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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여성신학에서 조명한 우주적 그리스도론 (김정숙, 감신대 교수)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4. 30.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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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여성신학에서 조명한 우주적 그리스도론
도서명: 그리스도론
출판사: 대한기독교서회
김정숙: 감리교신학대학교

그림 출처: 김용님 (http://m.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39)


I.
여는 글
시간이 촉박하다.” “지구가 위험하다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던 경고가 더는 경고가 아닌 이상기후와 자연재해, 환경파괴라는 재앙으로 나타나 지구에 거주하는 생명체들이 죽음의 위기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이상기온으로 인해 지구촌 한편에서는 극심한 한파와 폭설이 몰아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연일 살인적 불볕더위와 홍수와 가뭄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생기고 있다. 이상기후와 재난으로 인해 죽음의 공포와 위협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은 단지 인간만이 아니다. 지구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하나의 운명공동체로서 그 어떤 것도 전 지구의 총체적 재난과 파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오늘 위기 현실의 특징이다. 양극의 빙하가 녹아 섬나라들이 물에 잠겨가고 있는가 하면 마실 물은 점점 고갈되어 가고 대기의 대지와 대양은 공해와 오염으로부터 가득해지고 있으며, 중금속과 화학약품으로부터 안전한 먹을거리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지구의 표면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만 가는 쓰레기 더미로 뒤덮여 쓰레기만을 위한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한 지경이 되었다.

스스로 자초한 전면적 파괴와 파멸이라는 전 지구적 재난의 종말 속에서 미래 세대를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종말론적 총체적 재난과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의 후손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남겨 줄 수 있을 것인가? 아직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우리가 듣고 있는 이 같은 물음들은 가능이나 불가능, 긍정이나 부정을 가늠하는 분석적이고 사색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비판적 질문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전 지구적 종말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나오는 절박한 외침이며 위기로부터 벗어나고자 도움과 구원을 요청하는 절규일 것이다.

생태여성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 전통 신학에서 주장해온 그리스도론은 자연을 배제하고 오직 인간의 구원에만 관심을 기울여 온 인간 중심적 그리스도론에 치우쳐 왔으며, 더욱이 엄밀한 의미에서 남성 중심적 관점에 치우친 여성과 자연에 대해 억압적인 가부장적 그리스도론임을 폭로하고 비판한다.

이 논문은 이와 같은 가부장적 그리스도론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본성과 역할을 인강 중심적 특히 남성 중심적 가치체계로 이원화시키고 계층화시킴으로 그리스도의 위상과 역할을 축소시키고 왜곡함으로 오늘날과 같은 생태적 위기와 재난을 초래하는 데 일조해 왔음을 밝힐 것이다.

II.
생태 여성신학:생태학과 페미니스트 신학의 만남
생태 여성학이란 생태학과 페미니즘 상호 간의 깊은 관계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정치적 운동을 말한다. 자연 생태계의 심각한 위기적 상황을 초래한 근본적인 원인과 해결점이 페미니즘이 문제로 제기하는 여성의 억압과 착취의 원인들과 여성해방이라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목적이 상호 간에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통제하여 착취하는 것과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며, 자연의 치유와 회복이 여성의 해방과 구원과 상관이 없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먼저 생태학이란 용어는 이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 오이코스의 어원과 성찰 또는 연구를 뜻하는 로고스를 합성한 말에서 유래되었으며 인간의 생존에 있어 기본적인 주거지로서의 집을 잘 돌보는 가계 살림이란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생태학이란 용어를 처음 학문적으로 사용한 사람은 에른스트 헥켈이다. 그는 1866년 생태학의 개념에 대한 정의를 살아 있는 유기체와 그 환경 사이의 상호 의존성과 상호작용에 관한 연구라고 설명한다. 산업혁명 이후 자연환경의 오염과 파괴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인간 삶에 대한 영향력이 커지자 생태학에 관한 관심이 증폭되고 이에 대한 이론과 운동이 다양한 관점으로 발전되었다.

한편 에코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에서의 주요 주제들과 생태학의 핵심적인 주제들 사이의 개념적, 상징적, 언어적 연관성을 분석하여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모든 형태의 총체적 억압 관계와 그 해결책을 밝혀내고자 한다. 생태여성신학자 로즈메리 튜터에 따르면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며 결과적으로 자연파괴를 유발하고 지속되도록 정당화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가부장적 자본주의라고 말하며, 에코페미니즘 책을 함께 쓴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즈 역시 지구상의 생명체를 위협하는 파괴적 원인으로 자본주의 가부장제 세계체제라고 지적한다.

