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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신학의 그리스도론 (장왕식, 감신대 교수)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4. 28. 0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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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신학의 그리스도론

출판사: 한국조직신학회
발제자: 장왕식 (감신대)

과정신학의 모티브를 제공한 철학자 화이트헤드 (출처: 서광사)


I.
과정신학은 그리스도론에 관한 한 가장 래디컬하면서 동시에 보수적이다. 혹은 과정신학은 그리스도론에 관한 한 가장 포스트-모던적이면서도 때로는 동시에 전통적이다. 도대체 과정신학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또한 그런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도대체 신학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과정신학은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상식처럼 만연해 있는 포스트모던의 세계관을 일정 부분 수용한다. 그런 점에서 과정신학은 현대 신학 중에서 가장 첨단적이며 래디컬하다. 앞으로 계속 설명되겠지만 현대 사상사에서 과정사상의 탁월한 업적 주장 중의 하나는 현대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현실적 영향력을 인정하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정체성 안으로 과감하게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스도론의 모든 난제도 바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일으키는 모든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과정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말할 때 상대주의의 원칙을 택한다. 즉 예수라고 해서 별달랐던 것은 아니다. 그도 하나의 유한한 상대적인 인간이었다. 이렇게 과정신학은 예수에 대한 최근의 신학적 발견과 급진적인 해석들을 수용한다.

하지만 과정신학은 그저 현재의 조류를 따라 가면서 과감하게 리버럴한 그리스도론을 주장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과정신학은 여전히 친교회적이며 어떨 때는 보수적인 면도 있다. 과정신학은 우선 오늘날 같은 다원주의의 세상에서도 예수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예수는 그리스도 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해 온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이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과정신학은 전통적인 신학의 중요한 주장을 계싱하는 셈이다. 더 나아가 과정신학은 신학적으로 가끔 보수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즉 아무리 오늘이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만연해 있는 사회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II.
새로운 예수 읽기는 왜 필요한가?
오늘의 세계관이 고-중세와 근대와 가장 현격하게 보여주는 차이는 생성과 과정의 빛에서 모든 사물을 본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19세기에 꽃 핀 새로운 과학적 발견으로 양자역학과 상대성의 원리는 세계 내의 사물을 고정된 실체로 보는 것을 거부하고 흐름과 과정 속에서 생성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과학적 발견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혁명적인 세계관을 결과하게 되었는데, 우선 모든 종류의 영원한 규범은 회의와 비판의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모든 사물이 흐름과 과정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면 그 원칙에서 예외가 될 것은 없다. 역사는 변하는 것이며 그것을 만들어 가는 인간도 변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우주 내에 고정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불확정적이며 따라서 불확실한 것이다. 게다가 변화와 과정 속에서 흘러가는 모든 것을 고정적인 실체로 묶어 내는 근거로서 작용하던 모든 것들, 즉 형상, 이데아, 형이상학, 절대자로서의 신 같은 존재들마저도 모두 흐름과 유동성 속에서 생성과 과정을 반복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새로운 세계관이 상대주의와 불확정성을 중요한 사실로 여기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보편성은 특수성으로, 객관성은 국지적인 주관적 견해로, 필연성은 우연성으로 대체된다. 한마디로 인류는 불확실성과 우연이 판치는 상대주의에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정철학인 이 상대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나는 상대주의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주의를 받아들이되 상대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과정사상은 좀 더 강도 높고 건전한 상대주의를 통하여 빈약하고 못난 상대주의를 극복한다.


