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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나시우스] 말씀의 성육신(후기 교부들의 기독론)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4. 15. 13:19

본문

저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출판사: 두란노 아카데미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B%A0%89%EC%82%B0%EB%93%9C%EB%A6%AC%EC%95%84%EC%9D%98_%EC%95%84%ED%83%80%EB%82%98%EC%8B%9C%EC%9A%B0%EC%8A%A4


해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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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동안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고, 50년간 정통 신학을 개진하고 옹호한 그는 교회사에서 걸출한 인물이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그의 저술들을 사실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변호였다. 즉 개인적인 비난들에 대한 해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히브리서 28절 말씀처럼 만물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그의 시대에는 보지 못했다. 즉 그의 시대에 십자가의 가시적인 승리를 보진 못했다는 말이다. 아타나시오스는 성육신에 관하여에서 마카리오스라는 사람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데, 이는 특정인이 아니라 누구든지 될 수 있는 가상의 독자이다.

그가 철학 학파들에 대한 성공적인 경쟁자로 교회를 생각하는 것, 세상을 위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학교로서 예언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 이런 것들은 철저하게 알렉산드리아적이다. 마카리오스는 장차 가능한 개종자의 모형으로 간주될 수 있는데,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다루는데 익숙해 있었다. 교육받은 이교도들은 지성을 가진 기독교인이 되기 위한 준비를 갖춘 것이었다.

이 글은  학사 논문 같은 성향을 보인다. 그는 제우스의 친애하는 도시라는 표현을 사용해 그리스 철학을 친밀하게 의인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자기 도시의 현정으로부터 특별히 채색하는 것을 몸에 익힌 것처럼 보인다. 말씀이 자기 백성들에게 드물게 찾아오는 것에 대한 왕림(parousia), 순시(epidemnia)라는 용법의 배후에는 이런 연상이 있다. 아타나시오스의 마음속에 있는 그 인물은 분명히 나무에 그려진 초상인데, 그것은 마치 우리가 오늘날 박물관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적 이집트 인들이 죽은 자들의 미라에 애착을 가지는 것과 같다.

지성적인 면에서 그는 이집트인이 아니라 분명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인이었다. 그는 절충주의적 그리스 사상에서, 곧 부분적으로는 스토아 철학에서, 부분적으로는 플라톤 철학에서 영향을 받았다. 우주의 통일성과 그 질서 뒤에 있는 창조주의 현존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그는 솔로몬의 지혜같은 그리스-유대적 저술로 소급되는 일신론적 변증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이 책은 변증적/선교적 주장이다. 신학에 대한 조직적 논문이 아니기 때문에 훨씬 더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그는 책에서 성령에 대해 다루지 않고, 교회에 관련한 것도 우연한 경우가 아니면 다루는 경우가 없다. 그는 전체 신앙을 상술하지 않듯이, 그 자체를 위해 사색적인 것에는 훨씬 덜 개입한다. 말씀의 오심은 찬탈자와 그의 사자들에 대한 승리다. 그는 말씀이 희생이 되셨다고 하지만, 이 희생이 필연적인지에 대한 진술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사탄에게 지불한 값은 아니라고 말한다. 아마도 의에 마땅한 보상이 하나님 자신에게 지불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의 생각은 서방 신학의 일반적 줄기의 일부가 되었으며, 그의 중심 사상의 일부는 고대 라틴기도의 가장 훌륭한 것들 중 하나에 영감을 주었다.

본문 요약
좋으신 성부는 말씀을 통해서 만물을 배열하시고, 그분을 통해 움직여지며,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 유대인들은 비방하고, 그리스인들은 조롱하지만, 우리는 그분을 경배한다. 말씀의 외관상 낮아지심은 당신에게 말씀에 대하여 더 크고, 더 높은 경외심을 갖도록 만든다. 말씀은 인간들이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해서 안 되는 것을 가능한 것으로 입증할 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불쾌한 것이라고 조롱하는 것도 자신의 선하심으로 존귀하게 만드셨다.