서구 가부장적 체제의 역사에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 이성적인 특성을 남성적인 것으로 여기는 반면, 육체적이고 감성적인 것을 여성적인 것으로 동일화된다. 남성이 문명을 창조하고 문화를 발생시킨 주역으로서, 문명이 남성에게 속하는 반면 여성이 경험하는 월경, 임신, 출산의 생리적 특성이 자연의 순환과 재생산의 기능과 유사한 것에 근거하여 여성을 자연화시키고 자연을 여성화시킨다. 이 같은 이원론적 위계 체제의 가부장제 하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처럼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파괴하는 것도 정당화된다.생태계의 위기가 신학의 범주에서 사유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린 화이트가 생태학적 위기의 역사적 뿌리라는 소논문에서부터이다.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주장하기를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가 생태계의 위기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갔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였다.

 

린 화이트에게서 촉발한 생태계 위기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학의 반성과 그리스도교 책임론이 그리스도교 생태신학자들 사이에서 계속적 논쟁으로 가속화되었다. 현실에 직면한 자연환경의 파괴에 대한 책임으로 가장 중점적으로 지적되었던 신학적 주제는 특별히 그리스도교 창조신학과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지위와 역할에 대한 논쟁이었다. 그리스도교 창조 신학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 신학으로서 자연에 대한 인간 우월적 세계관을 확립했으며 자연을 돌보는 청지기로서의 인간의 역할보다는 오히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정복과 지배를 정당화시켰다고 주장하였다.

생태신학자들이 그리스도교 창조 신학에서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는 근거로 인간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데 반하여 생태 여성신학자들은 생태계 위기의 근본 원인은 추상적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구체적 남성중심주의에 있다고 폭로하였다. 인간을 지칭하는 보편적인 용어가 실제로 모든 인간, 즉 남성과 여성을 총망라한 총체적 인류를 말하는 통칭으로 사용되지만 실제로 모든 인간은 보편적 인간, 즉 성 중립적(Sexless) 인간이 아닌 구체적 남성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의 인간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지적한다.

또한 자본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생산과 소비의 순환적 틀 속에서 자연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재료로 탈바꿈하고 여성도 하나의 성 상품으로 전락시켜 여성의 인권유린과 더불어 자연의 파괴와 환경오염이라는 구조 악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한다. 이와 같이 남성이 여성을 힘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피조물을 힘으로 침탈하고 정복하는 것을 주관해 온 절대 군주와 같은 신의 이미지를 가부장적 그리스도교 신학이 서구 역사 속에서 형성하고 구체화시켜 왔으며 정당화시켜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III.
신음하는 피조물의 실존: 다이달로스의 고뇌와 절망
생태 여성신학은 정통 그리스도교 신학과 마찬가지로 이간을 비롯한 모든 우주 자연은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이며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임을 고백한다. 하나님만이 창조주라는 고백은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피조물이며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고백이다. 생태여성신학은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피조물의 일원으로서 창조주 하나님만이 자연의 주인임을 인정한다. 피조물로서 인간의 실존은 자신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던 우주 생명체의 역사 가운데 가장 최근에 등장한 진화적 생명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가장 나중에 창조하셨다는 성서의 기술은 인간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우주와 지구의 생명체가 존재해 왔으며, 인간은 시간적으로 가장 늦게 나타난 종으로서 지구의 생명 공동체에 한 거주민으로 뒤늦게 연합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성서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라고 설명한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의미는, 문명의 창조자인 인간이 무로부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력을 부여받았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보고 기뻐 탄성 하셨던 것처럼 인간은 다이달로스의 후예답게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창조 능력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안에 자신들의 세계인 문명을 창조해 왔다. 그러나 다이달로스의 날개가 아무리 정교하고 사실적이라 해도 무로부터 창조된 하나님의 생명체와 다를 수밖에 없듯이 인간의 창조는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와는 달리 유로부터 유의 창조라는 한계를 가진다. 즉 인간의 창조와 하나님의 창조는 메울 수 없는 질적 차이가 있으며 인간은 이 같은 질적 차이를 혼동해서도 안 되며 결코 잊어서도 안 된다는 신학적 고뇌가 있다.

