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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론/Christology] 2세기 이후 고대교회의 그리스도론의 발전과 로고스 이론 (황덕형)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4. 13. 03:39

본문

발제인: 황덕형 (서울신학대학교)
제목: 2세기 이후 고대교회의 그리스도론의 발전과 로고스 이론
: 그리스도론(Christology)
출판사: 한국조직신학회

출처: http://m.keh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107


그리스도론의 시작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종말론적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그 세계가 이제 실현되기 시작하였다는 화해의 메시지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존재하였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교회는 그리스-로마시대에 있었던 다른 종말론 운동과는 구분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종말론적 메시아 구원 공동체로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론의 정의
그리스도론이란 무엇인가? 매우 특별나게 이 한 구체적 인간을 구원의 연관성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 구원의 일을 가능하게 하였던 예수의 메시아적 성격에 대한 탐구를 하는 것이다.[1] 예수를 메시아로서 인정하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던 교회가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사건의 신비를 예수 그리스도가 가졌던 다양한 칭호와 더불어 이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론이다.

이 기저에는 예수의 존재가 하나님에 의하여 성별된 특별한 존재라는 확신을 공유하고 있다. 즉 자신들이 체험한 구원의 현실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이에 대한 신앙적 관계 안에서 그 사실들을 탐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탐구, 그것은 이미 그 출발부터 어떤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즉 왜 예수 그리스도인가를 물었던 그 물음 자체가 이미 그 물음이 취해야 할 근본전제와 태도 자체에 대한 방식을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교회의 그리스도론의 첫 단계의 특징들?
1)
성서적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거기에 초대 교부 개인이 일정한 메시지와 성서본문에 대한 주석적 해설을 해나가는 데에서 신학 형성의 첫 번째 단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2)
이 고대 교회의 시기는 아직 특별한 교회적 일치나, 주도적인 흐름이 형성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특정한 오해를 피하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성을 추구해 갈 수 있도록 중간개념을 차용하여 이를 통해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했다.
3)
즉 신앙적 사고와 철학적 사고가 함께 사용됨을 알 수 있다.
4)
실제로 속사도 교부[2]들 가운데는 신학적으로 매우 유치하고 나이브한 그리스도론을 발견하기도 한다.
5)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계시와 구원의 힘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겼고, 이 천사적 존재를 영 혹은 로고스와 연관시키기도 했다.
6) Ascensio Jesaiae
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천사와 같은 존재로 이해했다.
7)
유감스러운 것은 대개 이러한 시도들은 결국 가현설이나 영지주의적 오류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대표적 이단이 바로 마르시온(Marcion)이다.

유스티누스(Justin)
분명한 것은 로고스 이론은 당시 그리스-로마시대에서 그리스도론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가장 유력한 사상적 기초를 제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2세기 중반에 들어오면서 교회에서는 이러한 방향의 변증가들이 등장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유스티누스(Justin 165). 유스티누스의 글을 보면 아직 로고스의 특성, 로고스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과의 관계, 로고스와 성부, 그리고 더 나아가 성육하신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를 연관시킬 수 있는 신학적인 질문으로 반성되지는 못했다. 현단계에서는 신적 존재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던 로고스의 특권적인 위치를 활용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리스도교의 씨앗을 이미 플라톤[3]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었다.

유스티누스가 113년경 보낸 편지들을 통하여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실재가 바로 그의 순교신학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로 형성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삶은 하나님 자신이 침묵 가운데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말만이 아니라 그의 행동, 그의 고난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입이다.
이그나티우스
이어서 이그나티우스는 예수를 하나님으로 불렀고,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선재를 보여준다고 믿었다. 물론 이그나티우스는 인간적 존재방식과 하나님의 존재방식 사이의 갈등과 긴장을 다 해명할 수 없었다. 이그나티우스는 하나님이 지상의 몸을 이용한다는 천사 그리스도론의 조그만 흔적도 철저하게 버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지상의 예수와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가 서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으며 그 연속성을 주장한다.