세상을 만드시고 만물을 지으신 것에 대해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으며,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법칙을 세웠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이 만물은 스스로 존재하게 되었고, 우연히 생성된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1]

하나님은 물질 없이는 아무것도 못 만드시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이미 존재하는 물질 없이는 아무 것도 만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좌우지간 목수가 일을 하기 위해선 그의 손에 이미 나무가 있어야 함과 같다.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결점을 부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질료의 원인이 아니라 기존의 물질로만 사물들을 만들었다면, 하나님은 물질이 없이는 어떤 것을 생산할 수 없기에 자신의 결점을 알게 된다. 이는 문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무신론자라고 간주한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는 사전에 고려된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만물은 절대 자발적으로 생성될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결점이 없으시기 때문에 존재하는 물질로부터도 그러지 않았다.

교훈적인 헤르마스의 목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믿어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시고 조성하셨고,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의 근원이시다. 또한 선하신 그분은 어떤 것에도 인색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본래적인 조건들 때문에 그분 안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형상대로 그들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그분을 거역했다. 그래서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이 말씀은 그냥 단순히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의 사멸 속에 영원히 머무는 것을 말한다.

 

회개의 한계
인간은 존재하는 하나님과 닮은 덕분에 자연적인 사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한 불멸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이렇게 멸망하는 인간들을 그냥 방관하지 않으신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은 이미 시행되었다. 회개도 하나님의 율법적 요구를 되돌릴 순 없다. 그냥 방관한다는 것은 말은, 말 그대로 그분이 정직하지 못한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회개는 인간을 본성적 상태로 불러내지 못한다. 회개는 단순히 범죄 행위로부터 떨어져 있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필연적인 타락이 아니라 단순히 나쁜 행실이 문제였다면, 회개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적 말씀 때문에 살멸할 수밖에 없는 것이 불멸하게 되었고, 이는 모든 인간들에 대한 아버지의 요구는 온전한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이 심판에 처했기 때문에, 인간을 재창조하고 살리는 가장 자연적인 방법은 바로 그분의 말씀 그 자체이다.

무형의, 타락할 수 없는 비물질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역으로 왔지만, 이전에도 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왜냐하면 창조의 어느 부분도 말씀이 없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말씀은 아버지와 항상 함께 존재하면서, 어디서든지 모든 것을 충만하게 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에게 인자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방문하기 위하여 겸손하게 오신다.

말씀은 육체의 거처를 취하셨다. 그로 인해 인류에 대한 원수들의 음모는 저지당했고, 인간들에게 만연했던 죽음의 부패는 사라졌다. 지선의 아버지의 말씀인 하나님은 타락에 빠지는 자신의 작품인 인류를 방치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육체를 바침으로써 죽음을 없앴고, 자신의 가르침으로써 그들의 무관심을 바로 잡으셨다.

하나님 조차도
부활을 작업하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부여하셨다. 이것이 구세주께서 인간이 되신 첫 번째 이유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떠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시는 분이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들이 현세적인 것들을 제외하고는 아는 것이 없다면, 인간들은 야수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지 않았다면 창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하는 거룩한 학교였고, 영혼의 안내자였다. 하지만 인간은 점점 야만적으로 변했다. 그분은 절대 그들을 방치하지 않는다. 인간의 왕도 자신의 식민지를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하여 다른 이들에게 양도하지 않는다. 그리고 넘겨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는 종종 다른 사람에게 서면으로 경고하며 종종 친구를 보내거나, 필요하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몸소 가서, 다른 사람들을 면전에서 질책할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들이 미혹되지 않고, 쓸데 없는 것들을 섬기지 않도록 막을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말씀은 반드시 성육신 하셔야 했다. 이런 과정은 인간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돕기 위해서다.

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가?
그런데 누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천사가? 천사 역시 하나님의 형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만이 회복시키신다. 인간적인 수단으로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이유들 중 하나에 속한다.

