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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8장 1-21절) 결벽증적 세계관을 가진 빌닷과 농구선수 서장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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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쉬는 시간에 어떤 TV 프로그램을 보십니까? 저는 얼마전 아는형님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아는형님JTBC 방송국의 대표 예능입니다. 이 프로그램에는 천하장사 강호동, 국보급 센터 서장훈, 가수 김희철, 천재 개그맨 이수근 등 다양한 출신의 연예인들이 참여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프로그램을 보다 굉장히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습니다. 농구선수 서장훈, 그리고 개그맨 이수근씨가 서로 시비가 붙었기 때문입니다. 이수근씨와 서장훈씨의 나이는 현재 각각 46~47세입니다. 서장훈씨는 어릴 때부터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반면, 이수근씨는 시골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방송 중에 이수근씨가 자신이 어린 시절, 너무 가난해 신발이 없어 짚신을 신고 다녔다는 말을 했습니다. ? 짚신을 신고 다녔다고요?

그러자 서장훈씨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고 말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수근씨는 자신이 어릴 때 책가방이 없어서 보자기에 책을 싸서 학교를 다녔다고 했습니다. 보자기에 책을 넣고 다녔다고요? 그러자 서장훈씨는 이수근씨가 개그 욕심이 너무 심해 무리수를 두는 것이 아니냐며 비아냥거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수근씨는 자신이 돈이 없어 미군을 통해 처음 초콜릿을 먹어봤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서장훈씨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하지 말라며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서장훈씨 뿐 아니라 주변의 다른 출연진들도 이수근이 개그 욕심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주고 받던 대화였는데, 계속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이수근씨는 답답해 하며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예능에서 다큐멘터리가 되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송을 보는 저도 이수근씨의 말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워낙 장난을 잘치시는 분이라 저것도 개그라고 여겼던 것이죠. 설마 진짜 짚신을 신고 초등학교를 다녔을까? 정말 보자기에 책을 싸서 학교에 다녔을까? 정말로 미군을 통해 처음 초콜릿을 먹어봤을까?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도 아닌 이수근이 저런 경험을 하면서 자랐을까? 그런데 이 에피소드의 결말이 어떻게 끝났는지 아십니까? 이수근씨가 아버지와 전화통화를 했는데요, 그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놀랐었는데요, 그 중에서 서장훈씨가 가장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서장훈씨는 자신의 세계관이 부수어진 것 같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라 잃은 표정을 지은 것이죠. 같은 나이대의 같은 시대를 산 사람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때 해당 방송을 본 많은 네티즌들은 서장훈씨가 어릴 때부터 서울의 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수근 씨의 말을 믿기 어려웠을 것이라 했습니다. 서장훈씨의 세계관에서 이수근씨의 주장은 도저히 있을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설교를 앞두고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욥기 18장에서 나타난 수아 사람 빌닷, 그리고 욥의 모습이 서장훈 그리고 이수근씨의 모습과 조금은 유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욥은 전장인 17장에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합니다. 자신이 절대 이러한 벌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자 빌닷은 욥의 주장에 맹렬하게 반응합니다.

빌닷의 주장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는 1~4절에서 서론을 제시한 후, 이어지는 5~21절까지는 악한자가 직면하는 운명에 대해 나열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악한 자는 현재 고난에 처한 욥을 의미합니다. 이게 과연 지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심한 말을 뱉습니다. 욥을 악인으로 묘사하고요, 그의 후손과 후예가 없고, 유황이 그의 처소를 삼킬 것이라 말합니다. 그를 기념함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의 비참한 최후 때문에 서쪽과 동쪽에서 오는 사람들이 놀랄 것이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나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빌닷은 욥이 하나님을 왜곡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빌닷은 이렇게까지 저주를 퍼 붇고 친구의 말에 하나도 공감하지 않았을까요? 빌닷은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반드시 악인은 저주를 받는다는 인과응보’! 이 세계관이 흔들리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욥은 9 5~6절에서 하나님을 분노로 산을 제거하시고 땅을 움직여 기둥을 흔드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땅을 움직여 기둥을 흔든다는 말은 하나님이 자신이 세운 질서도 갈아 엎을 수 있음을 뜻합니다.


