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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론/Christology] 토마스 아퀴나스의(Thomas Aquinas) 기독론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4. 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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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기독론
발제자: 정홍열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오늘날 있는 교리문답 양식과 유사한 선례를 남긴 아퀴나스



발제 내용 요약
신학대전 안에서의 그리스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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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는 유럽에 대학이 번성했던 시기였으며 대학과 수도원을 중심으로 신학이 철학의 도움을 받아 이론 신학으로 자리 잡아가던 시기였다. 토마스는 1567년 교황 비오 5세에 의해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사로 공인된 13세기 스콜라 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카톨릭 신학 안에서의 토마스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19세기에도 로마 카톨릭 교회에 의해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교 철학의 기본적 지침으로 선언되었다.

신학사적으로 볼 때 신학대전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완성된 그리스도교 교부 신학을 중세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 토마스가 집대성한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저술로 평가받는다.그가 저술한 신학대전은 종전까지 전해 내려오던 그리스도교 신학을 총 정리한 것일 뿐만 아니라 신학과 철학의 통합을 시도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리스도론의 구성과 주제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토마스가 전체 주제들을 질문과 답변의 형식으로 장과 문, 항에서 자세하게 소개하면서 그리스도교 교리의 전체 체계와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해주고 있다. 이런 기술방법은 후에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안셀름의 성육신의 동기를 수용하면서 칼케돈의 형식을 고수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연합을 고수한다. 그리고 예수의 생애를 그리스도론의 중심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가 남긴 저작물은 그리스도교의 요리문답의 기본형식인 신학대전의 그리스도론에서 먼저 구축해 놓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스도론의 내용
성육신의 필요성과 결과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신다는 생각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주장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육체를 취하셨다는 주장이 적절한가에 대한 논의는 토마스의 그리스도론의 첫 장을 여는 질문이기도 하면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끊임없는 질문이었다.

필요성에는 대체 가능성이 없는 절대적 필요성이 있는 반면에 다른 대체 가능성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더 유용하고 효과적인 선택으로서의 필요성이 존재한다. 전자에 해당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음식의 경우이고, 후자의 경우는 인간이 여행을 편리하기 위해 필요한 말이 해당된다. 전자는 없어서는 안 될 것이나, 후자는 있으면 좋은 경우이다. 그런 점에서 성육신은 절대적 필요성보다는 상대적 필요성에 속한다. 왜냐하면 성육신이 절대적 필요성이었다면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손상이 가게 되는, 그분을 필연적으로 제약시키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상대적 필요성이란 다른 선택도 가능했지만 하나님이 성육신이라는 방법을 가장 선호했다는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상대적 필요성이란 다른 선택도 가능했지만 하나님이 성육신이라는 방법을 가장 선호하셨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레네우스 -> 암브로시우스 -> 보나벤투라 -> 토마스: 성육신의 동기가 죄와 연결됨

다우튼 -> 헤일즈 -> 알베르트 -> 스코투스:
성육신의 동기가 하나님의 사랑과 연결됨 -> 성육신은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선언이다.

 

토마스는 성육신의 동기를 단지 원죄의 속죄로만 몰고 가려는 그릇된 주장에 대해서, 원죄뿐 아니라 모든 죄, 즉 자범죄까지도 포함하여 인간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연의 질서로 회복시키려는 구원의 수단으로 보았다. 성육신의 신비의 핵심은 무엇보다 바로 실체의 연합이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성육신은 본성이 아니라 인격의 연합이었다.

토마스의 네스토리우스 테도도르 비판
토마스는 연합을 분리로 생각하려는 경향에 대하여 이런 주장을 펼친 네스토리우스와 테오도르를 모두 비판한다. 이들은 말씀이 인성과 우연적으로 연합했으며 인간 그리스도 안에 말씀이 계신 것은 마치 성전 안에 신성이 거하심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떤 실체가 다른 실체와 우연적으로 결합할 경우 반드시 그 수가 단수로 유지된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마치 사람이 옷을 입는다 해도 옷과 사람은 각각 단수로 남는 것이지 결코 연합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스토리우스의 결론은 그리스도의 인성은 신성과 분리되어 각각 하나의 인격을 이루게 됨으로 인자가 한 분 이시고 또 성주가 다른 한 분으로 남는다는 주장이다. 또 어떤 자들은 연합을 혼합으로 생각한다. 인성이 말씀 안으로 본질적으로 들어가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본성을 형성한다고 여겼다. 라오디게아의 아폴리나리스가 바로 이런 주장을 했다.

