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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보그와 톰라이트의 역사적 예수 이해 비교 (이정배, 감신대 교수)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5. 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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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명: 그리스도론(Chirstology)
발제자: 이정배 (감신대 교수)

 

 

예수의 역사적 부활을 부인하는 도미닉 크로산 (출처: SBS 신의 길, 인간의 길)

 


I. 들어가는 글
현실 교회의 난맥상이 회자될 때마다 사람들은 초기 교회나 예수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은 희망한다. 2000년 역사를 거치면서 교회가 주는 물이 생수가 아닌 흙탕물로 변했다는 공감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초기교회인지 아니면 역사적 예수인지를 재차 묻지 않을 수 없다. 초기 공동체의 고백적 산물로서 성서는 그 자체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해석인 까닭이다.

소위 신앙의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간의 일치 여부가 현대 성서 학계의 핵심 사안이 된 것도 이점을 반영한다. A. 슈바이처와 R. 불트만을 거치면서 역사적 예수를 더는 알 수 없다는 것이 지난날의 통념이었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 없는 신앙의 그리스도가 가현설에 빠질 수 있다는 그 제자들의 생각도 결코 틀리지 않았다. 이 점에서 필자는 예수에 관한 신앙과 역사의 시각을 각기 복음주의와 자유주의로 양분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역사적 예수의 그리스도론은 양자 간의 분리를 통해서는 정초되기 어렵다는 것을 필자 역시 긍정한다. 그럼에도 역사적 예수상이 그리스도론의 시대적 역할을 위해 복원되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일점의 이의가 없다. 보수근본주의 그리스도교의 폐해를 경험한 미국의 지성인들에 의한 종교적 영성에 대한 갈급함이 또한 요인일 것이다. 진화론을 비롯한 현금의 과학적 세계관은 신앙의 그리스도를 감싼 초자연적 신관, 유신론의 틀을 더는 인정치 않고 있다.

이런 정황에서 영의 사람으로서 예수의 재발견은 대안 문화를 향한 동력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난 10년간 복음주의 일색의 한국 그리스도교 내에서 역사적 연구결과물들이 번역 소개 된 것은 의미가 크다 [1].

 

역사적 예수에 터하여 믿기를 넘어 예수처럼 살기를 목회의 근본 강령으로 삼는 공동체 운동까지 형성되었으니 그 열매가 한국에서 맺어진 셈이다. 최근 새로운 그리스도교, 그리스도인의 재주체화를 표방하며 Q문서를 비롯하여 도마복음 연구가 활성화되고 있는 것도 모두 그리스도교 뿌리 찾기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역사적 예수의 한국적 수용에 있어 아직 정리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여전히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간의 관계성 문제이다. 인습화된 케리그마 신앙의 토대 위에 역사적 예수를 덧입히는 방식의 양자 간의 결합은 충분치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2].

하지만 우리는 성서가 저마다 다른 시공간 속에 사는 우리에게 ‘너희는 날 누구라 하느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그리스도교가 이미 그랬었고 북미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 역시도 미국의 정치문화적 정황을 반영한 것이 틀림없다.

II.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의 그리스도교 비판의 근거 – 부활 이전/이후 예수 상의 구별
복음서의 근간을 이루는 Q 자료의 실체가 밝혀지고 도마서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역사적 예수, 소위 부활 이전의 예수에 대한 관심이 성서학계에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들 자료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교 케리그마의 본질로 일컬어진 동정녀 탄생, 부활, 재림, 그리고 대속 등의 초자연적 사건에 대해 일체 언급이 없을 뿐 아니라 그 상태로서 초기 예수 공동체를 형성해 왔다는 사실에 있다.

