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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론 (감신대 심광섭 교수)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4. 22.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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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름: 그리스도론(Christology)
출판사: 대한기독교서회

출처: http://www.hani.co.kr/arti/PRINT/569006.html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론
미국 하버드 대학의 고전적 슐라이어마허 연구가인 니버는 슐라이어마허 신학은 그리스도-형태적이라고 평가했다. 그에 의하면 슐라이어마허 신학의 근본 요소들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에 의해 기초된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 존재의 인격 형성의 경험에 토대하고 있다.

I.
슐라이어마허 신학의 그리스도론적 초점
그는 신앙 경험이 먼저 있고, 뒤이어 이해가 따른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교는 목적론적 유형의 경건에 속하는 유일신 신앙이며, 그와 같은 유형의 다른 신앙으로부터 그리스도교를 본질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유일신 신앙에서 모든 것이 나사렛 예수에 의하여 완성된 구속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1)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교를 경건을 사용하여 정의했다. 경건이란 신앙의 실천에서 중요한 사유와 감정의 결합을 언급하는 말이다. 그는 신학자들이 생각하고 말한 것에 따라 정의하지 않고 신앙인들의 경험에 의해 정의한다.
2)
그리스도교의 모든 것은 나사렛 예수에 의해 완성된 구속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한다. 구속의 경험이 그리스도교 자체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이다.
3)
그리스도교는 목적론적 방향을 가진 경건의 형태다.
4)
구속은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인간이 최종적인 목적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는 과정이다. -> 그에게 있어서 교의학적 명제가 형이상학이나 자연과학을 포함한 우주론과 혼합되어 서술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는 경건한 자기의식으로부터 얻어진 원리를 삼중적으로 반복함으로 서술한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론을 은총론의 넓은 맥락 안에 자리매김하고 교의학적 명제의 근본 형식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그리스도론은 인간의 삶의 형태의 서술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총을 인식하는 한에서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관한 서술이다. 그는 그리스도론의 교리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은총을 인식하는 한에서 그리스도인의 상태로 규정했다. 그리스도론을 규정하는 제목이 시사하듯 그리스도론의 신학적 의미는 그리스도가 단순히 인간의 경건한 자기의식의 사태로부터 발전된 것은 아닌가? 그리스도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자기의식의 표현에 불과하단 말인가?

슐라이어마허는 정통주의의 세 번째 교리인 양위론 곧 빌립보서 2장에 근거한 겸허의 상태와 고양의 상태는 수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긴밀하게 함께 보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II.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 신앙은 구속자에 대한 열망의 산물이 아니다. 예수에 대한 신앙은 예수의 사역 그 자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교리란 초월적으로 주어진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라 전제된 경험,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진 구속의 경험에 대한 반성의 결과물로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란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종교적 감정에 대한 설명이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슐라이어마허 그리스도론의 출발점은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구속경험의 확실성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관련하여, 만일 예수께서 인간의 구속자여야 한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1)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 다시 말해 본질적으로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갖고 계셔야 한다.
2)
둘째 이단인 나사렛주의는 예수를 우리 인간과 너무 동일하게 봄으로써 예수에게 어떤 독특한 우월성의 여지가 남아 있지 않게 했다. 예수에게서 어떤 독특한 우월성의 여지가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는 칼케돈 신조를 정확하게 언급하진 않지만 양성론 교리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칼케돈 신조의 통찰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그는 단지 새로운 사상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책임 있는 사유의 개혁자이다. 개혁이란 지금까지 사유를 새로운 형식에 담는 일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이해하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근본 목적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적합하게 기술함으써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를 가능하면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두 본성 한 인격론의 문제점을 극복해야 한다. 그는 양성일격론의 문제점을 다음 두 가지로 지적한다.

1)
본성이란 용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 모두를 드러내는데 부적당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본성이란 유한한 실존, 제약되고 분리된 육체적인 존재, 능동과 수동의 유동성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 해당되지만 하나님은 무제약적이고 절대적 존재이며 순수 행동, 시간을 넘어선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본성을 소유한다는 뜻은 절대 맞지 않다.