고대교회와 이단과의 대결
두 번째 단계의 고대교회 그리스도론은 여러 이단들과의 사상적 대결을 통하여 자신의 고유한 방식을 형성하게 된다. 영지주의자들과 가현설주의자들이 이미 그 정체를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으며, 그들과의 대결에서 이제 교회는 좀 더 정통적인 표현을 찾게 된 것이다. 전반적으로 로고스라는 개념에 대한 좀 더 세심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하면서 로고스가 성육신하여 하나님의 계시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것, 두 번째로, 성육하신 로고스를 통하여 이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한 로고스가 어떻게 고난을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그 로고스가 고난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는 교부들 사이에도 이견이 있었지만 육체성을 입은 목적, 곧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사유되는 데에는 일치함을 보인다. 즉 그리스도의 육체성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목적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레니우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첫 번째로 관심을 가져야 할 사람은 비록 2세기 말에 활동하였지만 그 신학적 위치와 내용이 3세기 신학자들의 활동과 버금가는 이레니우스(Irenaeus)이다. 그가 활동한 주된 내용은 영지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레니우스는 로고스보다는 아들이라는 용어를 더 자주 쓰고, 로고스의 출현보다는 아들의 영원한 탄생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했다.

유스티누스의 유산을 알고 있는 자로서 비록 로고스가 신앙의 이성이라고도 생각하였으나 당시 플라톤주의자들과 같이 독립된 실체로서의 신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이레니우스는 유스티누스의 중개자 개념을 매우 불안하게 여겼기 때문에 직접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그리고 싶어했다.

그에게 있어 아들은 아버지의 본질이며 그는 아버지의 계시자로서 우리의 지식의 패러다임이다. 로고스인 아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아들이 아는 것에 있으며, (아들을 아는 것에 있다는 말), 이는 우리가 아들의 삶을 살아야 함을 말한다. 아들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목적에 도달하고 아버지와 교제하게 된다.

즉 로고스가 세계사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완성이라고 인정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다름 아니라 신적인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능력이다. 이를 다시 자유, 사랑, 불사, 이성적 삶이라고 규정한다. 그에 의하면 이 하나님의 형상에 의하여 하나님과 역동적 동일화가 활성화 되어야 하는 것이다.

테르틀리아누스
테르틀리아누스 역시 3세기의 대표적 이단들인 양태론과 영지주의적 이원론 등을 주 논쟁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주요한 저작들의 많은 내용이 주로 이단에 대한 논박으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 그의 관심의 범위와 한계를 말해준다. 그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실체 인격이며, 숫자상으로 아버지와 구별된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발렌티안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버지가 낯설은 그런 다른 신적 존재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둘은 서로를 너무 잘아는 하나이다! 주의할 점은 아버지와 로고스가 비록 하나이지만 숫자상으로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한 인격의 두 존재방식으로서 설명된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섞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이 하나로 통일 될 수 있는 이유는 기능의 통합자로서 하나의 인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원사역의 필요조건으로 보기도 할 뿐 아니라 구원이 일어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우리와 같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진 완벽한 인간이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이렇게 신적 로고스 개념을 도입해 영지주의자들의 오류, 즉 하나님의 계시와 이 지상의 예수의 계시를 연결시킬 수 없었던 오류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로고스 이론과 더불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이제 완전히 새로운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제까지 그리스도교 신학은 로고스 개념을 통하여 이단을 정죄하고, 정통교리를 수호했다. 반면,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는 이방의 개념을 가지고 전도의 방편으로, 이방인을 그리스도교도가 되도록 노력했다. 서방에서는 테르툴리아누스가, 동방에서는 오리게네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클레멘스
한편 클레멘스라는 사람은 로고스가 성육신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독특한 지위에까지 승귀시켜 놓았다고 말했다. 오리게네스가 그리스도론적 사유를 전개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개념은 역시 로고스 개념이었다. 더욱이 그에게 이 로고스는 중기 플라톤주의와 같이 두 번째 하나님으로 생각되었다. 두 번째 하나님인 로고스는 하나님의 영원성, 무시간적 지평 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독립적 실재로서 인정된다. 그리고 우주의 창조의 근원이 된다.