 

성서가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정경화되기까지 300년 이상을 이들 자료들이 여타의 것들과 공존했다는 것은 중요한 사안이다. 비록 이들이 서로 갈등이 없지는 않았겠으나 상대를 부정하는 이단 시비 같은 것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정경화된 성서를 기록 순으로 분석해 보아도 예수가 신화화, 신앙화되는 과정을 여실히 알 수 있다. 예컨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성서적 다양성의 표현이라고 보기에는 60-70여 년에 걸친 교리적 발전과정으로 인해 그 차이 여기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

요한서에 기록된 선재설은 Q는 물론 마가 자료의 빛에서 볼 때 너무도 엄청난 비약적 변화인 까닭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는 과정에서 부활 이전의 예수상이 위축되고 초자연적 유일신의 신성으로 발전된 것도 객관적 사실 중의 하나다. 주지하듯 초기 교회는 창세기 1-3장에서 로마 권력과 맞설 수 있는 자유의지를 읽었으나 후일 로마를 주도했던 신학자들에 의해 같은 본문이 인간 타락의 징표로 재해석되었던 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인간의 원죄설이 전면에 등장했고 그럴수록 대속설과 교회론이 중요했으며 초자연적 유일신 개념이 강조되어야만 했는데, 이는 결국 그리스도교와 로마제국 간의 밀착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 소위 케리그마 신학자들의 비판이 결코 적지 않았다. 인습화된 신조에 적응된 목회 현실에 역사적 예수가 부담이었던 것도 비판의 요체였을 듯하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M. 보그와 톰 라이트의 차이를 서로 비교해보자.

 

M. 보그

톰라이트

관점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예수가 아니라 밖에서도 유의미한 예수상을 바라며 이를 위해 예수 시대의 외부자들(교차 문화적)의 시각이 필요함 [3].

내부자의 시각을 중시함. 복음서 재료의 예수 의존성을 한층 강조하지만 이들 모두는 역사적 예수가 당시의 지평과는 다른 진리를 내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고히 했다.

역사? 은유?

복음서의 예수 자체가 아니라 기억된 역사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본다. 복음서 기록은 예수 사후 30-40년이 지난 후 생겨난 것임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부활절 이전의 예수가 실종되었다.

그러나 톰라이트를 비롯한 학자들은 보그의 견해와 달리 부활 체험 이후 내부자의 신앙적 열정의 산물이라고 본다. 절대 은유(기억)만이 아님.

방법론

신앙과 역사의 통합 대신 분리를 시도

신앙과 역사의 통합된 세계의 중요성 강조

예수의 자 의식

예수가 자의식을 가졌다는 이미지는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지, 절대 그분이 그런 자의식을 가지진 않았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만이 아니라 자신의 현존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개입함을 믿는 존재. 예수는 스스로가 메시아로서 구원을 가져올 자라는 자의식의 소유자였다.

정체성

유대적 신비가 [4] (예수에게서 하나님 체험, 곧 신성한 존재와 연결된 강한 합일 의식이 강렬했다). 신비가인 예수에게 하나님은 초월적 타자. 범재신론적인 존재.

A. 슈바이처가 그랬듯 자신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믿은 메시아적 소명과 목적의 증표[5]

부활

소위 육체적 부활이라는 것은 부활절 진실과 무관한 것이다. 누가복음 24: 13-35절에서 부활 사건의 본질을 읽어낸다. 죽었다고 생각한 예수가 제자들 자신과 함께 길을 걷고 있다는 체험. 그의 죽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 체험적 실제(Experiential Reality). 제자들의 고백이 바로 부활의 현실태이다.

초기 교회의 믿음은 예수의 육체적 부활. 유대적 배경에서 부활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새 창조의 도래. 향후 올 시대의 시작. 비록 예수 한 개인에게 일어났으나 역사와 종말과 연루된 한에서 그것을 미래에 대한 희망, 새 출애굽의 징표. 부활을 인정하는 것이 그분의 메시아성을 풀어내는 열쇠

의미

당시 지배체제인 로마가 결코 주님일 수 없다는 생사를 건 고백. 부활은 삶의 명령이 된다.

부활은 속죄 신학이 전제하듯 보편적 죄와 연관

신조

니케아 신조 역시 당시 문화권 안에서 토착화된 한 범례로 이해해야 한다. -> 예수는 유일한 구원이라고 불릴 수 없다.

신조를 인정 -> 예수는 유일한 구원.