2)
양성론은 삼위일체론과 연관하여 생각할 때 두 가지 혼란스러운 측면이 있다. 양성론은 인성과 신성 즉 본성의 통일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은 본질의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양성론과 삼위일체론에 나타난 언어의 불일치와 비일관성이 교의학 체계의 일반의 명료성을 해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칼케돈 공의회 이후에 신성만을 강조하는 알렉산드리아의 단성론, 안디옥의 복성론이 나타난다. 슐라이어마허는 궁극적으로 본성이란 용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으로 인해 한 인격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두 본성의 이론을 거부한다.

1.
예수의 자기의식과 완전한 인간 본성
그가 해결하려고 했던 진지한 고민은 어떻게 신성이 인간성과 결합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사에서 죄가 인간 본성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연합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음을 주목한다.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강력한 하나님 의식이 있다고 여기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은 정확하게 동일한 사안이다”. 예수께서 신성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절대적인 의존 때문이다. 다시 말해 슐라이어마허는 예수의 지성과 의지를 완전히 인간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론이란 로고스가 그리스도의 몸에 능력을 부여하는 말씀/육신 그리스도론이 아니라, 충분하고 완전한 인간성의 모든 요소들이 신성을 표현하는 과정 속에서 취해진다. 예수의 지성은 우리의 지성처럼 전지한 지성이 아니며 예수의 의지는 우리의 의지처럼 다른 사람을 위한 의지이다. 그렇지만 예수의 인간성의 모든 요소는 신성과의 관계에서 전적으로 수동적이기 때문에, 예수의 인격은 신성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다.

신성의 활동성과 인성의 수동성을 이렇게 정리한다.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서 신성만이 홀로 활동적이고 자기를 전달하며, 인성만이 홀로 수용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양자의 연합의 상태에서는 모든 행위는 양성의 공동 활동이다.” 달리 말해 예수의 감각적 자기 인식은 신성을 표현하는 바,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절대 의존 덕분이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을 예수 의식의 기저에 놓여 있는 생동적 원리로 생각한다면 신성은 점차적으로 드러나며 예수가 성숙할수록 신성의 표현이 강화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눅 2: 52). 신성의 점진적 발전에 대한 근거로 제시하는 구절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절대적인 모델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행동을 전적으로 인간적인 행동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를 따를 수 없다. 그렇지만 슐라이어마허는 예수께서 우리의 구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죄가 없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의 도덕적 발전은 갈등 없이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지적 발전 또한 오류 없이 발전되었다”. “발전하는 과정에서 감각적인 요소들이 하나님 의식을 지배해 본 적이 결코 한 번도 없다. 예수의 모든 감각적 요소는 즉각적으로 영의 도구로서 자리 잡았다.”

슐라이어마허는 그리스도를 모든 인간과 동일하게 보면서도 그리스도를 유일무이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단한 하나님 의식이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에서 그것을 찾는다. 모든 인간에게도 하나님 의식이 있지만 그리스도에게 있는 하나님 의식은 완전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적 능력은 활동적이며 예수의 인성은 수용적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이 능력을 가장 먼저 사랑으로 이해한다.

2.
이상적이고 원형적인 신적 계명으로서의 예수
그의 신앙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의 깊게 읽어보면 슐라이어마허는 예수를 완전한 인간성을 지닌 분으로서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모든 인간의 관계가 거기에 근원을 둔 원형으로 일관성 있게 주장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슐라이어마허는 인간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으로 완성을 성취할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과 하나님-의식을 통해 관계 맺고 소통한다. 하나님-의식은 생동적인 추적인 추진력으로서 지속적으로 발전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을 벗어나 있으면 포로나 억류 상태에 머물게 된다. 하나님-의식은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과 완성을 향해 나가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원형으로 보는 슐라이어마허 그리스도론의 중요한 포인트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와 나머지 인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인간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찾을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리스도는 매우 적절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존재가 나타나 발견되는 유일한 타자이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의 관계는 근원적이며 중재되지 않는 관계가 된다.

