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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리소스토무스, 라자로에 관한 강해(1-7편)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4. 27.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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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분도 출판사

역자: 하성수 박사 (한국 교부학 연구회)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olytime5925&logNo=150090661897&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m%2F

 



1.
하성수 박사의 크리소스톰 해설 정리 요약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349/350~407) 4세기 후반기에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활동한 사제이자 주교였으며 수도승, 교사, 예언자, 개혁가, 순교자였다. 그는 말씀의 선포자이며 계시의 위대한 해석가, 신앙의 증인으로서 실천적 윤리를 강조한 사목자요 설교자였다. 그의 연설 능력이 너무 뛰어나 5/6세기부터 그는 황금의 입으로 칭송되게 된다. 그는 4세기의 저명한 수사학자 리바니우스가 자신의 책 『안티오키코스』에서 열광적으로 찬양한 세계적 도시 안이오키코스에서 태어났다.

당시 안티오키아는 화물의 집산지, 교역의 거점, 동방과 서방 문화 교류의 중심지, 로마 제국의 군사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그의 젊은 시절에 관해서는 알려진 정보가 별로 없다. 교회사가 세크라투스의 진술에 따르면 그의 부모 이름은 세쿤두스와 안투사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로마군의 고위 장교였고,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요한이 두 살이 되기 전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그리스 출신인 그리스도인이었고, 그녀는 20세에 과부가 되었다.

요한은 생애 내내 그리스어만 사용했으며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그가 이런 교육을 받은 것은 어머니 덕이었는데, 그녀는 아들 교육을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은 유산을 헐지 않으면서 자기 돈으로 시켰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요한은 덕분에 그의 출신에 어울리게 자랐으며, 폭넓은 지적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을 받았고, 363년부터는 당시 최고의 소피스트이자 연설가이며 수사학자인 리바니우스의 강의를 들었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언어와 문체에 관한 연구들은 그가 당시의 고전문학을 잘 알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그는 저서에서 그리스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저작을 많이 인용하고 격언들도 수용했으며, 의학과 전쟁을 비롯한 삶의 매우 다양한 분야들과 관련된 많은 표상을 사용하였다. 그는 수사학이라는 도구를 잘 사용하기 위해 대구, 과장, 비교, 은유, 두운법을 사용했을 뿐 아니라 일상에서 관찰한 것도 많이 활용했다. 그의 그리스어는 세련되었고, 그의 내용은 매우 알찼는데 그 이유는 그가 받은 교육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 사제직에서 때때로 자신이 세상의 탐욕들에 묶여 있었다고 고백하는데, 이런 자기 책망은 금욕적 소망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런 표현은 성인들의 생애에서 드물지 않았다. 한편 그는 실용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후에 아퀴나스 역시 그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아퀴나스 역시 크리소스톰을 높게 평가했다. 아마 둘의 취향이 같았기 때문에 이렇게 아퀴나스가 그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여겨진 수도 운동의 뿌리는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크리소스톰 역시 이런 시대 분위기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수도승을 평신도들보다 더 높게 평가하진 않았다. 그는 수도승과 평신도가 같은 수준의 완덕을 필요하다고 보았다.

크리소스토무스의 주된 직무에는 전례 때의 협력 외에 교회 재산 관리, 과부와 고와, 병자와 나그네, 죄수, 동정녀를 위한 사회복지 활동 및 이와 관련된 행정도 포함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교회에 유산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는데, 이 이후 교회는 땅과 가옥과 노예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안티오키아 큰 교회의 담 너머에는 나그네 숙박소와 급식소,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교회는 이런 병든 이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선활동을 믿음직하고 폭넓게 수행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종교 정책을 펼친 율리아누스 황제 조차 교회에 경의를 나타냈고, 이교의 사자들에게도 사회복지 활동에 힘쓰라고 권유했다.

한편 그는 설교들에서 유대인들을 반박하고, 비판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인종적인 혐오라는 개념보다는 예수-믿음의 결과로서 종교적 거리 두기의 결과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 유대인들은 뻔뻔스럽게 진리에 저항하는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설교에서 4세기 대도시의 기회주의적 신자들을 비난하였고, 유대인의 근거 없는 주장들을 자세히 논박하였다. 고대 말엽의 수사학자들은 완곡한 표현을 중시하지 않았고, 리바니우스도 학생들에게 과장하여 표현하라고 말했다. 아마 그 역시 이런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유대인들이 윤리적으로 기독교인들에 비해 열등하다고 주장했는데, 유감스럽지만 이는 그 당시의 모든 인간, 곧 이교인과 그리스도인에게서도 보이는 문제였다.

