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니사의 그레고리우스, 경건한 교훈에 대한 담화 (후기 교부들의 기독론)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4. 29. 16:23

본문

책 이름: 경건한 교훈에 대한 담화 (후기 교부들의 기독론)

출판사: 두란노 아카데미


니사의 그레고리오스는 4세기 후반의 신학자 그룹에 속한다. ‘카파도기아’ 학파라 불리는 일군에 속하며, 그는 아리우스주의와 아폴리나리오스주의에 대한 니케아 정통파의 최종 승리에 기여하였다. 그는 오리게네스도 이루지 못했던 것을 동방 정교회를 위해 이루었고, 기독교의 믿음을 그리스 고전 유산과 연관시켰다. 그는 신비주의 저술에서 독창성을 보여 주었고 그것으로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니사의 그레고리오스의 글은 오리게네스의 원리론 이후 조직신학을 세우려는 최초의 시도로 평가받는다.그는 하나님과 삼위일체의 교리(1~4) -> 사람의 창조, 악과 타락의 속성 (5-7) -> 사람의 회복, 성육신과 속죄 (8-32) -> 세례, 성만찬, 믿음, 회개 (33-40)의 순서로 글을 전개한다. 일반적인 조직신학에서는 삼위일체를 가장 먼저 다루지 않는데, 그는 삼위일체를 가장 서두에 배치하고 있다.

이렇게 그가 글을 전개해 나간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실 저렇게 조직신학을 전개해 나가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왜냐하면 창조 전에 이미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관계 속에 거하셨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리에 시비를 거는 사람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사실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를 먼저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의 논리전개 양식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그의 삼위일체론과 기독론은 대체적으로 정통적이다. 물론 숫자 1보다, 3을 강조함으로 삼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긴 하지만, 숫자 3보다 1을 강조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긴 마찬가지다. 그는하나님의 신성한 본질을 말로 다 형용할 수 없는 것이라 강조하면서 신성이라는 용어도 신적 본질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상징일 뿐이라고 제시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구분 방식을 하나님에게 그대로 대입할 순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한계 역시도 서술해 이단의 논박들을 반박하며 동시에 신비감을 더한다.

그리고 그의 기독론 역시 정통적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말씀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간이 되셨다는 안셀름의 설명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 물론 동일한 것을 말함에도 설명 방식이 좀 특이하다. 그의 기독론 중 가장 특이한 부분은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배상설이다. 인간이 사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탄에게 배상을 하신다는 논리다. 이는 좀 위험해 보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이 인간이 되도록 계략을 보이셨는데, 사탄이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고, 그래서 물고기가 미끼를 물듯이 그분을 집어삼켰다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사탄이 예수님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는지? 좀 의문이 든다.

그레고리오스와 오리게네스의 공통점은 그레고리오스가 오리게네스처럼 기독교를 그리스 문화로 해석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이다. 그레고리오스는 오리게네스처럼 독창적이진 않다. 하지만 그는 오리게네스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며 건전하다. 그는 오리게네스처럼 성자 종속론에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오리게네스보다 덜 철학적이다. 덜 철학적이라는 말은 그가 좀 더 성경적이라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연합과 신성화이다. 그의 글을 보면 연합과 신성화라는 단어가 매우 자주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자주 등장한다는 말은 그가 이 두 가지를 강조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는 세례와 성만찬에서 우리 개신교 노선과는 약간 다른 이해를 제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그냥 일반적인 상징의 의미가 아니다. 세례 역시 절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상징이 아닌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빵은 새 형태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조립된다. 우리는 그 몸을 받음으로써 신성화되고 점차 불멸성을 공유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몸이 성육신 안에서 연합함으로써 그처럼 신성화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물론 성별이 일으키는 변화는 본질이 아니라 형태이다. 이런 면에서 그의 가르침은 카톨릭의 화체설과는 구별된다. 즉 그 구성 요소들이 재배열됨으로써 새 역량과 관계를 획득한다는 점에서, 본질이 변한다는 카톨릭의 화체설과 구분되지만, 사실 어떻게 보면 구성 요소들이 재배열되어서 새 역량과 관계를 획득한다는 말은 사실 본질상 차이가 없는 말이다. 설명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먹은 인간의 신성화 교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정말 그들의 말처럼 성찬과 세례를 받아 사람이 그렇게 신성화될 정도로 거룩해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도 그들의 말처럼 신성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 믿음이 부족한 것인지 나는 그렇게 변하지 않고 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그들의 표현 방식이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의 의견을 존중은 하지만, 현실적으로 고려해보면 너무 우리의 것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의 세례에 대한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그의 주장처럼 세례에 신의 임재가 있다고 너무 부풀려서 과장하다가, 세례를 받은 사람이 그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례를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의심하게 될 수도 있다. 오히려 세례에 하나님의 원초적인 임재가 있다고 말하기보다,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개인의 헌신과 결단으로 돌린다면 그것이 말씀을 받아들인 신자로 하여금 자신을 더 겸비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레고리우스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의 저변에 깔린 사상이 바로 속성 교통론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속성 교통론을 거짓이나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그런데 너무 그것에 대한 과장된 믿음이 있다 보면, 너무 신앙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무엇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교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회개와 성찰, 분투를 막는 무엇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