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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무덤에 묻히지 않았을까?' 시신 매장 전통과 증거 바로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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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ruboy 2020. 7. 29.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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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자: 크레이그 A. 에반스

내용 요약
바트어만이 도달한 몇 가지 부정적인 결론은 반드시 도전을 받아야 한다.
1)
예수가 알려진 무덤에 매장되었다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허구다
2)
예수의 제자들은 아마 빈 무덤을 발견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3)
실제로 예수가 매장되었다는 것조차 별로 개연성이 없다.
4) (
설령 예수의 빈 무덤 발견이 실제로 있었어도) 그것이 제자들의 신앙적 각성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거나 전무할 것이다.

예수의 시신은 무덤에 안치되었는가?


어만이 제시하는 근거?
1)
가장 초기의 신조에는 무덤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2)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

고전 153-5
[15:3,
개정]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15:4, 개정]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15:5, 개정]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어만은 예수의 매장과 관련하여 어떤 이름의 부재에서 상당히 많은 걸 이끌어낸다. 그는 왜 요셉에 의해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를 기록되지 않았는가? 어만은 이 신조의 저자가 이 전승을 알았더라면 유대의 존경받는 공의회의 일원이었던 요셉에 관한 언급을 반드시 포함시켰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요셉이라는 이름의 부재에서 예수를 장사한 것으로 알려진, 특정 인물이 있었다는 전승은 후대의 것으로 보인다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한발 더 나아가 그는 사도행전의 바울 어록 중에는 예수가 요셉에 의해 장사되었다는 것을 언급한 내용이 없음을 주목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도행전 13: 29절은 두루뭉술한 이야기밖에 없다.

[13:29,
개정]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어만은 또한 로마 관행상 십자가 사형수는 매장이 불용되었다는 걸 부각함으로써 아리마대 요셉의 스토리에 한층 의구심을 더한다.

십자가 사형수 매장과 관련된 로마의 정책은 어떠했는가?
물론 로마제국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매장하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린 채로 썩어 새와 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했다는 진술이 더러 있다. 이에 관한 끔찍한 기술이 고대 저술에 있다. 호라티우스는 십자가에 매달려 까마귀 밥이 된다(기원전 25년경의 서신서’ 1.16.48)”고 적었다.

그의 헛소리는 계속된다.예수를 죽인 것은 유대인이 아니었다.
2)
그러므로 유대인은 언제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릴지에 대한 발언권이 없었다.
3)
예수를 못 박은 로마인들은 유대 법에 복종할 마음이 없었으며 유대인의 민감성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다.
4)
후에 어만은 범죄자의 시신을 취급하는 정상적인 방식은 자연 부패하여 먹이를 찾는 짐승의 먹잇감이 되도록 방치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로마제국에서 십자가에 시신을 방치하고 매장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일상적이었는지 우리는 확실히 알지 못한다.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어만을 비롯한 일각에서 당연시하는 것과는 달리 증거가 다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문제와 연관성이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 필로(기원전 20 ~ 기원 후 50년경)가 이집트 총독 플라쿠스의 불법행위와 사망에 관해 기술한 글에 나온다.

나는 이런 류의 경축일 전날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친지들에게 양도하는 사례들을 알고 있습니다. 사형수에게 매장과 정상적인 장례의식을 허용하는 것이 선처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황제의 생일을 맞이하여 죽은 자도 어떤 종류의 은전을 누리는 것이 마땅하며 절기의 거룩함도 지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플라쿠스) 83”.

그러나 어만은 이것이 일반화된 관행에 반하는 예외적인 경우라고 설명한다. 더 나아가 어만은 이런 류의 경축일 전날에 일어난 사례들은 유력한 가문 출신에 해당되며 이런 류의 경축일은 로마 경축일이었지 유대인의 경축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면을 베푸는 로마 관행은 다양한 원자료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기원후 85년경으로 추정되는 한 문헌에 의하면 이집트 총독 셉티미우스 베게투스는 중대 범죄로 고발당한 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너는 태형을 받아 마땅하다….하지만 널 군중에게 넘겨준다.”

다음은 우리가 로마법대전(Digesta)라고 알려진 로마법 요악집에서 발견한 권고다.