오리게네스의 그리스도론의 특징
오리게네스 그리스도론의 특징은 바로 이 우주적 로고스 이론 + 예수의 영혼의 순결함을 덧붙혀 설명한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성육할 때 인간과 하나가 되는 그 비밀스러운 과정, 그것에 대하여 서술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래 이 세상의 첫 번째 피조물은 로고스의 본성을 반사하는 이성적 존재였다. 그런데 이것이 타락하였고 이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 세계 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필요성이 생겼다. 로고스는 이 하나님의 길을 계시하기 위해서 인간의 육체 안에 성육신 한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클레멘스와 마찬가지로 영은 고난 당할 수 없기에 단지 그것을 보면서 그렇게 고난 당한다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을 뿐이라고 가르쳤다.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셔야 하고 우리와 같이 고난 받고 죽어야 했지만 실제로 오리게네스에게는 단지 그렇게 생각될 것으로만 여겨졌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가현설적인 부분처럼 보인다. 그가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은 오리게네스가 선재하는 영혼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리게네스가 시도한 것처럼,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이 우리의 것과 같은 인간적인 것을 가지지 않았다고 하면 그의 구원 사건이 완전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가?

로고스가 죽음을 경험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과연 신적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가?

->
이는 모두 로고스의 위상과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질문은 아리우스와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아리우스
아리우스는 하나님의 존재방식과 창조세계의 존재방식을 엄격히 구분하면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자였다.
그는 결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을 설명해야 할 육체를 입은 로고스에 대한 해석을 하면서 그 로고스가 비록 이 창조세계에서는 아주 탁월한 위치를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신이 아니라 피조적 존재라고 규정해 버린 것이다.

사모타의 바울
한편 이단인 사모타의 바울은 하나님의 단일성을 지키기 위해 그리스도를 신적 존재에 참여하는 자로 만들었다. 인간 예수가 신적인 존재로 승귀되는 내용의 그리스도론적 고양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오류를 보인 것이다.

이후 아리우스는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정죄를 받는다. 그런데 아타나시우스 역시 아리우스와 같은 패러다임, 말씀-육신의 구조에 의지하였기 때문에 가장 핵심적 질문인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한다. 단지 신론적인 비판으로, 로고스의 신성을 강조함으로써 구원론적 지평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수준이었다.

아폴나리우스/테오도르
4
세기가 넘어서 5세기의 신학 활동은 성육하신 로고스를 인간학적 지평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로 가득차게 된다. 그 길목에서 두 사람의 이단적 사상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폴리나리우스, 테오도르였다.

아폴리나리우스 ->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섞여서 혼합되었다고 주장함 -> 이는 예수가 신도 인간도 아닌 제 3의 신적 존재로 만드는 것이었다. 즉 신성을 가진 육체인 것이다. 육신의 그리스도론이라고도 불린다. 이는 어떤 가능성과 동시에 위험성을 가진다. 그는 4세기 니케아 신조의 동일본질론을 예수 그리스도의 물리적 육체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로 귀결되었다. 결국은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편 테오도르는 그의 교리적 단편들에서 말씀 로고스의 내주를 지칭하는 구절을 해석하면서 두 본성을 남겨 둔 채로 두 본성의 연합에 대하여 인격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을 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루스 사이의 치열한 논쟁으로 확대된다.

칼케돈 공의회
이 논쟁에서 키릴루스가 압승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된다. 하지만 431년의 에베소 회의와 341년 칼케돈 조약에 의해서도 다시 확인 되는 것처럼 이 두 사람으로부터 대표되는 두 경향, 말씀 육체, 말씀 사람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학파의 만남이 쉽게 한쪽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이 칼케돈 회의에서 그리스도가 두 본성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두 본성 안에 존재한다고 결정한 것은 두 학파가 제시하였던 문제점들을 모두 수용하여 서로 절충점을 찾은 것에 불과했다.

즉 그리스도는 한 본체이고 한 인격이지만 두 본성을 갖고 있다고 신앙 고백되는 것이다. 칼케돈의 종합적 성경은 실제로 동방교회에서는 많은 진통을 낳기도 하였지만 동 서방의 일치를 요구하는 교회의 에큐메니컬적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1] Richard N. Norris, Jr., 홍삼열 역, 그리스도론 논쟁 (서울: 은성, 1998), 12

[2] 실제로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과 직접적인 교제를 가졌던 교부들로, 교회에 큰 영향을 끼친 몇몇 사람들을 포함한다.

[3] 신적인 로고스는 전 우주적 로고스로서 모든 사물들 속에서 찾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철학자들에 의하여 알려지고 인간들은 그 자신이 이성적 존재로서 로고스를 자신들의 일부분으로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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