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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한 에베소 공의회(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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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8. 13.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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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초기 그리스도교 에큐메니컬 7대 공의회 (The First Seven Ecumenical Councils 325-787) 
저자: 레오 도널드 데이비스
옮긴이: 이기영

네스토리우스 신학의 전파 경로

428년 말에 네스토리우스가 부임하면서 콘스탄티노플로 함께 온 안디옥 교구 출신 성직자 한 사람이 마리아에게 주어진 칭호인 하나님의 어머니교리를 논박하는 설교를 했다. “어느 누구도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부르지 못한다. 마리아는 단지 한 인간이고, 하나님이 한 인간에게서 나신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3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고대 헬라어 기도문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 용어를 자주 사용한 사람으로는 오리게네스, 아타나시우스,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 예루살렘의 키릴루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등을 들 수 있다.

이 용어는 콘스탄티노플 교구 신자들에게는 정통 신앙의 일부였기에 당연히 성모론 거부에 저항이 있었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도 기회가 되면 성모론 공격에 나섰다.

 

일부에서는 네스토리우스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괴물같이 여겨 몹시 두려워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어떤 이들은 네스토리우스가 설교할 때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쓴 피켓을 들고 스위를 벌였다고 한다.

당시 교황 첼레스티노는 이런 네스토리아누스에 대한 오해들로 인해 그의 서신들을 그리스적 정서와 언어에 정통한 마르세유의 카시아누스에게 보냈다고 한다. 카시아누스는 이미 리포리우스의 엄격한 이원론적 그리스도론을 정죄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때마침 로마 교황청을 위해 일곱 권의 네스토리우스 비판서를 쓰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카시아누스는 그리 위대한 신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네스토리우스가 예수가 완전한 신성을 갖지는 못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양자가 되었다는 이유에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이것은 네스토리아누스의 사상을 완전히 잘못 이해한 것이다.

당시 교황에게는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다. 이것은 그가 문제의 현장에서 떨어져 있기도 하고, 그리스어로 저술된 네스토리우스의 문서를 라틴어로 번역한 이후에 간접적으로 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훨씬 더 위험한 반대자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키릴루스 총대 주교였다.

키릴루스와 네스토리우스의 논쟁은 무엇에 관한 전투였나?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의 어머니에 관한 논쟁이다. 그것에 대한 찬반은 그리스도론에 대한 차이로 연결된다. 네스토리우스는 안티옥의 전통을 대표하고, 키릴루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전통을 대변했다.

그런데 네스토리우스는 아리우스와 아폴리나리우스에 반하여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전적으로 주장한 사람이었다.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면, 아들은 여인의 단순한 피조물을 뜻하게 됨으로 아리우스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되고, 또한 예수의 인성이 말씀의 현존으로 온전해질 수 있다고 이해됨으로 아폴리니리우스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된다고 보았다.

네스토리우스는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낳았고, 그리스도는 신성을 담는 그릇이기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보다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어떤 이들은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신과 인간을 각각 독특한 특성을 지닌 두 인격체로 분리하고 서로 선한 의지를 발동해 도덕적으로 합일을 이루도록 인위적으로 연결하는 양자론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이신 하나님과 인간이 되신 분은 숫자상 둘이 아님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두 본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본성이란 존재의 구체적 특성을 말한다. 두 본성을 하나로 결합된 후에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서로 혼합되거나 혼동되지 않고 본래대로 보존되며 본래의 특성과 역할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진정으로 구원하려고 그리스도는 참 인간의 삶을 사셨지만 신성이 인성을 삼켜버린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일 때에는 나누어질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인 이중적인 존재이다.”

우리는 두 분의 그리스도도, 두 분의 아들도, 두 분의 독생자나 주님도, 한 아들과 다른 아들도, 처음 그리스도와 두 번째 그리스도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창조되고 성육신 하신 그의 본성을 통해 그가 한 분이요 동일한 분임을 안다.”

네스토리우스는 두 본성이 느슨하게 이어져 두 위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구별되는 두 요소가 하나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신성과 인성은 각기 고유한 특성이 완전하고 손상되지 않은채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게 된다.

말씀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다고 할 때, 네스토리우스는 두 본성이 혼합되거나 혼동된다고 오해하지 않도록 연합보다 연결이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연결이란 자발적인 현상으로서 두 본성이 하나로 합치는 것은 물리적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 신성의 모습으로 인간의 사랑과 복종 속에 내려와서 일으키는 사건을 말한다.

 

이러한 연결로 생겨난 귀결이 바로 하나의 프로소폰인 그리스도다. 그는 한 분이신 우리 인식의 대상이요, 외적으로도 나누어짐이 없는 분이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말이 진실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하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 그리스도도 영원하지만 죽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나셨다고 말할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하려면 연합된 프로소폰인 그리스도가 동정녀에게 나셨다고 말해야 한다.

네스토리우스는 신성이 불변이라는 이전의 모든 교부의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그는 성육신에서 본래의 말씀이 변모하거나 고난받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말씀이 고난받는다는 표현은 오직 그의 모습이 모욕당하고 죽는 것을 표현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땅 위의 삶, 곧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말씀 자체의 일이 아니라 인성과 신성의 연결로 생긴 인격체, 곧 그리스도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손상 없이 완벽하게 보전하려는 시도로서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리스도의 인성을 완벽하게 그리고 객관적인 실체로 입증한 것은 그 덕분이다. 문제는 두 본성이 한 인격체 안에서 결합되었는지, 곧 그를 단수의 형이상학적 주어로 삼을 수 있는지이다.

여기서 네스토리우스는 말씀을 주어로 보는 것을 절대 용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신성도 고난을 받게 된다고 해야 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완벽한 인성이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제3의 요소, 즉 두 본성의 연결의 결과인 공통의 프로소폰에 의지했다. 그가 이토록 진지하게 노력했으나 교회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프레스티지는 네스토리우스를 이렇게 평가했다. “네스토리우스의 비정통성은 긍정적 진실 주장이 아니라 부정적 무능력에 있다.

그의 스승인 테오도루스처럼 그리스도의 두 본성의 특징을 놀라울 만큼 명확하게 설명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것을 분명한 논리로 제시해 놓은 단수의 인격체라는 틀 속에 제대로 삽입시키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은 서방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정죄당한다.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동방으로 퍼졌다. 그래서 서방 기독교가 아시아로 선교를 진행하지 못하던 시점에, 그의 가르침을 통해 중국/몽골/페르시아를 비롯한 다수의 국가에 기독교가 퍼지게 된다.

한편 페르시아의 왕은 페르시아 그리스도인들에게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부추기면서 로마제국의 간섭을 배제하는 방파제로 삼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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