크리소스톰의 능변은 평상시 생활에서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발휘되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백성에게 새로운 부담을 주는 세금을 부과하자 안티오키아 주민들은 매우 격분해하며 본격적은 폭동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대역죄나 다름없는 행동인 황제 가족의 입상들을 부수어버렸다. 이에 안티오키아의 최고 행정관 티사메로스는 주동자들에 대해 단호한 조처를 취했다. 이때 많은 시민을 체포하여 더러는 처형하는 끔찍스러운 공포로 몰아넣었다.년 2월에 일어난 이런 격앙된 상황에서 교회의 도덕적 권위는 유지되었다. 크리소스톰은 이런 무도한 행위를 칭찬하고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하며 국가 조치에 저항하지 않는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그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그의 관심사가 매우 광범위했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사가 광범위 했다는 사실은 그의 논고 『허영과 자녀 교육』이 말해준다. 393년에 쓰인 이 작품은 어린이 교육에 관한 그리스도교 최초의 입문서로 요한의 교육 사상을 요약해서 제시하는 특징이 있다. 요한인 이 책에서 부모에게 자녀를 올바로 키우는 방법을 가르침으로써 그러한 심각한 악습으로부터 젊은이들을 보호하고자 한다.

한편 그의 설교는 절대 지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설교가 자신을 건강하게 하고, 입을 열면 자신의 모든 피로들이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일 말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실행하는 것이 바로 가장 아름다운 박수갈채라고 말했다. 그는 바울의 로마서를 다룰 때에도 하나님의 은총과 그로 인해 인간이 의롭게 되는 과정에 대해 서술을 적게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일을 위한 바울의 열정을 다루는 내용은 많이 나타난다. 즉 그는 신학적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서술하고 사변적으로 분석하기보다 신앙의 실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은 교의와 교리명제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자기 공동체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그는 자비만큼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특징이 없다고 말하며, 우리는 신앙으로만 구원받지 못한다. 사랑과 자비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의 구원은 은총만으로도, 우리의 행업만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둘 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이 고통 속에 있다는 사실이 바로 여러분의 도움에 대한 정당한 요구라고 말했다. 그는 믿지 않는 사람도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며, 도움에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물론 그가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정통 신앙을 소개하는 일을 등한시했다거나, 혹은 이단자들을 교회 공동체 내에서 쫓아내는 일에 소홀히 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요한은 안티오키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교의적 혁신자로 알려지지 않았듯이, 공동체 전례의 실질적인 개혁자로 행동하지도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밤샘 기도를 도입하거나 부흥시킨 일을 제외하고는 공동체 축일에서 그리 큰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정통 신앙을 따르는 고트족 교회에 그들의 고유한 언어로 전례를 거행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야만인들도 그리스도를 공경했다는 사실에 명백히 매료되어,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불린 이교인의 소명 의식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의 영향력 평가
그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난과 노예제도를 극복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는 구원 개인주의를 극복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즉 그에게 있어서 신자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데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분명 요한은 신앙과 관련한 중대한 투쟁이 전개된 시대에 살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중요한 교의적 논고를 남기진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독자적인 신학을 이론적-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신학자로 여겨지진 않는다. 그는 안티오키아 학파의 그리스도론적 사고방식에 동조하여 그리스도 인성의 실재성과 완전성, 특히 자유의지를 강조했다.

요한은 인간의 역사를 이런 완전성을 향한 인간 의지의 투쟁의 역사로 보았고, 그 완전성을 통해 새로운 창조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리고 말씀 선포를 통해 신앙에 관한 모든 문제를 신자들에게 할 수 있는 한 명백하게 답변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행동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 전체를 전례로 만들 수 있으며, 자신의 본보기를 통해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일깨워 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이런 본보기를 실질적으로 입증한 교부였다.

