜과는 분리된 하나님의 본성 및 삼위일체적 관계들이라고 고려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둘 사이의 관계가 불명확하고 잠재적으로 애매하다.

 

신학과 경륜의 연결을 추구한 학자들

신학과 경륜의 분리를 추구한 학자들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기독교 교부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견해를 자주 이용하여서, 그들과 성경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른지 강조.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고 강조함.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우스에게 경륜 밖의 신학은 존재할 수 없음. 그래서 삼위일체론이 사변적이지 않고 실천적으로 적용됨.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영향을 받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경륜이라는 것 역시 세상에 존재하는 것. 그런데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결국엔 다 가변함. 하지만 최고의 사상과 철학은 바로 존재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불변하는 하나님의 본질에 해당함.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경륜 밖의 신학을 최선의 신학으로 여김. 경륜과 신학의 분리화

그러나 이미 오리게네스에게도 기독교 “신학”은 신적 경륜 안에서 계시되고 성경의 영적인 이해를 통하여 전달되는 기독교 복음이 표현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지칭한다. 오리게네스는 예수의 가르침이 복음서들 안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성을 그의 참 제자들에 계시하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특성들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것들의 흔적들을 성경에서 발견하고 그것들을 우리의 신학의 출발점들로 삼는다.”

오리게네스에게 신학은 신적 경륜 안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계시의 궁극적 목적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그러한 궁극적 목적이다.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과 플라톤 및 그리스 시인들의 가르침을 대조하기를 기뻐한다. 확실히, 신학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영원한 관계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초월적 삶에 정말로 관계한다. 그러나 신학은 신적 경륜 안에 있는 하나님의 관계에 항상 근거하며, 그러한 관계의 일차적 내용으로 간주된다.

한편 나지안조스 그레고리오스는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초월하심과 인간 지식의 모든 범주들을 초월하심을 주장하지만, 우리가 살펴보았던 것처럼 그는 신적 경륜에서 계시된 하나님과 초월적 하나님을 분리하는 생각에 대해서는 분개할 것이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에게 경륜에서 계시된 영원한 하나님은 창조 “전에” 확실히 존재하였고, 창조세계를 무한하게 초월하시며, 또한 자신이 창조세계에 어떤 식으로든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은 영원한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 즉 경륜적 계시이다.

즉, 신적 경륜이라는 개념 자체에 따르면, 하나님은 자신을 실제로 있는 그대로 계시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피조 되지 아니한 빛을 알 수 있다. 비록 약화된 형태라고 하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가 신학과 신적 경륜을 대조시키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고 그가 경륜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이 영원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어떤 분이심을 말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영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는 창조세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창조세계와 별도로 존재한다. 그리고 창조-경륜의 구별 자체가 창조세계에 초월적이시고 영원한 하나님 자신이 신적 경륜과는 별도로 알려질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즉 그에게 있어서 “경륜 밖의 신학(extra-economic theology)”과 같은 것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신학과 경륜은 평행적인 또는 경쟁적인 인식론적 범주들이 아니다. 하나님에 관한 “내재적” 양식의 사상과 “경륜적” 양식의 사상을 구별하고 또한 그것들이 서로 다를 수 있음을 허용하는 20세기의 관습은 극도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한 관습은 교부들에게서 신학이 지닌 계시적 특성을 약화시키고, 그래서 기독교 교리의 근거 자체를 약화시킨다. 나지안조스 그레고리오스는 신적 경륜으로부터 시작하고 그 안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에게 신학은 즉, 삼위일체론은 – 영원한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과 관련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피조된 질서 안에서 신적 경륜의 의미로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에 및 기독교 교리 전체에 다가가는 그의 기본적 접근은 “신적 경륜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divine economy”으로 가장 잘 규정될 수 있다. 그의 접근은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거나 대조되는 경우가 결코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그의 교리는 성경의 언약들과 교회의 계속되는 삶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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