과정사상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사물은 과정 속에 있다. 그런데 과정 속에 있는 사물은 스스로가 완전하지 않기에 만족을 향해 스스로를 형성해 가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런 과정에서 타자와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어가게 된다. 하나의 불완전하지 않은 존재는 완전을 향해 달려갈 때 타자의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모든 과정 속에 있는 존재는 이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탄생된 부족한 존재이다. 스스로가 완벽해서 누구의 도움 없이 탄생된 존재는 과정 속에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자와 관련 하에서 스스로를 형성해 가는 과정적인 존재는 논리적으로 볼 때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절대적인 존재란 완전하기에 타자에게 전혀 의존할 필요가 없는 존재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과정적인 존재는 관계적인 존재며 상대적인 존재다. 이제 우리는 과정 철학이 어떻게 강도 높고 철저한 상대주의적 철학에 근거해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정이라는 개념 속에는 상대라는 말이 본질적으로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주의와 관련된 과정사상의 첫 번째 특징은 상대와 과정이 바로 동치라는 것이다. 과정사상에서는 하나의 존재가 과정 속에 있을 때 그것은 타자와의 관련 하에서만 자신을 진보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자에 상대적이라는 말이다. 과정사상 안에서는 상대주의가 철저하고도 강도 높게 승인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대주의의 난점은 모든 진리를 상대화하고 모든 체제를 무정부적으로 만들며 따라서 질서를 무너뜨리고 도덕적 해이와 아노미를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과정 사상은 이를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가? 바로 빈약하고 못난 상대주의를 철저하고 건전한 상대주의로 극복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철학적 입장을 말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인류의 복지를 도모하고 인간에게 평안과 행복을 제공하려는 데 있다. 하지만 하나의 철학적 입장을 피력함을 통해서 그 철학적 입장을 말하는 사람의 복지와 행복을 앗아가는 철학이 탄생된다면 그런 입장은 백해무익한 것이다. 그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말하다가 아예 그것 자체를 해체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그런 진리를 말하고 있는 자신의 입장마저도 상대화시켜 불신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상대주의를 말하는 자신의 입장을 상대화시킨다는 것이 반드시 그 입장의 해체로 이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를 과정사상을 통해서 쉽게 풀어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가 관계적이고 상대적이라 할 때, 그렇게 상대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상대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그 해당 존재의 특수한 고유성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상대주의에 따르면, 어떤 A라는 존재가 타자인 B와 관계를 맺을 때 그 A의 존재성이 B를 비롯한 여타 타자들의 영향의 관계로서 구성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A 자체가 부정되는가? 그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존재가 타자들과 더불어 상대를 많이 하더라도 그것이 해당 존재의 고유한 특수성을 빼앗아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존재가 타자와 상대를 많이 하고 관계적일수록 해당 존재의 존재감과 그것에 근거한 특수성은 더 강화되고 공고해지는 경우도 있다.

III. “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예수를 신과 같은 분이었다, 다른 어떤 사람은 예수를 신이라고 말한다. 두 개의 다른 언명처럼 보이지만 예수 안에서 신적인 초월성을 발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양자 사이에 하나의 차이가 있다면, 예수를 신과 같다고 보는 사람은 유사점을 강조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인 아들 예수와 그것을 초월하는 소위 아버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범주적 차이를 혼동하지 않도록 단지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분 혹은 인간으로서의 신분에 강조를 두는 것이다.

반면에 후자, 즉 예수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동치의 관계를 강조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어차피 지금 토로하는 이 명제는 신앙고백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신과 인간의 범주적 차이를 혼동하는 듯하는 모순적 논리도 얼마든지 넘어설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상 깊은 구절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하나의 절대적 독특성이라는 개념은 엄밀히 말해 하나의 착각이다. 정말로 절대적인 독특성이 존재할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볼 때 그것은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가장 절대적이라는 하나님의 경우를 보자. 그는 분명히 절대자로서 고백된다. 하지만 그가 정말 인간과 세계 없이도 절대적일 수 있을까? 그가 세계도 없고 우주도 없고 따라서 인간도 전혀 없는 어떤 시간과 공간에서 홀로 절대적으로 존재하고 계신다면 우리는 그분이 누리는 것을 진정한 절대성이라 말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러한 상대가 없고 홀로만이 누리는 절대성도 일종의 절대성이라 부를 수 있기는 해도 그것이 결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절대성으로 취급될 수는 없을 것이다. 상대가 없는 절대성은 아무런 가치와 의미가 없는 절대성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서 대통령으로서 전대 권력을 행사한다고 치자. 그의 권력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참으로 그의 권력이 절대적인가? 로빈슨 크루소의 권력은 일종의 절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전혀 가치도 없고 의미도 없는 절대성이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로빈슨 크루소가 바위와 풀, 그리고 물고기에게 행사하는 그의 절대성을 의미 있는 절대성이라 부르지 않는다. 마찬가지다. 신의 절대성도 그가 인간과 세계라는 상대가 있기 때문에 그 한도 내에서 참으로 절대적이다.

이런 논리를 적용해 보면 하나의 사건이 유사한 다른 사건을 상대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신마저도 상대가 있어야 의미 있는 절대성을 가진다면 모든 사물의 의미 있는 절대성은 상대가 있어야 의미 있게 된다. 상대가 있다고 해서 그 절대성에 손상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상대가 없을 정도로 독자적인 절대성이라고 해서 그 절대성이 좀 더 강하고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절대성이 다른 것에 의존한다고 해서 그것의 절대성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독특성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설령 부활과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종교나 경전에서도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기독교의 부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유사한 사건이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예수에게서 부활한 사건과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의 부활의 사건의 특수성과 독특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주의라고 해서 무조건 독특성을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건전한 상대주의는 얼마든지 독특성을 말할 수 있다. 이런 독특성에 근거해서 우리는 불교가 무언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와 그리스도교가 같지 않기 때문에 예수의 구원의 능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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