이에 빌닷은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라고 말하며 응수합니다. 욥에게 있어 하나님은 의인에게도 고난을 주실 수 있으며, 자신이 창조한 멀쩡한 땅과 산도 불규칙적이게 흔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빌닷의 주장은 너 한 명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욥은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바꾸었지만, 빌닷은 욥의 태도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빌닷은 모세의 신학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모세가 기록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그분은 지구를 6일동안 규칙적이게 창조하신 분입니다. 첫째 날에는 빛, 둘째 날에는 궁창, 셋째 날에는 바다, , 식물, 그리고 넷째 날에는 해, , , 다섯째 날에는 새, 물고기, 여섯째 날에는 동물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첫째 날에서 셋째 날에는 혼돈에서 질서를 만드셨고, 넷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는 공허한 우주를 규칙적으로 채워 가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확실한 인과응보의 법칙을 제시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부분을 매우 강조합니다. “너희가 나에게 복종하면 내가 복을 내리고, 너희가 불순종하면 너희를 저주할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신명기 신학입니다. 그는 지금 이 프레임으로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빌닷의 문제점은, 그에게 다른 어떤 세계관이 침투할 수 있는 작은 틈도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는 마치 결벽증적 세계관에 걸린 사람 같습니다. 결벽증이란 무엇입니까? 항상 자신의 공간은 깨끗해야 하고, 항상 아름다워야 하며, 항상 규칙적이고, 예외가 없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죠. 실제로 제가 서두에 언급한 농구선수 서장훈씨도 자신의 공간을 매우 청결하게 하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청결과 질서에 대한 강박이 너무 심해서, 많은 동료들이 결벽증 환자라고 부릅니다. 서장훈씨는 농구선수 시절에 항상 이러한 강박증을 가졌다고 하는데요, 이런 강박증적인 태도가 자신이 선수로 성공하는데에 있어서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규칙에 대한 강박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서장훈씨가 이수근씨의 주장을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죠.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이 그동안 살아왔던 세계관을 침해하고, 뒤트는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대한민국에서 이수근씨와 같은 동년배의 나이로 살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죠. 이것이 결벽증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의 약점입니다.

물론 저런 태도를 가진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은 다 고유의 관점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고유의 관점을 가지고 사는 것이 세상을 더욱 빠르게 이해하고 행동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사건을 판단해야 합니다. 모든 정보가 주어지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정보가 주어질 때까지 항상 신중한 태도만을 유지한다면, 우리는 그 어떠한 일도 손쉽고 빠르게 결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마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결벽증이 전적으로 나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공간을 청결하게 하고, 자신의 공간을 지키며 세상을 살아 가는 것은 분명 좋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벽증을 병이라 폄하하지만,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태도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공간과 세계, 규칙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저런 태도를 가지며 사는 것이죠. 결벽증 역시 규칙에 대한 지나친 강박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분명 장점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가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편안하게 여기는 세계관,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그런 관점들이 어떤 때에는 유용하지만, 다른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우리가 가진 세계관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틀이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항상 선하게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가진 어떤 인식의 틀이 수십년간 유용하게 나에게 작용해 왔지만, 다른 어떠한 경우에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하나님에게 대항하고, 반항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수십년간 유용하게 지탱되었던 세계관이 되려 상황을 오해하게 하고, 사람을 죽이고, 진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의 선택의 고비고비마다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가치관을 흔드는 어떤 것이라도 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익숙한 세계관과 익숙한 정의관, 익숙한 성공 공식, 익숙한 삶에 대한 철학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일 수도 있고요,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사회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시장의 자유를 보장하는 일,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부의 통제가 정의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가 정의일 수도 있고요, 다른 누군가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웨슬리 신학이 정의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익숙한 관점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일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지난날의 친숙한 것들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섣부르게 내가 가진 나이브한 사고의 칼로 상대를 찌르기 보다, 익숙한 사고의 틀을 내려 놓고 소용돌이 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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