토마스의 두 본성의 연합 교리 결론
반면 토마스는 이단들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연합이라는 것은 실체적이고 인격적인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피조세계의 것들 중 아타나시우스 신조에서 표현한 이성적 영혼과 몸의 연합의 보기보다 더 근사한 예를 찾긴 힘들다. 결국 토마스가 정리한 두 실체의 연합은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처럼 두 본성이 두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처럼 신성이 이성적 영혼을 대체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유티케스의 주장처럼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어 진정한 인간의 본성을 상실한 것도 아니었다.

성육신하신 예수는 하나님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연합의 원인이자 완성이시다.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속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은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서 접붙임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 접붙임을 통해 마치 인간의 행동에 관한 지령이 머리로부터 전 신체로 전달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공로가 다른 지체로 전달된다. 여기서 머리의 은혜가 각 지체로 거룩케 하시는 은혜로 역사한다.

토마스와 칼빈의 대조점
토마스는 후에 칼빈이 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체계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서 율법의 수여자와 제사장과 왕의 기능을 보았다. 그러나 토마스에게 있어서 율법의 수여자와 왕직은 칼빈보다 상대적으로 소극적으로 다루어졌고, 그에게는 구속론적 관점에서 제사장직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그리스도는 제사장이시면서 동시에 제물이다.

인생의 길의 모범이신 그리스도의 삶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을 생각할 수 있는 원인자와 완성자로 소개하고 있다. 예수의 삶은 덕을 추구하는 삶과 악에 빠진 삶 사이의 갈등을 해결해준다. 왜냐하면 성육신은 우리 안에서의 본래적 은사뿐만 아니라 모든 죄에 대한 구원의 수단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이다.

한편 토마스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의 이유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면서도 오늘날 그리스도의 선포의 중심 메시지로 간주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안셀름의 메시지를 수용하면서, 거리를 둔 토마스
안셀름에 앞서서 이미 교부들의 전통도 구속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여기서 부정적인 면이란 다름 아니라 죄의 사탄의 종 됨으로부터 보상이라는 말이다. 안셀름은 보상보다는 죄에 대한 책임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기에 무한하신 분에 대한 침해는 무한한 보상이 요구된다. 이는 오직 신적 인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토마스는 이런 안셀름의 만족설적 주장을 수용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만족이라는 방법이 강요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에 하나님을 향한 필연적인 당위성이 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 반대하면서 이런 완전한 만족을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우릴 구원하실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스도가 담당하셨던 만족의 부분은 객관적이고 도덕적으로 무한한 것이었다. 성자가 취하신 인성 안에서 신적 인격이 당하신 수난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토마스에게 믿음은, 죄 사함이 뒤따르게 되는 믿음으로, 그것은 결국 사랑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 사랑에 의해서 완성되는 믿음은 우리의 행함을 새롭게 만들어 준다.

정홍열 교수의 평가
토마스는 성례전을 구원사건의 도구 원인으로 보았지만, 하나님을 주요 원인으로 보았다. 이는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용했지만 성서의 중심 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의 영원한 복에 이르는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하지만 소위 루터가 제안했던 십자가의 신학적 사고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수난 안에서 같이 아파하시고 고난 당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파악하기까지 그리스도의 수난의 깊이를 인식하는 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또한 인간이 돌아가게 될 그 목표가 영광의 삶으로 표현된 반면 이 모습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의 삶의 선포와 행동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인식하기에는 미흡했다. 이것이 그의 시대적 한계였다. 이러한 인식은 20세기 초, 요한네스 바이스와 알버트 슈바이처에 의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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