한편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것처럼 자연과 인간 사이에 인간이 만든 문명이라는 세계가 없었다면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일부분으로서 영원히 자연의 순환과 반복 과정에 종속되었을 것이다 [1].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는 창조하는 재료만 다른 것이 아니라 그 원리도 다르다. 하나님의 창조는 말씀의 선포를 통한 평화적 창조였다고 한다면, 반면에 인간이 문명을 창조하는 과정은 분리와 환원과 폭력의 원리가 작용할 뿐이라는 실존적인 한계가 있다.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체로 재생산하여 번성하게 하고 자연의 다양성에 풍성함을 더하는 풍요의 법칙이 따르는 반면,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영역인 자연에 대한 침해와 제거와 분리 등 강압과 폭력이 지배하는 환원의 법칙만이 따를 뿐이다. 즉 지구의 모든 것이 상품으로 환원되었고 인간도 자연도 상품의 생산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인간 자신들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다 함께 현실적 종말의 위기와 재난 가운데 고통으로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 몸이 구원받기를 고대하고 있다(8: 22-23). 종말적 생태계의 파멸로부터의 구원은 지속 가능한 세계로의 전환이라는 은총이며, 이 같은 총체적 응답으로서의 구원은 반드시 인간적 대안이 아닌 신학적 대안으로 제시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피조물의 한계를 일탈하여 동료인 자연과 여성을 억압하고 주권을 침탈해 온 죄에 대한 전적 회개와 그리스도를 통한 전적 구원의 은총으로 새로운 존재로의 거듭남에 대한 겸허한 기다림, 그래서 우주적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관계가 치유되고 회복되는 새로운 출발, 이것만이 전 지구적 파멸 속에서 탄식하는 우리에게 그리고 모든 피조물에게 구원의 희망, 지속 가능한 미래를 허락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IV.
가부장제적 그리스도론: 타락과 구속의 구세주, 남성 예수와 배타적 그리스도론
신학적 주제로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중의 하나는 아마도 구원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구원에 대한 관심은 진공상태에서 나오는 추상적 관념의 문제나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상의 관심과는 다른 필연적으로 구원되어야 할 실존적 상태나 구체적 상황에서 비롯되는 궁극적 관심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나사렛 예수를 통한 전적 구원의 체험, 즉 죄 된 상황으로부터 구원된 상황으로의 전적 변화라는 경이적 구원의 경험은 예수를 만나고 따르던 이들에게 예수를 구원의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언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구체적 구원의 체험과 확증이 바로 예수를 구세주요,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만들었으며 예수 속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계속적으로 체험하고 회고하고 규명하고 고백하는 행위가 예수를 중심으로 모였던 초대 신앙공동체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역사와 전통 가운데 계속적으로 고백되어 왔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 15)”는 메시지로 요약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의 복음은 예수 자신에 관한 선포가 아닌 하나님과 급박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선포였다.

정치적으로 지리적으로 강대국들 사이의 완충지였던 이스라엘이 주변국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잃고 식민지화되는 치욕 가운데 정치적 독립과 옛 다윗 시대의 전성기 회복이라는 간절한 구원에 대한 열망과 염원은 메시아-왕 그리스도론이라는 가부장제적 그리스도론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론이 가부장제화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가장 결정적인 단계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제국 종교로서 제국의 교회가 설립되었던 4세기이며 이때 탄생한 것이 가부장적 제국주의 그리스도론이다 [2].유대교와 희랍 세계를 접목하고 그리스도교 복음을 희랍 세계에 전하기 위해 변증적으로 사용되었던 플라톤주의와 신플라톤주의 사상은 히브리 사유체계와 깊은 교류 속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희랍사상의 정신과 물질, 영원한 지적 본질과 가변적 물질에 대한 근원적인 우열과 선악의 이원론적 사고는 그리스도론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고 가장 높은 단계인 철학자로부터 육체적 일과 관계된 낮은 계급의 농부, 장인, 상인에 이르는 불평등 사회계층구조를 이루는 데 근본적 토대로 작용하게 되었다. 계시론적 사고와 영지주의적 사고를 혼합하여 자신의 신학을 확립한 바울은 죄와 죽음의 노예 상태를 말하는 육에 따라 사는 실존과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남을 통해 해방시키는 영안에 있는 실존으로 구분한 심오한 이원론자였다. 바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육적이며 죄적인 자아의 힘에서 인간을 구원해 선의 힘을 주시는 본이며, 구원이란 타락하여 물질화된 영혼들이 자신의 의지를 굴복시켜 하나님의 의지에 기꺼이 재결합하는 것이었다. 즉 나사렛 예수를 통한 구체적이고 실체적 구원의 체험은 헬레니즘과 영지주의 사상과의 결합으로 추상적이며 보편적이고 이론적인 구원의 의미로 변하게 되었다.

또한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종교로서 세계에 대한 정치적 지배력을 얻게 되었다. 히브리 왕권 이데올로기 속에서 메시아 상징을 가졌던 그리스도는 이제 천 년의 그리스도교 제국과 동일시되었다.그리스도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모든 것을 통치하는 절대 통치자가 되었고 이와 같은 그리스도론의 논리는 기존 사회 체제를 통합하는 원리가 되었다.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 참 인간의 신적 존재로서 삼위의 위격인 천상의 절대적 존재로 굳혀졌다. 이는 제국의 그리스도가 우주적 로고스로서 세계를 지배하고 제국과 교회를 통치하는 것처럼 주인은 노예를 지배하고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는 계급주의적 위계 체제를 정립하는 청사진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행한 사역을 인류 구원역사에만 국한시킬 때는 그리스도와 자연 피조물 전체와의 관계가 단절될 수 있으며, 인간만이 아니라 전 피조물을 위한 그리스도로서 우주적 차원의 구원사역이 갖는 본래적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Hannah Arendt, The Portable Hannah Arendt, Peter Baehr, ed. (London: Penguin Books, 2000), 174.

[2] R. R 류터, 안상님 역, 『성차별과 신학』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대한 기독교 출판사, 1985),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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