사형수의 시신을 친인척에게 양도하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신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생애>의 제10권에서 이러한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는 처벌당한 자의 시신은 시신 매장 요청이 있고 허가가 내렸을 때만 매장한다. 특별히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의 경우를 포함하여 시신 매장이 허용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화형 선고를 받은 자의 시신도 그 뼈와 재를 수습한 후 매장하도록 한다 (48.24.1).

처벌 당한 자의 시신은 매장 목적으로 시신을 요구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지 그에게 시신을 양도해야만 한다 (48.24.3).”

이 로마법 요약집에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시신 양도를 한 사례가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요세푸스 자신도 베스파시안의 아들 티투스에게 시신 인도 요청을 했고 티투스는 이를 수락했다 (<생애> 420-21). 물론 <로마법대전>에 기술되어 있듯이 요청의 유무와 무관하게, 특히 대역죄의 경우에는 로마 정부가 매정을 불용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십자가 처형의 공포 효과 (그리고 억지효과)에는 비매장도 한몫했다.그러나 평화시에, 특히 예루살렘 성벽 바로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십자가 처형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유대인의 민감성과 관습을 고려할 때, 매장에 대한 기대, 심지어 요구가 있었을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에 관한 그녀의 책에서 헬렌 본드가 한 논평이다. “빌라도와 또 어쩌면 다른 총독들도 유월절과 같이 잠재적으로 소요 위험이 있는 절기에는 로마 당국의 선의의 제스처로 중범자 이외의 일부 죄수를 방면했을 수 있다.”[1]

기원전 2세기 셀레우코스 왕조로부터 자유를 쟁취하려는 하스모니안가를 로마가 지원했을 때부터 로마와 이스라엘은 우호적인 발판 위에서 관계를 시작했다. 로마와 이스라엘의 동맹은 헤롯 대왕 때 한층 강화되었고, 비록 헤롯 대왕의 아들들과 후계자들 치하에서는 약화되고 덜 안정적이었지만, 그래도 명맥을 유지했다.

요세푸스도 동일한 주장을 한다. 그는 로마인들은 피지배 민족에게 그 민족의 법을 어길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유대인 역사가이자 변증론자는 아그립바 1세의 후임으로 온 로마 지방 총독들은 이 나라의 관습에 개입하는 걸 아예 회피함으로써 나라의 평화를 유지했다”고 덧붙였다 (‘유대전쟁사’ 2.220). 여기서 관습이란 시신을 매장하지 않은 채방치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을 포함한다(<아피온 반박> 2.211). 로마 총독들이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에 시신을 방치하는 일을 빈번하게 자행했다면 그들이 나라의 평화를 유지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빌라도가 훗날 지배층인 제사장들과 연합하여 유월절 전날 예루살렘 성벽 바로 밖에서 예수를 처형한 후 유대법과 정서를 무시한 채 예수와 다른 두 처형자의 시신 인도와 일몰 전 매장을 불용했다니. 나는 믿기 어려운 처사라고 본다 (예루살렘의 정결은 궁극적으로 지도층인 제사장들의 책임 소관이었고 그들과 산헤드린은 처형당한 자를 제대로 매장할 책무를 안고 있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아래에 부연 설명한다).요세푸스는 유대인들은 매장 의례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다. ‘심지어 십자가형을 언도 받은 악인들조차도 그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일몰 전에 매장할 정도다’. “일몰 전에 매장되었다는 언급은 신명기 21: 22-23에 나온 범죄자의 처형과 매장에 관한 율법을 일컫는 것이다.

[21:22,
개정]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1:23, 개정]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신명기 21장은 새로운 방식으로 후에 재해석되었다. 이 내용은 쿰란에서 발견된 성전 두루마리에도 나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민족을 배신하고 외세에 민족을 넘김으로써 동족에게 악을 범했다면 그를 나무에 매달라 죽을 때까지 있게 하라. 두세 증인의 증거로 그를 죽이고 증인들이 직접 그를 나무에 매달도록 하라. 만일 어떤 사람이 죽임 당할 만한 죄를 짓고 다른 나라로 도피하고 동족과 이스라엘의 자녀들을 저주한다면 그를 또한 나무에 매달라 죽을 때까지 있게 하라. 그러나 그 시신을 밤새 나무에 달아두어서는 안 되니라. 사형 당일에 반드시 확실히 그들을 매장하라. 이는 나무에 매달린 자는 누구나 하나님과 사람의 저주를 받은 자이니 너는 내가 너에게 기업으로 물려주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11Q19 64:7 – 13a).