감신대 교수 심광섭은 슐라이어마허 신학을 전체적으로 보고, 이상 논의한 점을 주목한다면 그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한 바우르/바르트/브루너의 인간학적이고 심리학적인 비판은 기초를 상실한 잘못된 것이라 여긴다. 현대 신학자들의 슐라이어마허 그리스도론 비판은 대개 그의 저술을 편협하게 읽은 것이라고 판단한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예수의 인격은 하나님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는 수동적 차원과 하나님의 사랑을 활동으로 보여 전적으로 실현하는 능동적 차원이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활동이 일어나는 사건에서 그리스도론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슐라이어마허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해석하는데 의식의 범주를 중심에 놓는다고 해서 말씀의 범주를 폐기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III.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죄란 무엇인가? 바로 감각적 자기의식에 빠져 지고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의식을 거부하는 과정 가운데 생긴 결과이다. 하나님 의식을 거부하거나 태만히 여김으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죄란 인간의 감각적 기능이 스스로 독립을 선언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독립을 선언하는 순간 성령이 감금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관계란 바로 그분의 신성한 사랑의 능력에 감염되도록 자신을 허락하는 것이다. 그는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염되어 소통할 수 있는 문 이것을 절대 의존의 감정이라고 명명했는데 여기서 그의 독특한 신학적 악센트가 드러난다.

슐라이어마허의 죄의 정의

1) 자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함

2) 인간의 자아가 자신을 감각적 기능들과 동일시함

3) 타자로부터 천성적으로 독립해 있으며 유한한 자원을 얻기 위해 투쟁함


슐라이어마허는 원죄의 집합적 특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행한 구원을 낮게 평가하는 것과 항상 동행한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의 의미는 그에 의하여 설립된 삶 전체, 곧 구속자가 구속 받은 자를 받아들이는 삶의 공동체 안에서 밝혀진다. 그러므로 구속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의 삶의 몫을 나누는 것, 곧 예수의 삶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생명 공동체,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은총의 상태에 관한 근본 의식이다.

한편 슐라이어마허에 따르면 안셀무스의 만족설은 마술적 이해에 가깝다. 만족설은 죄의 용서를 그리스도가 받은 고난의 형벌로 대체하며 인간이 누리는 지복도 인간이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가 대신 받도록 그리스도를 고난에 내어준 하나님의 보상으로 생각한다. 여기서 죄를 용서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무죄함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받을 형벌을 대신 짊어진 예수에게 모아진다. 구원은 우리를 대신하여 짊어진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이는 개인적 결단의 사건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죄의 용서와 구원이 죄인인 인간의 내적 근거와 변함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만족설은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기대되는 개인의 윤리적, 영적인 변화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못하고 오직 감각적 자기 의식과 관계된 형벌의 교환으로 설명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벌을 받으셨다면 우리는 변화되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벌을 받아 마땅한 존재로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죄를 피할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방해하는 존재의 습성을 벗어나지 못한 옛 습성에 젖어 있는 옛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일 구속이 우리를 변형할 수 없다면 이 삶에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은 예수께서 타락한 인간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셔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소개하고 열정적으로 실행하셨기 때문에 당한 결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예수님을 윤리적인 모범이나 윤리선생으로 제시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는 이 견해를 경험적 관점이라 하여 반대한다. 이 견해의 문제점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그다지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죽음을 무릅쓰고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확고한 정진과 이로써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가 인류가 지복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심광섭 교수의 결론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론이 가지는 역사적 의의는 구속자의 인격과 행위를 연합함으로써 역동적으로 해석했다는 점이며, 구속자를 원형으로 표현함으로써 초월성과 동시에 역사성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슐라이어마허의 그리스도론은 새로운 삶의 그리스도론이다. 물론 이 원형이라는 개념은 플라톤의 이데아와는 비슷하지만 또한 미묘하게 다르다. 왜냐하면 그가 제시하는 원형이라는 개념은 역사화된 원형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이데아라는 개념과 현상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슐라이어마허의 이런 생각은 동시대에 살았던 헤겔의 영향 덕분이다. 철학자 헤겔은 이념이 역사적으로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즉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원형이란 역사적으로 지각되고 경험되어야 하는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에게 있어서 원형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절대적 특수성을 존재론적으로 입증하는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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