2. 크리소스톰의 『라자로에 관한 강해』 해설 요약
그는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이 처한 상황을 떳떳하지 못하게 여기거나 낙담하지 말도록 하기 위해 희망을 품게 했다. 그리고 그는 의로운 사람들이 이승에서 고통을 겪는 반면 왜 죄인들은 유복한 삶을 사는가에 집중했다. 그는 첫 번째 강해에서 가난한 이들이 구원 받을 가능성이 더 많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부자의 가장 큰 결점은 자선을 베풀지 않았으며 이웃을 도와줄 의무를 소홀히 했다고 말했다. 즉 방종한 생활로 그들이 자신의 영적인 건강을 해쳤다는 것이다.

그는 사도행전 강해에서 그리스도인이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예루살렘 공동체를 이상적 본보기로 제시할 정도로 극단에 이르지만, 이 강해에서는 모든 것을 반드시 팔아야 한다든가, 가진 모든 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고 말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수도생활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을 찾아야 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교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사유재산을 법적으로 인정하지만, 그리스도교적 의미에서 공유 개념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 부자의 재산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동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지금 우리의 신학적 시각과는 분명히 차이를 보이는 말들도 하고 있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들을 견뎌내면 우리가 지은 죄의 일부와 이에 대해 마땅히 받아야 하는 벌을 벗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그의 이런 말은 마치 연옥교리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그는 죽은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과정 중에 지옥에 간 그들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죽은 사람을 기도로 구원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진은 우리가 한동안 잊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기시킨다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노예 시스템으로부터 해방되어야 말할 정도로 극단에 치우치진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경기를 보는 것을 개종할 사람들에게 나쁜 본보기를 남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이 교회에서 쌓아 올린 영적 훈련의 성과를 수포로 돌아가게 한다고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운동경기는 하나의 종교 대체물인 것이다. 그의 글들을 읽으면 스토아 유형의 역설이 자주 등장한다. 부자는 살아 있는 동안 그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받았지만, 다른 것들이 훨씬 더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했다. 반면 라자로는 부자가 악이라고 여긴 것을 받은 반면, 진실로 좋은 것들, 곧 덕행과 하늘의 보상을 받으려고 애썼다.

개인적으로 그의 설교를 보면서 느낀 점
물을 마시는 사람이 없어도 강은 그 흐름을 멈추지 않는다. 이처럼 설교자는 말씀을 듣는 사람이 없어도 그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의 글이나 표현들을 보면 참 탁월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가 예레미야의 상황 보다는 지금 우리의 상황이 더 쉽다고 말하면서 목회자들이 끈기를 계속해서 가지면서 사역할 수 있도록 권유한다. 사람들이 복음을 거절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물질적인 손해를 끼치진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보다는 더 편리한 것이다. 그의 이런 자세 역시 매우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것 같다.

그의 설교를 보면 개혁주의의 유산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글을 읽으면 결국 구원을 받아들이는 포인트는 결국 인간의 몫이다. 그런데 그의 이런 태도가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하며 비판하고 싶진 않다. 개혁주의의 유산을 가지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복음 전도에 끈질김이 없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하나님 탓이나, 그분의 선택으로 돌려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에서 찾아 보기 힘든 그의 자세를 보면서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나에게 저 정도의 끈질김과 열정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곳곳에서 보인 간절한 외침은 반드시 배우고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성경해석 역시 매우 독창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무화과나무가 예수님 말 한마디에 말라버리는 모습을 그는 형벌을 내리기를 즐거워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자신의 권세를 보이기 위해 이런 방법을 선택했다”라고 말한다. 이뿐 아니라 그가 사용하는 쉬우면서도, 설득력 있는 표현들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전반적으로 그가 참 탁월한 설교자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다른 어떤 부분에서는 너무 갸우뚱해지는 포인트들이 있었다. 그는 성서에서 침묵하는 부분을 자신의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상상력에 과하게 의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사로가 선한 삶을 살았는지는 별로 설명이 안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사로가 모독자가 아니었다, 나사로가 지혜로 자신을 다스렸다, 그가 불평불만하지 않았다. 나사로의 마음에는 금보다 더 귀한 영혼이 있었다, 그의 불행 견딤은 용기 있는 견딤이었다”. 아마 요즘에 저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 성도님들이 전도사님 너무 과한 해석이 아니냐고 묻지 않을까?” 싶었다. 요즘 성도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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