고고학적 증거
1968년에 발굴한 한 유골함의(기밧 하-미브타르 지역에서 발견된 제1무덤의 4번 유골함) 주인공은 십자가에 못 박힌 게 분명한 여호하난이라는 유대인 남자였다. 이 유골함은 어떻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을지에 관한 고고학적 증거와 통찰을 제공한다. 유골함과 그 내용물의 연대기는 기원 후 20년대 후반이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형을 포함하여 많은 사형수의 시신이 제대로 매장되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은 있다. 내가 말하는 흔적은 무덤과 유골함에서 발굴된 수십여 개, 어쩌면 백 개가 넘는 못이다. 그 못 중 일부는 인간 칼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특히 십자가형에 사용되었던 칼슘 흔적이 있는 못은 기이하게도 부적으로 여겨졌다. 칼슘의 존재는 그 못이 십자가형에 사용되었음을 나타내며 못에 찔린 시신이 매장되었다가 얼마 후 (칼슘이 못에 들러붙은 후) 못이 시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용도로 재사용되었음을 암시한다.

빈 무덤과 예수가 부활했다는 믿음의 역할

어만은 예수가 어디에 매장되었는지를 눈여겨보고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최초로 발견한 이들이 여자들이라는 전승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어만이 생각하는 것처럼 복음서 이야기가 허구로 충만하다면 왜 복음서 기자들이 이 이야기를 윤색해 남자들을 더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남성 복음서 기자들은 빈 무덤의 최초의 발견자가 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유대인과 이방인 동일하게) 회의론자가 더 쉽게 의혹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틀림없이 인지했을 것이다. 사실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져 켈수스와 포리피리 같은 이교도 회의론자들이 조소 섞인 도전을 제기했다. 적대적인 유대인 지도자들과 로마인들이 남자 제자들과 같이 부활을 목격했다는 2세기의 베드로 복음의 주장은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 창작된 것이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일러주듯이 예수의 최측근 제자들은 마침 도주 중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여타 제자들과 가족 구성원들은 예수의 무덤을 방문하고 예를 표하기 위해 남았을 것이다. 사실 예수의 체포와 처형 직후 위정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을 붙잡아 투옥했다는 증거는 없다. 내 견해에는 여성이 빈 무덤의 최초 발견자라는 전승은 부활의 실재성까지는 아니더라도 빈 무덤의 역사성 쪽으로 기울게 하는 강력한 한 편의 증거다.

이 시점에서 어만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인용한 바울의 신조에 빈 무덤에 대한 언급이 부재하다는 그의 논점으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논리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신조는 본래 간결성과 미니멀리즘을 특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가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는 동어반복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미 그들이 다 알고 있는 장사 관행이나 다른 자료들을 반복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아리마대의 요셉이라는 이름이 고린도전서 15장의 신조에 부재하다는 것이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예수를 장사 지낸 적이 없다는 증거가 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믿는 데에 빈 무덤이 필요치 않았다는 어만의 주장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론적으로는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실제로 예수가 제자들이 직접 만져볼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면, 그가 투명하거나 유령 같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비록 예수의 시신이 무덤에 남아 있었을지라도) 예수가 진짜 부활했다는 결론에 무리 없이 도달했으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부활을 믿었던 고대 후기의 유대인들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이야기했다. 이런 기대의 성서적 근간은 뼈에 살과 생기가 붙는 에스겔의 환상과 (37), 특별히 이사야 26: 19과 다니엘 12: 2이 핵심적이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최선은 몸의 부활에 관한 기대는 예수와 후에는 그의 제자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종교-정치 분파인 바리새파의 믿음이었다는 것이다. 이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예수 운동에 매력을 느끼고 (15: 5), 일부 유대 공회원들로 하여금 바울이 공의회에 출두했을 때 바울을 옹호하게 한 것은 (23: 6-9)은 예수의 부활이었다. 만일 예수의 시신이 여전히 무덤에 있었더라도 그들이 부활에 관해 말했을지에 대해 나는 회의적이다.


 


[1] Helen K. Bond, Pontius Pilate in History and Interpretation (SNTSMS 100;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199-200, and J.S. McLaren, Power and Politics in Palestine: The Jews and the Governing of their land 100 BC – AD 70 (JSNTSup 63; Sheffield: JSOT Press, 1991), 93 n.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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