왜 하나님은 성육신 하셨는가? 인간의 마음이 오로지 감각적인 것들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말씀은 인간처럼 육체로 나타나심으로 스스로 가장하셨고, 인간으로 변형되었으며, 인간의 오감을 자신에게 집중시키셨다. 그때부터 자신을 인간으로 보는 사람들은 자신이 행했던 사역으로 자신이 단지 인간만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말씀과 참된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설득하셨다. 인간이 오감에만 빠져있기 때문에, 말씀 역시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오셔야만 했다.

그렇다면 그분의 성육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미덕은 무엇인가?
그러나 육체와 말씀이라는 연합 이 미덕 때문에 그 육체는 더 이상 본성대로 타락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왔던 말씀 때문에 타락의 범위 밖에 놓이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공동의 구세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해 충실한 우리는 율법의 경고에 따라서 예전처럼 더 이상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를 확실히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생명이심을 믿게 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자신의 썩을 수 없는 본성을 나타내셨다. 그들은 말씀에 망신을 주기 위해 죽음을 주었지만, 그들이 망신을 주기 위해 주었던 이 죽음은 바로 승리의 기념비가 되었다.

우리 가운데 나타난 증거들
많은 불신하고, 조소했던 자들이 나중에 믿게 되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스스로 순교자가 되었고, 죽음을 경멸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신자들에게 죽음의 효력이 상실되었으며, 주님의 십자가는 죽음에 대한 승리의 징표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통 죽은 사람은 힘을 못쓴다. 하지만 말씀의 죽음은 일반 사람들의 죽음과 다르다. 아직도 사람들을 종교로 이끌고, 그들을 덕으로 권고하고, 불멸을 가르치고, 하늘의 것들을 바라도록 가르친다. 아버지에 대한 지식을 드러내고, 죽음을 직면하는 힘을 허락하시며, 각자에게 자신을 보이시며, 우상 숭배의 불신앙을 제거하신다.불신자들의 신들과 영들 중 어떤 것도 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들의 허세는 그냥 무능력과 허무에 불과했다. 귀신도 죽으셨던 말씀 앞에서 고백을 한다. 즉 매일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 그분의 죽으신 말씀은, 결국 죽음을 정복했다는 것을 보인다.

유대인들의 이의 제기에 대한 응답
그분의 죽음은 침묵 속에 생략되지 않으며, 그와 반대로 신성한 성경에서 굉장히 상세히 언급된다. 창세 이후로 누구도 맹인의 눈을 뜨이게는 못했다. 그들은 굉장히 뻔뻔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인들의 이의 제기에 대한 응답
하나님의 말씀이 전체 우주 안에 있으며, 전체는 그분에 의해서 비치고 움직인다고 믿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인간의 몸이 그분으로부터 운동과 빛을 받는다는 사실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면, 그분이 전체 안에 존재하는 것 역시 부적절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왜 태양, , 별 등 더 고상한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주님께서는 고난당하는 자들을 치유하고, 가르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취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에 활기를 넣기 위해 인간적인 도구인 육체를 취하셨다. 왜냐하면 죽음이 지금 육체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선 반드시 그분이 육체를 자신의 도구로 사용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오신 이후로 사람들은 우상 숭배하는 것을 그만두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탁이 중지되었고, 공허하게 되었다. 델포이, 리키아, 리비아, 이집트, 카비리, 피토네스에서 있었던 신탁이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그분이 했던 선포들 때문에 이제 그치게 되었다. 그들의 광기와 그들 사이에 신성시하던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성육신의 증거 중 하나이다.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은 그럴듯하게 그리고 언변으로 말들을 지어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내진 못했다. 그들은 세련되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세련됨은 죽을 때까지였다. 즉 그들의 세련됨은 그들이 죽고 나서는 유지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한 인간이 본성상 비가시적인 그리고 전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기 바란다면? 그분의 육체적인 사역을 알아보기 바란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것인지 시험해보라.

 

 








 

 

 


[1] 에프쿠로스는 철학 학파의 창시자로서 이 세상의 근원을 원자로 보았고, 신들은 세상의 창조나, 유지 또는 인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고 가르쳤다(주전 342-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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