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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 테르툴리아누스, 우상에 관하여 (Early Latin Theology)

신학서적

by noruboy 2020. 4. 2.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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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숨통을 답답하게 했던 책

 

저자: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
저서: 우상에 관하여 (About Idols)
출판사: 두란노 아카데미
책 이름: 기독교 4 초기라틴 신학(Early Latin Theology)

 

테르툴리아누스라는 신학 용어 ‘삼위일체’를 개발한 신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중세교회 라틴어 사용의 교과서처럼 여겨지는데 무려 982개에 달하는 신학용어를 라틴어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의 이런 세련되고 지적인 이미지와 달리 그가 남긴 저작 "우상에 관하여"는 충격 그 자체였다. 어떻게 글을 읽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리도 사람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단 말인가?

 

그는 이 책에서 우상숭배에 대한 개념을 폭넓게 제시한다. 그냥 단순하게 “신전에 가서 우상에게 절하는 것” 이것만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마술과 점성술 같은 것들도 우상숭배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 안에는 귀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술과 점성술을 즐겨선 안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장인, 상인, 무역업자, 목수 같은 직업 역시 위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를 간접적으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든 청동이 우상숭배하는 곳에서 사용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향을 만드는 일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향이 우상숭배의 신전에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각가, 바느질로 수놓는 사람, 모형 제작자, 분말석고, 도료, 돌, 청동, 은 제련 등 어떠한 일을 하든지 간에 조심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우상 숭배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피해야 한다. 심지어 그는 문학 선생도 우상을 숭배하는 행사에 매년 참석하고, 학생들에게 나쁜 사상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의 정의를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PC방이나, 당구장, 볼링장도 운영해선 안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들에 관심을 쏟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악한 것이다. 그는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단호하며, 조금의 타협도 불사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시대상황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집트 교회 질서"에 따르면 배우나 검투사들은, 그들의 직업을 포기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으로 받아들여 질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교회사 초반기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논지는 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왜 그는 이렇게까지 단호히 선을 그었던 것인가? 어떤 사람은 로마제국이 교회를 절대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들어가 로마제국을 바꾸는 일이 일어날수 없다고 여겼고, 이렇기 때문에 자기들끼리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에만 초점을 두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삶 안에 있는 어떤 신비로움을 발견하거나, 혹은 그 안에 구원의 비밀이 있다고 여기면 선교의 문이 자연스럽게 열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것 역시 추정이다.

 

즉 테르툴리아누스의 전략은 아예 차이점을 최대한 부각시켜 세상에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향후를 모색하는 방식이다. 이런 그를 보고 기독교 윤리학자 리처드니버는 그가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평했다.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 외골수 같고, 바보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기독교인들이 당시 우상숭배를 하던 로마인들에게 큰 인상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기독교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 것은 맞다. 그의 이런 방향제시가 폄하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을 폄하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서는 이러한 모습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가 성도에게 이렇게 살자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거의 찾기 힘들 것이다. 그의 이런 순수한 태도,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지키려고 발버둥치며 타협하지 않으려는 자세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아래와 같은 의문이 들었다. 만약 이런 식으로 모든 성도들을 판단한다면 과연 교회에 누가 들어올 수 있을까? 이런 식의 높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도대체 누가 교회에 와서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구원을 받는단 말인가? 어떤 이는 기독교적 표준을 낮추면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들어갈 수 있게 되고, 이로 인해 세상을 복음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 이런 주장을 좋아하진 않는다. 하지만 율법의 잣대를 어느 정도는 낮추는 것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가장 중요한 영혼 구원 사역에 소홀하게 되고, 본질 대신 이상한 눈치문화와 허례의식만 늘어날 것이다. 지금은 우상 숭배에 대한 기준이 그의 시대와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우상이라는 것이 눈에 확 보였기 때문에 무엇이 우상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대놓고 보이는 우상은 없어졌지만 이제는 비가시적 우상이 판을 치고 있다. 오늘날 가장 큰 우상은 무엇일까? 이렇게 묻는다면, 이에 대한 답은 각자마다 다를 것이다. 누구에게는 명예, 누구에게는 자기의(Self-righteousness), 누구에게는 성공, 누구에게는 쾌락, 그리고 누구에게는 사역이 우상이 될 수도 있다. 이제는 각자가 무엇이 우상인지 고민하고 스스로 대처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우상이 너무 다양해졌고, 그것을 판별하는 하나님의 잣대 역시 가지 각색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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