이정배 교수의 주장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초자연주의가 근본주의로 탈바꿈되어 교회 안팎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스퐁의 말대로 상술한 다섯 신조 없이도 그리스도교는 존재하며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더는 유배당한 그리스도인을 양산시키지 않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의외로 복잡치 않고 단순하다. 예수를 격하시키는 일 바로 그뿐인 까닭이다. 적어도 바울의 부활 체험은 초자연적 유신론과는 무관했다. 이 점에서 바울에게 부활은 “사실(Fact)은 아니었으나 진실(True) 한 것”이었다는 크로산의 말은 의미 깊다.

 

복음서의 모태인 60년 후반의 자료, 마가에도 초자연적 유신론의 내용이 본격화되지 않았다. [6]예수의 하나님 아들 된 시점을 요단강 세례로 서술한 것이 그 증거이다. 하지만 초자연적 유신론의 등장 이후 예수의 인간성이 후퇴하게 된다. 하지만 이는 가현설을 비판했던 교회가 가현적 종교로 변질되는 자기모순을 고지할 뿐이다. 보그와 도미닉 크로산은 바울이 로마제국의 지배체제에 반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말하며, 노예제도의 폐지, 가부장제 수정 등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로마의 지배체제와 구별된 사회적 평등이 바울신학에서 예수가 주님이란 고백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었다. 하여 바울은 영적이란 말로서 로마제국의 질서와 다른 삶의 양식을 지시할 수 있었다. 한편 보그가 이해한 범재신론의 논점은 다음처럼 요약된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을 둘러싸는 영인 바, 만물이 그 속에 존재한다.

하여 우주와 하나님은 처음부터 분리되지 않았고 영안에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인격성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범재신론이 인격을 초월하는 일면을 갖지만 결코 비인격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보그는 관계성의 다른 표현인 ‘임재(Presence)’ 경험 속에서 인격/비인격 양면이 충족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7]보그는 예수를 신비가라고 표현했다.

 

신비가란 하나님 임재를 감지하는 사람이다. 들의 백합, 공중의 새조차 그에게 하나님 임재의 징표로 여겨졌으며 감옥 속의 존재와 자신을 일치시켰고 자신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하여 예수는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장 소리를 듣게 하며 그의 성격을 고지하는 은유이자 성례전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역사적 예수가 맞섰던 제국적 상황의 탈 맥락화가 생겨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역사적 예수가 보편적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기에 부정적으로 볼 이유는 없다. 재차 강조하지만 역사적 예수의 영 그리스도론은 현대인들에게 풍부한 감수성을 수여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성의 부족함을 지적받지 않을 수 없었다.

 


[1] 이 점에서 우리는 한국기독교연구소를 운영하는 김준우 교수의 공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J. 도미닉 크로산 『역사적 예수(2000)』를 비롯해 M. 보그의 최근의 책 『기독교의 심장(2009)』에 이르기까지 10여 권의 관련 책들을 번역 출판했다.

[2] 실제로 예수살기 모임에 참여한 대다수 목회자들에게 신앙의 그리스도는 여전히 불변의 상수로 자리매김되어 있고 그를 보완하는 방편으로 역사적 예수상이 수용될 뿐이다.

[3] 보그는 역사적 예수가 습화된 신앙의 그리스도와 달랐다고 주장하는 학자이다. 그는 교회 공동체의 증언, 곧 부활 이후의 예수로부터 역사적 예수의 분리를 방법론적으로 선택한 것이다.

[4] 보그가 하나님의 영, 모두를 감싸 않는 영(Encompassing Spirit)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한편 보그는 맬 깁슨의 영화 “Passion of Christ”의 ‘Passion’을 예수의 대속적 수난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정으로 볼 것을 주문함.

[5] 즉 라이트는 에수의 죽음이 유대민족의 속죄를 위해 최종적인 악과의 마지막 투쟁이었다는 것이다. 포로기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코자 했던 하나님이 예수의 자의식 속에서 더욱 보편적으로 확장되었다.

[6] J. 도미닉크로산, 한인철 역 『예수는 누구인가?』 (서울: 한국기독교연구소, 1998), 205.

[7] M. 보그, 『기독교의 심장』,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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